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일입니다. 조카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잠시 쉬고 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럼 고기나 먹자고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데, 일단 쉬면서 만들고 싶던 게임이나 좀 만들면서 길을 찾아보겠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지나가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번 MR이나 알아봐라’
‘예?’
‘아니. 내년부턴 그쪽으로 수요가 좀 생길 것 같아서 말이지.’
예, 오큘러… 아니, 메타 퀘스트3를 처음 받고 테스트 한 날, 조카에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의외로(?) 깜짝 놀랐거든요. 아 이거 어쩌면, 내년에 좀 재미있는 대결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싶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전 VR 헤드셋을 처음 쓰는 사람은 아닙니다. VR 매니아는 아니지만, 메타 퀘스트3 전작인 오큘러스 GO와 오큘러스 퀘스트2 정도는 가지고 있으니까요. 퀘스트 프로는 비싸서 안 샀습니다만, 아무튼 적당히 흥미를 가지고, 그동안 계속 지켜보는 사람이었습니다.
거꾸로 그래서 이번 메타 퀘스트3를 발매한다고 했을 때, 큰 기대가 없기도 했습니다. 지난 두 제품을 쓰다가 느낀, 기대했다가 절망한(?) 것이 컸거든요. 몇 없는 콘텐츠도 그랬지만, 그보다 심각했던, 어떻게 콘텐츠를 만들면 좋은지, 어떤 콘텐츠를 만들면 좋을지 다들 몰랐다는 겁니다.
꿈과 현실은 다른 법인데, 꿈에서 현실로 내려오기가 힘들었죠. 무엇보다, 저 같은 사람은 멀미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재밌게 두 시간 정도 게임하고, 두 시간 넘게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와, 진짜 10년 전만 해도 곧 VR 기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현실은 ‘10년간 이만큼 좋아져도 일반인이 쓰기엔 별로구나’였습니다. 컴퓨터를 사용하는 목적인 인포메이션, 커뮤니케이션, 엔터테인먼트, 크리에이티브, 프로덕티브의 다섯 기능 중에 쓸만한 게 하나도 없었답니다.
현실은 ‘10년간 이만큼 좋아져도 일반인이 쓰기엔 별로구나’였습니다.
그래서 살 생각이 없었는데(실망치가 쌓이면 기대치도 사라집니다), 애플 비전 프로 발표가 생각을 바꾸게 만들었습니다. 비전 프로가 제시하는 성능 대비 높은 가격 덕분에, 갑자기 메타 퀘스트3가 혜자처럼 느껴집니다. 그래도 살까 말까 고민하다가, ‘이걸로 글을 쓰겠어!’란 핑계를 대며 결국 샀습니다.
MR 콘텐츠 수요가 늘겠다고 생각한 이유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사놓고, 막상 며칠간 포장도 뜯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 거 있잖아요. 사기 전엔 막 설레고 흥분되고 그러다가 택배가 도착하면 갑자기 시큰둥해지는 마음. 이걸 안 써본 사람도 아니고 이미 써봤기에 더 그랬을까요? 그러다 이거 안 되겠다 생각해서 뜯고 써봤는데…
와, 역시 디스플레이는 좋아야 합니다.
분명히 같은 UI, 같은 앱인데, 디스플레이 하나 바꿨다고 느낌이 달라지네요?
실제로 다른 스마트 기기를 쓰면서도, 우리가 가장 크게 변화를 체감하는 건 디스플레이입니다. 큰 화면이 필요해서 태블릿 PC를 사고, 신형 스마트폰을 사잖아요. 영화 좀 큰 화면으로 보겠다고 TV를 사고요.
우리 몸이 가진 감각에서 눈이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크니, 눈을 만족시키는(…) 쪽으로 지름을 추구하게 되는데요. 이번 메타 퀘스트3는 성공했습니다. 전작을 썼던 분이라면 좋아진 것이 체감되실 거고, 처음 쓰시는 분도 깔끔하다 여기실 겁니다.
디스플레이 품질보다 더 놀랐던 건, 바로 혼합현실(Mixed Reality) 기능입니다. 사실 MR 자체가 MS에서 홀로렌즈를 밀면서, 마케팅을 위해 열심히 썼던 단어에 가까운 데요(요즘엔 AR부터 VR까지 다 퉁쳐서 XR로 부르는 추세입니다.). VR헤드셋을 이용해 즐기는 AR기능을 지칭하는 뜻으로 쓰게 될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어떤 MR 기능이 있기에 놀랐을까요?
처음에 메타 퀘스트3를 처음 썼을 때, 맛보기 삼아 테스트하는 콘텐츠가 있습니다. 자기가 있는 곳을 스캔해서 인식한 다음, 그 공간에 침투하는 공모양 외계인을 잡는 게임인데요. 총을 쏠 때마다 벽이 부서지면서 우주가 보입니다. 그런데 이게, 간단하면서도 꽤 그럴듯하고 재미있어서, 순식간에 MR에 대한 기대가 200%는 치솟게 됩니다.
… 문제는 그만한 콘텐츠가 그거 하나였다는 거죠. 슬프게도.
혼합 현실 기능이 생각보다 더 중요한 이유
예, 그 콘텐츠를 즐기고 나면, 제대로 MR을 즐길 수 있는 앱이나 콘텐츠가 전무합니다. 막 찾아봤는데요. 진짜 없습니다. 그때부터 다시 퀘스트3는, 그냥 그런, 디스플레이가 좋아진 평범한 VR 헤드셋으로 돌아갑니다. MR을 지원한다는 게임이나 앱도 써봤는데, 뭔가 잘 안됩니다. 모양은 그럴듯한데 죄다 쓰기 불편합니다.
그런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MR 기능은 중요합니다(…).
풀컬러로 주변 상황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퀘스트3를 쓴 상태에서 걷거나 뭔가를 찾거나 하는 일은 다할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 조작도 가능합니다. 덕분에 컨트롤러를 찾기 위해, 헤드셋 코 밑에 살짝 보이는 공간으로 두리번거리는 일도, 넷플릭스나 유튜브에 연결하기 위해 헤드셋을 썼다 벗었다 하는 일도 안 해도 됩니다.
무엇보다 두려움이 없어졌네요. 원래는 가상현실 헤드셋을 쓸 때마다, 어디 컴컴한 동굴로 들어가는 그런 느낌이 있거든요. 주변을 볼 수 없으니까요. 써봤던 분 중에는, 이걸로 게임하다 어디 부딪쳤던 추억이 꽤 많을 겁니다. 그래서 혼자 있을 때도 꼭 방문을 잠그고 헤드셋을 썼었는데요. 그러다 보니 오해도 받고(?), 점점 안 쓰게 됐습니다.
하지만 메타 퀘스트3를 쓸 때는 동굴로 들어가는 느낌이 아닙니다. 헤드셋을 써도 주변이 잘 보이니까요. 가족이 방에 들어와도 쳐다보며(?) 얘기할 수 있습니다. 간단한 콘텐츠는 귀찮은 컨트롤러를 안 쓰고, 그냥 손 제스처를 이용해 컨트롤합니다. 방문을 열어두니 오해도 안 받습니다(?).
… 무슨 오해냐고는 묻지 말아 주세요. 제발.
두려움이 없어지면 뭐가 좋을까요? 더 맘 편하게, 더 자주 쓰게 됩니다. 정말로 오큘러스 고나 퀘스트 2보다 훨씬 더 많이, 자주 쓰고 있습니다. 게다가 스피커도 좋아서, 이걸 쓰고 여행을 하거나 리듬 게임, 음악 감상을 하거나 하는 일도 즐겁습니다. 퀘스트3 발매에 딱 맞춰서, 재미있는 삼바 데 아미고 게임도 나왔고요. 아이돌 영상 좋아하시는 분들은 숨 넘어가실 겁니다.
현실적으로 메타 퀘스트3를 까봅니다
이렇게 좋긴 한데, VR 게임만 한다거나, 메타 퀘스트를 VR 디스플레이로 이용하시는 분들은 굳이 새 메타 퀘스트3를 살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용도로는 퀘스트2도 충분하고, 가격도 다른 제품이 더 저렴하며, 무엇보다 지금은 그런 용도 말고 다른 용도로 쓸 일이 별로 없어요.
기존에 쓰던 용도로는 더 좋아진 디스플레이, 혼합 현실 조작 환경 같은 퀘스트3의 장점이 큰 의미를 가지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기존 퀘스트2를 만족스럽게 쓰고 있다면, 좋은 MR 앱이 나올 때까지 안 사셔도 괜찮을 겁니다. 하지만 새로 가상현실 헤드셋을 산다면? 저는 무조건 퀘스트 3를 권합니다.
새로 살 때 십몇 만 원 더 주고 사야 하지만, 더 좋아진 디스플레이는 가격을 더 지불할 만한 장점입니다. 서랍에 고이 모셔두는 기기가 아니라 실사용하는 VR 헤드셋을 원하다면, 마음 편한 MR 조작 환경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고요.
또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더 나은 앱이, 더 MR을 잘 활용하는 기기가 곧 나올 거야-하는 기대감 말입니다.
… 사실 그게요. 메타 퀘스트3가 이 정도면 애플 비전 프로는 얼마나 더 대단할까? 하는 기대감이라 문제긴 합니다만.
진짜로 그렇습니다. 기대감은 키웠지만, 현실적으로 메타 퀘스트3가 가진 한계는 분명하며, 아쉬운 점도 매우 많거든요. 당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앱이죠. 퀘스트3에서 플레이되는 것을 넘어서, 퀘스트3에 최적화된(?) 앱이 더 많아져야 합니다. 지금은 사실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고요.
있는 앱조차 종류가 적고 비쌉니다. 비즈니스 모델에 문제가 있다고 해야 하나요. 메타가 진심으로 VR 헤드셋을 키워서 스마트폰과 겨뤄보고 싶다면(?) 이러면 안 될 것 같은데요. 좀 쓸만하다 싶은 앱들은 죄다 36천원, 18천원 이런 식으로 유료입니다. 무료 앱이나 게임이 정말 적습니다.
간단해 보이는 앱이나 게임조차 일단 유료인데다 값이 꽤 나가서, 지금까지 나름 돈을 썼는데도 못해본 앱이 많습니다. 궁금해서 잠깐 써보거나 하는 일이 힘들어요. 생각해 보세요. 스마트폰 앱스토어에 판매하는 앱이 죄다 기본 12천원에서 시작한다면, 사람들이 앱을 쓸까요? 아마 스마트폰도 안 팔렸을 겁니다.
메타 퀘스트3에 남은 과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메타 퀘스트3에 가지는 기대는 높습니다. 절대 MR 기능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MR 기술을 활용하는 앱이, 애플 비전 프로 출시를 계기로 폭발적으로 늘기를 기대합니다…만. 이게 워낙 비싼 장비라, 시간이 좀 걸리긴 하겠네요.
MR 기술이 일반화되기 전까지 바라는 것도 있습니다. 먼저 유튜브와 넷플릭스 앱 개선과, 틱톡 같은 인기 앱이 들어오는 겁니다. 정말 많이 이용하는 앱인데, 화질이 엉망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넷플릭스는 앱 업데이트 안되어 있고요. 유튜브 VR은 고해상도로 볼 수 없습니다.(2024년 초 업데이트로 해결)
스마트폰 미러링 기능도 필요합니다. 특히 스마트폰 앱을 크게 볼 수 있으면 앱 부족 문제도 해결될 것 같은데… 왜 안 해주는 걸까요? (애플 비전 프로는 아이패드 앱 실행이 가능합니다.)
VR 헤드셋에 스마트폰 미러링 같은 거 해서 뭐 하겠냐-생각하실 수 있지만, PC는 없어도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많습니다. 스마트폰을 위한 대화면 디스플레이로 쓸 수 있다면 매력 터질 겁니다.
거꾸로 VR 화면을 PC 등으로 미러링 할 때, 외부에서 컨트롤할 수 있는 기능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기능이 있으면, 다른 사람 보고 한번 써보라고, 맘 편하게 넘겨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상황 공유가 되니까…
거기에 더해, 메타 본인들이 약속했던 인피니트 오피스 같은 기능을 빨리, 제대로 구현해 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광고와 현실의 갭이 어마어마했던 앱이었죠. 애플이 생각하는 공간 컴퓨팅을 먼저 구현한 기능이기도 했고요.
MR 상태에서 웹 브라우저와 물리 키보드 등을 이용해 업무를 볼 수 있는 건데요. 아직도 제대로 구현되지 못했습니다. 뭐, 빅스크린이나 버추얼 데스크톱 같은 앱을 이용해 컴퓨터 화면을 불러와서 쓰는 게 더 편하긴 하지만, 이건 그냥 vr이라, 무섭습니다? (어쩌면 곧 지원될지도 모릅니다.)
사실 바람이 이뤄지지 않아도 상관없기는 합니다. 짧은 기간 메타 퀘스트3를 쓰면서, 진짜 큰 단점을 하나 발견해서 그렇습니다. 그건 다름 아닌 … 시간입니다. 안 그래도 즐길 콘텐츠 읽을 콘텐츠 해야 할 일 기타 등등이 잔뜩 쌓여 있는데, 이걸 한 번 하면 한 시간은 후딱 지나가니까요. 시간이 부족하더라고요.
진짜로 요즘 들어 우리 삶에서, pc와 스마트폰을 쓰는 시간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커졌습니다. 두 기기가 시간을 꽉 채우다 보니, 이제 다른 것들을 하려면 새롭게 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TV로 넷플릭스를 보던 시간을 퀘스트3로 넷플릭스를 보던 가 하는 식이죠.
그러니 이걸 잘 쓰려면, VR 헤드셋이 다른 뭔가를, 어떤 기능이나 행위를 대체해야만 합니다. 아마 애플도 이런 점을 고려해서 공간 컴퓨팅- 생산성 있는 일을 해라 같은 개념을 내세운 건 아닌가-하는 추측이 들 정도로요.
좋은 콘텐츠와 앱이 많아지는 것도 좋지만, 다른 기기를 쓰는 시간을 어떻게 대체하는 가에 따라, 앞으로 VR 헤드셋의 운명이 결정되리라 생각합니다. 그게 가능하지 않다면… 애플 비전 프로라도, VR 헤드셋을 널리 보급하진 못할 겁니다.
* 2023년 11월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