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뭘 본 걸까. 영화 리코리쉬 피자를 보고 나서, 머릿속에 이런 생각밖에 안 들었습니다. 뭐랄까. 그냥 이러겠지-하고 생각했던 걸 엎어버렸다고 해야 하나요. 그렇지 않나요? 로맨스 영화라는 게, 주인공이 만났다가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얘기잖아요. 그런데 리코리쉬 피자는 안 그렇습니다. 영화 주인공들이 사귀면서 끝납니다. 에에에?
* 네이버 시리즈(링크)와 유튜브 영화(링크)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대여는 2750원-2500원, 소유(?)는 7150원-7500원으로 각각 가격이 다릅니다만- 유튜브 쪽을 권합니다. 4K로 볼 수 있거든요.
정말, 여러 가지로 골 때리는 영화였다면 어떨까요. 일단 시작부터 그렇습니다. 그냥 지나가는 장면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영화 시작이었고, 엑스트라라고 생각한 인물들이 그냥 주인공이었어요. 어디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배우들인데, 알고 보니 둘 다 첫 영화 데뷔작이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남녀 주인공 둘 다 영화배우 될 생각이 없었던 사람.
또 있습니다. 설정상 남자는 15살, 여자는 25살 어디쯤. 예, 연상연하 러브 스토리입니다. 다만 15살이란 대사가 나오는 순간, 우린 숨이 컥-하고 막히죠. 예? 15살과 25살이요? 게다가 남자 주인공은, 저 모습으로 15살이랍니다. 아니 어딜 봐서요. 실제로는 둘이 12살 차이라서, 영화보다 더 차이 난다는(알라나 역을 맡은 알라나 하임은 1991년생, 게리 발렌타인 역을 맡은 쿠퍼 호프만은 2003년생).
그런데도 또 연기는 잘해서, 어디 극단에서 활동하던 배우들 데려놓은 줄 알았습니다. 이거 독립 영화였나? 하고 착각했다니까요.
흔히 보던 캐릭터들도 아닙니다. 15살 게리 발렌타인은 아주 능글능글합니다. 첫눈에 반했다고 10살 연상 여성에게 저돌적으로 돌진하는 남자애가 흔하지는 않죠. 게다가 수완가입니다. 보통 물침대를 보고 좋다- 생각하면 물침대를 사잖아요? 얘는 물침대 장사를 시작합니다. 물침대 팔던 할아버지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아버지(…)였다는 건 또 나중에 알았네요.
25살 알라나는 또 어떻고요. 꽉 막힌 현실에 답답해하지만, 절대 그런 상황에 침몰하지 않습니다. 호기심이 많은지 덤벼든 십대를 잘 받아주죠. 이런저런 기회가 생기면 꽉 잡습니다. 기름값이 오르면 플라스틱 생산이 위기에 처할 거란 것도 빠르게 알죠. 운전은 또 어떻고요. 내리막길에서 기름 떨어진 수동 스틱 트럭을, 후진으로 끌어내 주유소까지 가지고 갑니다. 참고로 그거 배우가 직접 운전한 거라고 하네요.
… 감독 말대로, 사랑하는 사람이 위기에 처하면 누가 뭐라든 배트를 휘두를 사람.
영화는 그런 두 캐릭터가, 1973년 여름에서 가을이라는 기간, 연애를 하기 전에 같이 사업을 먼저 하면서, 밀고 당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크게는 만남-임시 매니저-친구에게 뺏김-물침대 사업 시작-물침대 사업 끝냄-두 사람의 길이 갈림-다시 만남이란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지만요. 예, 사랑 이야기긴 한데, 둘이 사업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야기의 재미는 여기서 갈립니다. 전형적인 러브 코미디 기대하셨다면 뭐야 이 영화? 하실 거고요. 그냥 저처럼 별생각 없이 보다 보면, 뭐야 이 영화? 할 겁니다. 서로 다른 의미로 말이죠. 솔직히 둘이 만나서 짠-하고 갑자기 사랑에 빠지는 거 이상하지 않습니까. 보통 어느 정도 탐색전, 서로를 알아가는 기간, 뭐 그런 거 있잖아요. 그러다 보니 둘이 좋은 감정일 때 같이 하는 건 … 달리기립니다. 예, 둘 다 참 열심히 달립니다.
이거, 달리는 영화입니다(?).
거기에 둘 다 현실에 존재할 것 같은 인물들이라, 은근히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까지 받습니다. 실존 인물과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한 사람도 많이 등장하고요. 촬영 장소도 어릴 때 감독이 살았던 장소. 주요 배경인 레스토랑도 원래 있었던 레스토랑. 아, 영화 제목인 리코리쉬 피자도 70년대에 있었던 음반 가게 이름입니다. 아, 주인공 게리가 하는 짓(?)은 역시 실존 인물인 영화 제작자 게리 고츠만의 어린 시절에서 따온 거라고 합니다. 물침대 장사도, 핀볼 아케이드도 그가 실제로 했던 거라고.
… 뭐야 이 영화?
영화의 호불호가 갈리는 지점은 또 있습니다. 저는 미니언즈 2를 보고 나서, 미국 70년대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서 찾아본 거지만- 이 영화가 무슨 판타지? 기묘한 이야기? 그런 느낌을 좀 받았거든요. 주인공들이 가지고 있는 약간 크레이지한 성격도 그런 느낌에 한몫했죠. 달콤한 게 아니라 달콤씁쓸한 러브 스토리를 들려줄게-하는 건가? 하는 느낌이요. 그런데 해외 리뷰를 살펴보니, 의외로 달콤하고 재밌는 러브 스토리처럼 말하는 겁니다. 충격이었죠.
그러니까, 1970년대 미국 문화를 기억하는 사람이 볼 때는, 당시 문화가 아주 잘 담긴, 레트로 감성을 가진 영화입니다. 우린 그걸 모르니, 솔직히 1970년대는 태어나기 전 이야기에 가까우니, 그런 감성을 알 리가 없고요. 영화 안에 수많은 70년대 문화 콘텐츠를 녹여 냈는데, 솔직히 아는 건 음악밖에 없습니다(음악은 위대합니다). 그렇다고 영화가 기승전결을 확실히 녹여 내며 감동을 자아내는 이야기도 아니고요.
… 절대 제가 이상해서 리코리쉬 피자를 이상하게 본 게 아닙니다.
그래도 정말,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멍-했습니다. 좋은 쪽으로요. 전형적인 할리우드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70년대 음식 맛이 궁금해서 먹어 봤는데, 기대했던 맛은 아니지만 새로운 맛을 보여줘서 놀랐다고 해야 하나요. 음, 이런 표현이 맞을까는 모르겠지만, 동남아 음식 맛볼 때 처음 먹어 본 고수-같아요. 처음에는 무슨 화장품 맛이 난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이거 없으면 맛이 없다고 느껴지는 고수 같은 영화.
아 이제 볼 게 정말 없어, 콘텐츠가 다 거기서 거기야-라고 생각하시는 분들께 권하고 싶습니다. 별 기대 없이 보시면, 나름 재밌게 보실 겁니다.
* 영화 주인공 알라나의 가족들이 알라나와 많이 닮아서, 유대인들은 원래 비슷하게 생겼나? 하는 착각을 했는데… 진짜 알라나 하임(배우) 가족이었다고.
* 브래들리 쿠퍼가 나왔는데 브래들리 쿠퍼인 줄 전혀 몰랐습니다.
* 제가 본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는 이 영화가 첫 작품입니다. 유명한 감독인데 왜 본 게 없지? 하고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니, 제가 안 볼 영화들을 찍으셨네요… 나중에 한 번 챙겨볼까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 생각보다 영화상에 많이 노미네이트 되었네요. 수상도 많이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