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사람은 알지만, 주요 IT 전시회가 끝나면 항상 모터쇼가 이어서 열린다. CES가 끝나면 디트로이트 모터쇼, IFA가 끝나면 파리 모터쇼와 프랑크푸르트 모터쇼가 매년 번갈아 가며 열리고, 최근에 막을 내린 MWC가 끝나면 제네바 모터쇼가 열린다. 세계 5대 모터쇼 중에 아시아에서 열리는 모터쇼를 빼면 모두 IT 전시회와 비슷한 기간에 열리는 셈이다. 쇼의 역사는 모터쇼가 훨씬 길기 때문에, IT 전시회들이 모터쇼 기간 보다 약간 일찍 열리도록 날짜를 조정했다 생각한다.
최근 몇 년간 이 모터쇼가 IT 쇼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자율 주행차와 전기차 때문이다. 디트로이트 모터쇼는 CES 때문에 위상이 낮아졌다, 이제 올해 가장 먼저 열리는 모터쇼는 CES다-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그만큼 자동차 산업과 IT 산업이 가까워지고 있다. 그래서 오늘은 제네바 모터쇼에서 새로 선보인 차량을 통해, 올해의 자율 주행차와 전기차 트렌드를 짚어보려고 한다.
플라잉 카, 현실이 될까?
세계 자동차 협회(OICA)가 인정하는 공인 모터쇼는 약 마흔 개다. 한 해에 모두 열리는 것은 아니고 매년 번갈아 가며 열리는 일이 많다. 그중 제네바 모터쇼는 특이하다. 먼저 유럽에서 한해 가장 먼저 열리는 전시회다. 더불어 스위스에는 자동차를 생산하는 회사가 없다. 그래서 특정 업체에 편중되지 않고, 다양한 회사들이 경쟁적으로, 올해 선보일 신차와 콘셉트카, 럭셔리카 등을 선보인다.
올해 눈에 띄는 차는 하늘을 나는 플라잉 카다. 네덜란드 팔 V(PAL-V)에서 선보인 ’리버티’란 이름의 자동차인데, 이걸 차로 봐야 할지 아니면 헬리콥터로 봐야 할지 조금 애매하다. 지상에선 날개를 접고 자동차로 쓸 수 있지만, 이착륙할 때는 활주로가 필요하고, 날 때는 헬기처럼 날개를 회전시키며 날아간다.
하늘에서 운전(?) 하기 위해선 비행기 조종사 면허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가격도 일반 버전은 29만 9천유로, 우리 돈으로 약 3억 9천만 원이고, 스페셜 에디션은 49만 9천 유로, 약 6억 6천만 원에 달한다. 경량 항공기 가격이 한 대에 5천만 원에서 3억 원 정도니, 값도 비행기 값인 셈이다.
누가 살지 궁금하지만, 이렇게 개인용 비행 이동 수단을 만들겠다는 회사는 점차 늘어나고 있다.
자율 주행차, 서비스가 되다
그동안 자율 주행차 트렌드는 미국이 주도하고 있었다. 가장 뛰어난 자율 주행차 기술력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구글도 미국에 있고, 전기자동차에 관한 관심을 끌어낸 테슬라도 미국 회사다. 21세기 초반 차세대 동력으로 미국과 유럽이 서로 다른 선택을 했던 이유도 있다. 당시 미국은 전기차, 유럽은 디젤차 개발을 선택했다(뒷 이야기는 나중에 한번 다뤄볼만큼 흥미진진하다.).
전기차는 자율 주행을 위해 쓰이는 여러 가지 부품에도 쉽게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으므로 전기차로 만드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그러다 환경 문제와 디젤 게이트로 인해 유럽도 전기차 전면 도입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덕분에 자율 주행차를 선보일 여건이 유럽에서도 훨씬 나아졌다.
먼저 르노 자동차에서 ’이지-고(EZ-GO)’라는 이름의 콘셉트카를 공개했다. 2023년경에 선보일 차량으로, 4단계 자율 주행 기술이 탑재될 예정이라고 한다. 완전 자율 주행차에 가깝다는 말이다. 실제로 차량을 보면 운전석이 따로 없고, 좌석 전체가 지하철 의자처럼 배치되어 있다.
차량 상부 전체가 문처럼 열리기 때문에 몸이 불편한 사람도 편안하게 승하차가 할 수가 있다. 앱으로 차량을 불러서 탑승할 수도 있다고 한다. 르노에서는 이 차를 모빌리티 솔루션과 함께 제공할 예정이다. 차량 공유나 카풀, 택시, 로봇 차량 서비스같이 다양한 형태로 쓸 수 있다.
폭스바겐에선 레벨 5 수준의 자율 주행을 할 수 있다는 콘셉트카 ‘I.D. 비전(VIZZION)’을 공개했다. 1회 충전으로 최대 650km를 달릴 수 있고, 세단이지만 차 안에 다른 기계장치가 없어서 널찍한 좌석을 제공한다. 다만 이 차는 그냥 전시 모델이고, 실제로 만들어질지는 알 수 없다. ‘I.D’ 라인업의 진짜 전기차는 2020년부터 출시될 예정으로, 일반 경차 크기라고 한다. 디젤 게이트를 겪고 나서 급하게 내놓은 듯한 느낌이다.
어찌 되었건, 앞으로 차량 대부분이 시간을 두고 전기차로 바뀔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전에 대중교통수단이 먼저 자율 주행차로 바뀌고, 개인용 차량은 보급형 전기차와 고급형 자율 주행차, 이런 형태로 판매될 것 같다. 단 지금 제기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사고, 배터리, 대량 생산)가 어쨌든 해결된다는 전제 아래 말이다.
한국 콘셉트카, 전기로 가는 슈퍼카
현대차에서는 흥미로운 콘셉트카를 선보였다. ‘르 필 루주’라는 이름의 디자인 콘셉트카다. 역시 자율 주행 기능이 담긴 전기자동차로, 현재 판매되고 있는 차량과 흡사하지만 헤드램프가 없고 내부 인테리어도 상당히 독특하다. 계기판과 대시보드 대신 파노라믹 플로팅 디스플레이가 설치되어 있다. 그 밖에 ‘코나 일렉트릭’이란 이름의 전기차도 선보였다. 세계 최초 소형 SUV 전기차로, 올해 상반기에 국내에도 출시될 예정이라고 한다.
쌍용자동차에선 콘셉트 전기차 e-SIV를 선보였다. 2단계 수준의 자율 주행이 가능하다고 한다. 스마트폰으로 차량 상태를 확인한다거나, 텔레매틱스 장치를 통해 시동이나 차량진단, 소모품 점검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양산은 2020년경에 이뤄질 예정이다. 다른 나라에 비해 좀 늦다.
크로아티아 자동차 업체 리막에선 ‘뉴 리막 콘셉트 2’라는 전기 슈퍼카를 내놨다. 제로백, 그러니까 시속 0km에서 100km에 도달하는 시간이 1.9초밖에 걸리지 않는 가장 빠른 전기차다.
럭셔리 스포츠카 제조사 애스턴 마틴에서도 ‘라곤다’ 브랜드로 자율 주행 전기차 콘셉트를 공개했다. 15분 만에 완충이 가능한 고속 충전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비행기 일등석에 가까운 편안한 좌석을 제공한다고 한다. 그 밖에 혼다에서도 2019년부터 소형 전기차를 판매하겠다고 발표했고, 재규어에서도 양산형 전기 SUV 아이 페이스(I-PACE)를 내놓았다(여기에 대해선 나중에 따로 다뤄보자). 아이 페이스는 4월 서울에서도 공개될 예정이다.
플라잉카 컨셉이 떠오르고, 전기 자동차와 자율 주행차가 확실한 트렌드가 자리잡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던 제네바 모터쇼 2018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확실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도 있다. 올해 말쯤엔 다른 트렌드를 확인할 수 있을까? 많은 자동차 회사들은 올해 안에 최소 레벨 3 자율 주행차를 선보이겠다고 했다. 그 말을 지킬 수 있을지, 지켜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