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미제라블을 다시 보며 깨닫게 된 것

벚꽃 시즌이 됐다고 한참 들떠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데, 갑자기 똥꼬가(…) 가려운 겁니다. 왜 가렵지? 생각했는데, 자고 일어나니 이젠 아픕니다. 그래도 놀아야겠기에 약국에서 약 사 먹고 움직이는데, 점점 힘듭니다.

앉거나 걷기도 어려워서, 다음날 병원에 갔습니다. 의사 쌤이 그러시네요. 항문농양이라고. 즉시 수술해야 한다고 합니다. 다음 주에 여행 가야 하는데요- 했더니, 안 돼요-라고 단칼에 자르십니다. 그렇게 생애 처음, 엉덩이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바로 입원하나 했는데, 늦게 와서 오늘 수술 못 한답니다. 예약하고 검사하고 처방전만 받아서 집에 왔습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기도 힘들어서 누워만 있자니, 딱히 할 것이 없습니다. 스마트폰으로 넷플릭스 앱을 여니, 레미제라블(…)이 뜹니다. 그래서 봤습니다. 내 엉덩이의 아픔을 가시게 해주길 기대하며.

… 음, 전에 본 영화였네요.

예, 전에 극장에서 상영할 때 봤습니다. 그땐 뮤지컬 영화란 것도 모르고 갔다가, 처음에 나오는 웅장한 배 끄는 장면에 놀랐다죠. 장발장에 이런 장면이 있었나- 했다가, 그다음에 수염 깎고 나오는 장발장과 수염 깎기 전 장발장이 같은 사람인 게 매치가 안 돼서 고생(?)하기도 했습니다. 본 영화 다시 보면 재밌을까- 싶었는데, 재밌습니다.

저만 빼고 다른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이 영화는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영화로 옮긴 작품입니다. 덕분에 중간중간 주인공이 바뀝니다(?). 처음에는 장발장이 중심에 있다가, 판틴이란 여성에게 옮겨갔다가, 선남선녀+알파 사랑 이야기 됐다가, 학생 운동가들의 이야기였다가, 다시 장발장 이야기로 돌아와서 끝나죠.

… 은촛대 이야기만 알고 있던 전, 레미제라블이 이렇게 긴 이야기인지도 몰랐습니다.

주인공 장발장은 기묘한 사람입니다. 인물도 멀쩡하고 힘도 세고 머리도 좋은데, 중간중간 충동적인 결정을 잘합니다. 예를 들어 배고픈 조카들을 위해서라지만 갑자기 빵을 훔치죠(…). 갑자기 탈옥도 합니다(…). 갑자기 은촛대도 훔쳤고, 내가 진짜 장발장이요 소리치기도 하고, 갑자기 니 애를 내가 키워 줄게 하더니(…), 갑자기 그 애와 도피 생활을 시작하다가, 갑자기 예비 사위 구한다고 난리 통에 몸을 던집니다. 좋게 말하면 행동력이 뛰어난 거지만요.

그에 반해 주인공을 둘러싼 사람들은, 뭔가 ‘나는 이런 사람이야’에 충실합니다. 장발장 딸의 엄마(…)인 팡틴은, 남자 잘못 만나 인생이 꼬여 기구한 삶을 살게 되는 인물. 예쁜데 그 예쁜 게 살기 좋은 일만은 아니라서, 하필 밑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기야, 그땐 누가 안 그랬을까요. 오죽하면 영화 (원작) 제목이 레미제라블( Les Misérables 비참한 사람들)이 됐을까요.

제일 싫었던 인물은 자베르. 빈민가에서 태어나 성공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서 나름 성공한 경찰입니다만- 계속 ‘귀족님, 무슨 일이 생겼는지 말씀하시면 제가 처리해 드리겠습니다’라는, 마치 열심히 일하는 경찰인 양 아부를 떨죠. 그게 성실하다면 성실한 거고, 그래서 성공하긴 한 거겠습니다만- 내가 살기 위해선 다른 사람 밟고 가겠다는 의지가 너무 강해서, 굉장히 짜증 났습니다.

… 안 그래도 엉덩이가 아픈데.

사실 레미제라블은 입체적인 인물을 그리기보단, 서로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한 노래에서 노래하게 함으로써, 입체적인 상황을 그리는 뮤지컬 영화이기도 합니다. 개그 악당으로 나오는 테나르디에 부부가 그렇습니다. 끝까지 타인을 이용하며 우리끼리만 잘살겠다고 온갖 범죄를 다 저지르다 망하죠. 아 진짜 순수한 악의로 똘똘 뭉친 부부라서 대단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뭐 나쁜 일 말고 딴 걸 요만큼도 생각 안 해요.

원작 탓이겠지만, 결국 있는 집 자식이(…) 좋은 아가씨 만나서 결혼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정부군과의 싸움에서 살아난 마리우스가 결국 귀족 집안으로 돌아가, 코제트와 결혼할 때는 너에게 그때 그 싸움은 무엇이었냐 + 너라도 행복하게 살 자격이 있긴 하지 등등의 감정이 교차해 난감할 지경이었다니까요. 장발장이 결과적으로 좋은 삶이었다-라고 할 수 있는 이유가, 좋은 귀족 남자와 딸을 결혼시켰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와중에 다시 본 부분도 있습니다. 처음 봤을 땐 그냥 잘 만든 뮤지컬 영화 + 팡틴 솔로와 엔딩이 좋았던 영화 정도로 기억했거든요. 다시 보니 이번엔, 장발장이 ‘드디어’ 눈에 들어옵니다. 이 착하고 능력 있지만 충동적인 아저씨가, 어린 코제트를 데리러 가서 느꼈을 감정. 아마 그가 평생 그가 찾아 헤맸을, 어떤 ‘가족’- 내가 머물 곳을 드디어 찾은 느낌.

그제야 이해가 갑니다. 장발장이 왜 예비 사위(…)를 구하러 반란군에 가담했는지. 평범한 아버지라면, 그냥 딸을 데리고 다른 나라로 피신을 했을 텐데… 이 남자는, 자기 딸이 원하는 것이 마리우스라는 것을 알고, 그 남자를 구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던집니다. 코제트가 슬퍼지면 자기가 있을 곳도 부서지니까요. 그리고 결혼하기 전에 떠나죠. 자기가 사라져야, 자기가 머물 곳=코제트가 지켜지는 걸 아니까요.

업보라면 업보랄까요. 그때쯤, 엉덩이의 아픔은 잊고 이상한 질문이 떠오릅니다. 이 사람, 정말 충동적인 거 맞을까. 은촛대 사건 이전의 장발장이야 충동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 사건 이후의 장발장은… 예, 제가 착각했습니다. 충동이 아니라 책임이 맞겠네요. 선한 마음은 책임을 낳고, 그 책임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살았습니다. 음, 레미제라블은 결국, 장발장이 사람답게 살려고 애쓰는 이야기였군요.

그러고 보니, 영화 속 사람들은, 각자 자기 욕망에 맞게 살려고 애썼습니다. 장발장도, 마리우스도, 자베르도, 심지어 테나르디에 부부까지. 그 욕망이 무엇인지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각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위해 행동합니다. 그래서 때론 그들의 죽음이 서러웠던 거고, 마지막 장면에선 예나 지금이나 눈물이 났던 거네요. 지금은 쉬이 보기 힘든, 어쩌면 진짜 자기에게 충실했던 비참한 사람들.

… 그런데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항문농양은 치질 3대장 중 하나인 치루 전 단계 증상입니다. 예방법은 별로 없고, 30/40대 남자들에게 많이 나타납니다. 몸이 늙고 있다는 말입니다. 딱히 뭐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이렇게 느닷없이 ‘굉장히’ 아프다 보면, 대체 뭐 하러 일하고, 누구 좋으라고 살고 있냐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많이 우울해지죠. 안 그래도 우울한 나이인데, 더 우울해져요. 늙고 아픈데 굳이 왜 살아야 할까요.

그러고 보니, 꽤 오랫동안, 어떻게 사는 게 좋은지, 내가 지키고 싶은 가치와 규칙은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살라니 이렇게 살고, 저렇게 살라니 저렇게 살았던 기분입니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요. 그 삶이 날 행복…따윈 바라지도 않고, 지켜주기나 하는 걸까요. 왜 이렇게 아플 때면 그건 다 내 책임이라고만 하는 걸까요.

아아, 이렇게 살라는 말이, 어쩌면 참 나쁜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책임질 거면, 내가 책임질 일을 찾아야죠. 가브로슈가 총탄이 날아다니는 한복판을 뛰어다니고, 에포닌이 남장을 하고, 마리우스가 바리케이드를 지키고, 장발장이 평온을 포기하고, 테나르디에 부부가 시체에서 보석을 훔… 아, 이건 아니겠군요. 아무튼. 그러는 것처럼.

아픈 엉덩이 부여잡고, 레미제라블을 다시 보며 생각합니다. 니가 나한테 이렇게 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렇게 살고 싶었으니, 내가 살고, 내가 책임지겠다고. 자, 이제 내일이면 수술하러 가겠습니다. 지금부턴, 나를 내가 책임지며 살아보겠다고. 내 엉덩이, 내가 책임지며 살겠다고(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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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레미제라블을 다시 보며 깨닫게 된 것”에 대한 2개의 생각

  1. 에디 레드메인이 마리우스를 맡아서 김샜는데(어려서부터 마리우스가 별로였거든요.), 신동사에서 뉴트 스캐맨더를 맡아서 용서하기로 했죠.^^

    이제 좀 나아졌죠?
    아플 땐 감기라도 죽어 버리고 싶게 괴롭다가도 다 나으면 갑자기 삶에의 투지가 생기는 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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