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Last Exit To Brooklyn, 1989)

미국 | 드라마 | 102 분 | 개봉 1990.09.29
감독 : 울리히 에델
출연 : 스티븐 랭(해리 블랙), 제니퍼 제이슨 리(트랄라), 버트 영(빅 조), 피터 돕슨(비니), 크리스토퍼 머네이, 제리 오바치(보이스)
국내 등급 : 18세 관람가 / 해외 등급 : R

파업으로 폐쇄된 공장 노동자들의 신음 소리가 들리는 거리가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장기화된 파업에 불안해 하는 노동자들과, 항상 어제와 같은 내일을 살아가는 뒷골목의 건달들과, 전쟁 출병을 앞둔 불안한 군인들과, 몸을 팔며 살아가는 거리의 여자들이 있다.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 파업 노조의 간부와, 딸의 임신 사실을 알고 이를 숨긴 채 위장 결혼시키려는 가족과, 거리의 불량배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창녀 트랄라와, 그녀를 동경하는 한 소년이 살아가는 곳도 바로 그곳이다. 정상적인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 같은 도시. 그곳이 바로 1952년의 브룩클린이다. 영화는, 바로 거기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마약과 술과 섹스와 폭력이 난무하는 곳. 감독이 그리는 브룩클린은 지옥에 다름 아니다. 문닫은 가게들, 가동을 멈춘 공장들, 더러운 지하 술집들을 품에 안고 있는 어둠침침하고 지저분하고 음산한 도시 분위기는 ‘지옥’의 이미지를 한층 더해 준다. 이곳에서 인간성이란 도저히 찾아 볼 길이 없다. 작은 따뜻함도 정상적인 사랑도 없다.

철저하게 비인간화된 도시. 여장 남성을 골려준답시고 빙 둘러서서 칼로 다리를 맞추는 장난질은, 인류애가 사라진 도시에서 살고 있는, 콘크리트 같이 딱딱하고 무감각한 인간의 마음을 느끼게 해 준다. 섬뜩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아름다운 창녀 트랄라의 살벌한 욕지거리와 동물적 섹스는 탁월한 외모와 타락한 영혼의 묘한 2중주를 보여주기도 한다. 순수한 마음으로 창녀를 사랑하는 어린 아이의 마음이 산산조각난다는 것은 필연이다.

… 왜냐하면 이곳은, ‘지옥’이니까.

브룩클린 부두에서 실제 노동자 생활을 했던 휴버티 셀비의 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1950년대 미국의 브룩클린 부두를 무대로 하고 있다. 1980년대 최고의 영화들 중의 하나로 평가받는 이 작품은 ‘아메리칸 드림’의 실제인 폭력, 마약, 알코올, 매춘으로 오염된 현대 미국사회를 날카롭게 해부하고 있다. 어느 사회이든 모순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회는 없다. 단 그것이 노출되는 방식이 사회에 따라 조금씩 다를 뿐이다.

그러나 대부분, 한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의 부작용은 힘없는 집단에 집약되어 나타나게 된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논리일지도 모른다. 기득권자들은 자신들의 부와 권력 밑에 짓밟힌 자들의 어둠까지 나누고 싶어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1952년 브룩클린은 그 당시 미국사회가 안고 있는 부조리가 응축되어 곪고 있는 곳이다.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파업의 장기화는 내일의 빵을 위해 일자리를 얻어야만 하는 공장 노동자들을 절박한 상황으로 몰고 간다. 브룩클린 공장 지대 곳곳에서 집단 폭행과 강간, 강도가 들끓는다. 노조간부 해리, 노동자들에게 기생하는 창녀 클랄랄라, 동성애자 조젯, 그리고 거리의 불량배들은 그런 답답한 현실속에서 자신들만의 탈출구를 만들어간다.

처자가 있는 해리는 동성애와 마약에서 위안을 얻고 클라라는 돈만 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서슴치 않는다. 그리고 조젯은 자신의 애인에게 병적인 집착을 하고 불량배들은 어떤 죄책감이나 망설임도 없이 절도와 폭력을 저지른다. 가난과 무기력으로 사람들은 모두들 인간성을 상실해가고 공장 지대 전체가 광적인 불안감과 상실감으로 들뜨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에 트랄랄라가 자신의 몸을 거리의 남자들에게 내던지는 충격적인 장면은 극도에 이른 혼돈의 상징이다.

감독인 울리 에델은 1952년 브룩클린의 어두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있다. 퀴퀴한 악취가 풍기는 시궁창 같은 공장지대, 그리고 그곳에서 거칠게 살아가는 사람들. 감독은 어떤 여과도 없이 같은 하늘 아래에 이러한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똑똑히 보라고 우리에게 충고한다. 실제로 울리 에델은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10년간 침묵 속에 있었다고 한다.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미국의 영광된 얼굴 뒤에, 이처럼 추악하고 더러운 얼굴이 숨어 있음을 신랄하게 꼬집고 있다.

거리에 버려진 트랄라라를 일으켜 세워준 것은 평소 그녀를 짝사랑하던 한 소년이었다. 소년의 꿈이었던 그녀와의 데이트는 이미 깨어져버렸지만, 소년은 그저 그런 그녀를 보며 눈물 흘리며 슬퍼할 뿐이었다. 영화의 마지막까지 계속 되오던 노조의 파업은 결국 끝이 난다. 새로운 아침이 밝고 공장으로 향하는 노동자들의 시끄러운 출근길을 비추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상업적인 미국영화들에서 흔하게 보여지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는 주인공의 모습은 이 영화에 없다. 그러나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었던 어두운 현실 속에서 작지만 순수한 사랑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어떤 면에서는 다른 어떤 영화보다 희망적인 영화가 아닐까.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지는 어두운 사회 한쪽 면과 그렇지만 아직 남아 있는 희망의 가능성.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창녀 트랄라는, 다만 술과 밥을 위해 몸을 팔고 남자들의 주머니를 털었다. 그녀를 숙녀로 대접하는 단 한 사람은, 전장으로 떠나기 직전의 한 장교다. 그와의 만남은 그녀에게 돈 대신 잊고 살았던 가슴을 되돌려 준다. 해리가 파업 시위때 용감하게 앞장 선 것은 전날 남자와의 사랑을 나눈 후였고 뚱뚱한 처녀는 어느덧 예쁜 아이의 엄마가 되간다. 수십 명의 남자들 앞에 스스로 몸을 열어 결국 집단 강간을 당한 채 벌거숭이로 버려진 트랄라에게도 그녀를 덮어주며 안고 울어주는 한 소년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소년을 안고 이야기한다.

“울지마…”라고.

그래, 알고 보면 희망이란 것은, 늘상, 그런 것이었으니까.

  • 1999년 1월쯤 쓴 글
  • 실은 love idea 라는 음악을 먼저 알고, 음악 때문에 보게 된 영화.
  • 2005년 5월 31일 덧붙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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