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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는 인류가 휴가로 달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1957년, 구 소련이 인류 최초의 인공 위성 ‘스푸트니크’호 발사에 성공한 이후, 1960년대는 과학 기술로 만들어질 미래, 우주라는 미지의 영역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이 함께한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8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저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미래를 상상하는 힘은 영화와 소설, 만화 속 이야기를 통해 꾸준히 전해져 왔고, 우리들은 그런 상상력이 현실이 되어가는 것을 목격하면서 자라났으니까요. 그게 과연 가능할까? 라는 의구심은 통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없어도, 언젠가 누군가 만들 거라 생각했으니까요. 정말 Why not? 마인드가 지배했던 시대.
나이가 들면서 어쩌면 생각했던 미래와 진짜로 다가올 미래는 다를 수도 있겠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재미있어 보이는 기술과 세상에 필요한 기술은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되지만, ‘20세기 소년소녀들’의 21세기는 여전히 무한한 상상력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어쩌면 뤽 베송 감독도 다르지 않았나 봅니다. 10대때 봤던 SF 그래픽 노블을, 40년이 지난 지금 스크린으로 옮겼으니까요.
‘발레리안 : 천 개 행성의 도시’는 그런 영화입니다. 미래를 꿈꾸던 한 작가의 상상이 만들어낸 그래픽 노블 ‘발레리안과 로렐린’을 바탕으로, 그 작가의 상상력에 홀렸던 한 소년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 감독으로 성장해 만들어낸 미래 우주 세계 이야기. 어쩌면 성장하는 별이 된 지구 출신 어떤 우주 정거장의 이야기.
… 그냥 발레리안과 로렐린이라는 두 개구장이 에이전트의 모험기라고 보셔도 괜찮지만요,
반도체로 이뤄진 천개 행성의 도시, 알파
아, 발레리안과 로렐리는 이 영화의 두 주인공입니다. 우주 수호부라 불리는, 처음엔 작은(?) 국제 우주 정거장으로 태어났다가 여러 종족들이 이주해오고 계속 확장, 발전해 나가면서 너무 커지는 바람에 지구와 바이바이~한 우주 정거장 알파를 지키는 조직의 요원이기도 합니다. 응? 우주 정거장이 커져서 별이 되었다고요?
믿기 힘들지만, 그렇습니다. 이 전직 우주 정거장에는 설정상 3,236종의 외계종족들이 모여 있고, 모든 형태의 자연과 상업/공업/주거 지역 등이 존재하며, 5천 개 이상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만큼, 일종의 반도체 행성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자연 그 자체가 반도체인 행성이라 해야 할까요.
덕분에 우주 수호부는 알파 행성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사물 인터넷으로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도시 재질 자체에 사물의 움직임과 체온, 생명체의 구성 등 여러가지를 모두 감지할 수 있는 3D 센서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 하는데요. 멀리 떨어진 사람의 신원도 DNA를 통해 바로 판독하고, 어디에서 무엇이 움직이고 있는 지, 가장 빠른 길은 어딘 지를 파악해 정보를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 가장 빠른 길이 쉽고 편한 길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긴 합니다만 ^^.
심지어 이 반도체 행성이라는 특징을 이용해 행성 표면에서 제조업에 필요한 각종 희귀 금속 등을 추출하는 종족도 있습니다. 이런 점들이 알파를 소비만 가능한 그런 우주 구조물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재생 가능한 성격을 가진 행성으로 자리매김하게 해 줍니다. 이런 다양한 생명체와 생활 양식의 존재 때문에 뤽 배송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기까지 오랜 시간 기다려야만 했던 것이겠죠. 그것들을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컴퓨터 그래픽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가 발전하기를.
반도체 행성을 그리기 위해 반도체 기술의 발전을 기다려야하다니, 재미있는 일이죠? 참고로 알파는 1993년 실제로 미국이 세계 각국에 제안했던 국제 우주 정거장 프로젝트의 이름입니다. 이 프로젝트 자체는 무산되었지만, 1998년부터 새로운 우주 정거장이 만들어져 지금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빅 마켓이 보여주는 증강 현실의 미래
전 우주 정거장 알파는 거대한 인공 행성입니다. 인구는 3천만명 정도로 많지는 않지만, 수천 종족이 함께 살다 보니, 각종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습니다. 우리들의 에이전트 발레리안과 로렐리가 쉴 틈도 없이 바쁘게 지내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거죠. 그리고 이번 영화는 사하라 사막을 연상시키는 풍경으로 가득찬 행성 키리안에서 시작합니다.
사막 행성으로 보이지만 키리안은 보통 행성이 아닙니다. 우주 최고, 최대의 시장인 ‘빅마켓’이 열리는 곳이니까요. 축구장 대여섯개는 넘는 규모로 보이는 이 빅마켓. 하지만 그 빅마켓이 있다고 불리는 곳에 있는 것은 그냥 황량한 사막일 뿐입니다. 이런 곳이 왜 우주 최대의 시장으로 불리는 걸까요? ‘버닝맨’ 처럼 잠깐 사람들이 모였다 사라지는 도시, 그런 장터가 있는 걸까요?
비밀은 바로, 증강현실에 있습니다. 빅마켓이 있는 곳에서 다른 차원을 볼 수 있는 안경을 쓰는 순간, 그 곳에는 정말 어마어마한 크기의 시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물론 영화 속 설명은 여러 차원의, 그러니까 전 우주 곳곳에 있는 시장을 모으고 모아서 만든 시장이라고 합니다. 가짜가 아니라 진짜 시장이 차원 이동해서 모여 있다는 거죠. 28세기의 시장이 겨우 증강현실일리는 없으니까요.
진짜니까 만질 수도 있고 얘기할 수도 있고 총에 맞으면 죽기도 합니다. 인간이 갈 수 있는 지역도 딱 정해져 있고요. 하지만 평범한 인간인 우리 눈으로 보기엔 누가 뭐래도 증강현실, 딱 그것입니다. 일단 안경을 쓴다는 것, 그리고 현실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직접 즐긴다는 것이 그렇죠.
실제로 예전에 출시된 미라 랩스의 미라 프리즘이라는 증강 현실 안경은, 안경에 아이폰을 끼우는 것만으로도 현실 세계에 디지털 오버레이 된 컴퓨터 그래픽을 즐길 수 있습니다. 안경에 포함된 여러 센서에서 현실 세계를 인식하고, 그 위에 컴퓨터 그래픽을 입힌 영상을 사용자의 눈 앞에 뿌려주는 것이죠.
MS의 홀로 렌즈나 애플에서 곧 나올 애플 AR 글래스도 같은 원리입니다. 결국 빅마켓은 우주 여러 곳에 따로 따로 떨어져 있는 여러가지 상점을 AR을 통해 한 곳에서 만날 수 있게 구현한 28세기 시장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아, 이런 걸 부르는 말이 요즘엔 따로 있었죠? 예, 메타버스입니다.
트랜스매터, 물질 전송 장치는 등장할 수 있을까?
우리는 지금, 살며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것들 속에, 컴퓨터와 네트워크를 이용해 정보를 얻기도 하고 정보를 입히기도 하는 시대로 가고 있습니다. 그게 가능한 기술적 성취와 그걸 필요로 하는 세상의 요구가 있으면 그렇게 됩니다. 그런 것을 저는 디지털 오버레이라고 부르며,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반도체입니다.
그럼 거꾸로 현실 물질을 디지털화 시키는 것, 다시 말해 물질을 디지털 정보로 분해해서 전송하거나 조립하는 것도 가능할까요? 반도체는 기본적으로 모든 정보를 0과 1의 디지털 정보로 바꿔서 얻고 고치고 보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SF 드라마 ‘스타트랙’ 시리즈에서 보이는 트랜스포터(물질 전송)나 래플리케이터(물질 복제)는 그런 원리를 원자 단위까지 쪼개서 조작하는, 상상력의 극단까지(?) 밀어붙인 장치라고 할 수 있겠죠.
발레리안에도 그런 장치가 등장합니다. 바로 빅마켓 시장의 필수품 ‘트랜스매터’입니다. 여러 차원이 조합됐다고 알려진 빅마켓의 특성상, 구입한 물건을 바로 가지고 나올 수가 없는데요. 공항의 X레이 검사기처럼 생긴 장치에 물건을 통과시켜 지금 내가 있는 곳으로 물건을 옮겨와야 합니다. 말이 좋아 옮기는 거지 저쪽 차원의 물건을 분해해서 이쪽으로 재조립하는 거죠. 소형 트랜스매터를 이용하면 이쪽 공간에서 저쪽 공간에 있는 무기를 사용하거나 훔칠 수도 있고요.
물질 전송을 연구하는 과학자도 있습니다. 오스트리아인스부르크 대학에서는 광자와 양자를 원격 이동 시킨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긍정적인 마인드로 무장한 20세기 소년소녀들이라고 해도 물질전송이나 재조합 때 필요한 어마 어마한 정보량, 그리고 잘못하면 폭발할 수 있는 대량의 에너지를 감안하면 최소한 우리가 살아있을 동안은 힘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 하지만 다른 세계를 느끼는 방법은 개발중입니다.
2016년에 발표된 엑손 VR은 모션 시뮬레이터와 액손 스켈레톤이라는 우리의 움직임을 제어하는 장치와 더불어 엑손 슈트라는 이름으로, 가상 현실 공간에서 느끼는 촉감을 재현하는 옷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촉각과 진동 센서를 통해 가상 세계에서 보고 느끼고 만질 수 있게 해주는 셈입니다. 가격이 엄청나다는 문제가 있지만요.
20세기 소년/소녀들의 꿈이 이뤄지는 세상에서
발레리안 – 천 개 행성의 도시는 28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 안에는 20세기 소년 소녀들의 꿈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뤽 베송 감독이 꼭 만들고 싶은 작품이었다는 것이 이해가 갑니다. 그 꿈의 어떤 것은 지금 들여다 볼 수도 있고, 어떤 것은 앞으로도 어려울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역시, 꿈을 꾸는 것 아닐까요? 반도체가 태어나던 시기에 만들어진 꿈은 이제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빅 마켓은 증강 현실로, 국제 우주 기지 알파는 말 그대로 ‘국제 우주 기지’로, 다른 차원의 전투는 체감형 가상 현실 기기로. 과거 기계식 또는 진공관 계산 장치가 가졌던 한계는 반도체 기술의 혁신과 함께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무너졌고, 무어의 법칙을 따라 진화한 반도체는 이제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었으며, 다시 깊숙히 우리 삶을 변화시키고 있는 중입니다.
반도체 기술의 혁신이 끝나가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리지만, 20세기 소년소녀들은 여전히 긍정적입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은 혁신이 이뤄져서 지금 우리가 가진 문제를 풀어주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그 소년소녀들도 이젠 어른이니, 옛날처럼 무작정 누가 어떻게든 하지 않을까-하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리고 압니다. 그 ‘누군가’가 바로 우리들이란 것을. 발레리안 – 천 개의 행성에 담긴, 그 시대 소년소녀들의 꿈을 이룰 주인공이 바로.
* 2017년(…) SK 하이닉스에 기고한 글을 조금 손봐서 올려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