레모네이드 비가 내리던 날

 

오후의 햇살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화가 난 목소리로 이틀 전의 실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그 아이는 내 이야기에 가끔씩 맞장구를 치면서 습관처럼 커피잔에 입을 가져갔다. 나는 마치 처음 겪는 아픔인양 어떻게 그럴 수 있니- 어떻게 그럴 수 있니-를 연발했고, 그 아이는 그렇구나, 응- 하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손님은 아무도 없는, 색바랜 하얀색으로 가득찬 카페의 창가 자리. 카운터 한 귀퉁이에선 아르바이트생이 지루한 얼굴로 철지난 잡지를 읽고, 창 가에 놓여진 가짜 꽃들은 먼지가 쌓여 있었다.

“그런데 모르겠어. 정말- 실연이긴 한건지 궁금해.”
“그럼?”
“그냥 짝사랑 아니었을까 싶어.”
“그래? 네 심장이 그렇게 말하니?”

심장이-란 말에 픽하고 웃음이 났다. 그 아이는 여전히 그때처럼, 푸르고 작은 미소를 띄고 있었다. 잘개 쪼개진 햇살들이, 당근색으로 염색했다가 이제는 탈색된, 한가닥으로 길게 땋아 뒤로 늘어뜨린 그 아이의 머리카락으로 흘러내린다. 그 아이는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내 시선을 피하려는 듯 잠시 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가자-“

그 아이가 일어선다. 응?- 하면서 어리둥절한 얼굴로 가만히 있는 내게, 그 애가 다시 입술을 연다.

“비가 와-“

아, 하면서 나도 몸을 일으켰다. 계산을 하고 카페를 나오니, 그 아이는 벌써 저만큼 먼저 걸어가고 있었다. 환한 햇살 사이로, 맑은 노란 빛의 비가 부드럽게 내리고 있었다.

“오랫만이야. 이런 레모네이드 비-“

 

맞아- 라고 대답하며, 나도 고개를 들었다. 그 아이가 춤을 추듯 스텝을 밟으며 비 내리는 사이사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살짝 혓바닥을 내밀어 비를 맞았다. 달콤하면서도 산뜻한 신맛이었다. 이런- 오늘 비는 참 좋은 걸- 간만에 멋진 맛을 내고 있어- 라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그때도- 내가 저 아이에게 고백을 하고 채였을 때에도, 이런 맛의 레모네이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렌지 에이드도 콜라도 아닌, 레모네이드 비가. 크게 아프거나 하지는 않았었다. 나는 사람에게 쉽게 반하고, 쉽게 좋아하고, 쉽게 아파하니까. 그냥 채인 것 정도는 사흘정도 끙끙 앓고 나면 금방 나아버린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사귈 수 있을 것이라 믿은 것도 아니었다. 그 아이를 더 좋아하면 안될 것 같아서, 나름대로 마침표를 찍어야 겠다는 생각으로 고백한 것이었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이가 없는 결정이긴 했지만. 하지만 … 그러니까, 이렇게 친구가 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때 조금 멀리서 그 애가 불렀다.

“어서와-“

나는 갑자기 눈이 부신다. 눈물이 나려는 것일까. 지금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항상 내게 거짓말을 한다. 그 사람은 지금 자신의 마음에 충실한 것이라고, 그렇게 말을 하지만. 그래서 지금은 너를 사랑하고, 어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내일은 또다른 사람을 사랑할 것이라지만.

레모네이드 비가 그 아이를 적시고 있다. 그 아이는 무척 즐거운 표정으로 스텝을 밟는다. 다시 눈이 부시다. 그 애가 밟는 스텝처럼, 모든 것은, 흘러간다.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 나는 그 아이에게 소리치듯 묻는다.

“나, 괜찮겠지?”

멀리서 나를 보던 그 아이가, 마치 바보 같은 말을 한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손을 둥글게 말아 입 앞으로 모으며 소리치듯 대답한다.

“…응!”

응-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언제나- 변함없는 연애 바보. 죽을 때까지 수천 번은 더 고백하고 차이고 그러다가 다시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아플 것이다. 언젠가 저 아이가 그렇게 말했었다. 왜 나만 자꾸 아파해야하 는 거지? 라며 어린애처럼 칭얼대는 나에게.

… 아파하니까 잊을 수 있는 거라고, 아프지 않고 어떻게 잊냐고.

하지만 … 저 아이에게 사랑은, 단 한 번이었다. 스무살의 봄 날- 그 짧았던 몇 달의 시간이, 그 때의 잊을 수 없는 하루 하루가, 너에게는 단 한 번의 사랑이었다. 나는 알고 있다. 그 사랑 때문에, 지금까지 아파하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아파해도 잊혀지기 힘들만큼, 따뜻했던 사랑.

잘- 알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가만히, 지켜봐야만 했으니까. … 삶이란 참 우습지. 그 아이와 나는, 그렇게 다른 모습으로사랑을 하면서도, 똑같은 모습으로 아파한다. 그리고 만나서 얘기를 하고, 서로를 도닥인다. 하지만 내일은, 그리고 내일은.

나는 발걸음을 옮긴다.
눈부신 레모네이드 빗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그 달콤하고 신 맛의 빗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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