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10여 년간 소리 소문 없이 떠오른 트렌드가 있다. 바이널 리바이벌(Vinyl revival), LP 레코드판이 시장에 돌아왔다. 뭐, 심드렁한 얘기라는 것, 안다. 아날로그가 좋아서, 복고가 좋아서 LP판이 다시 부활하고 있다는 기사를 심심하면 한 번씩 만날 수 있었으니까.
맞다. 남들 다 아는 얘기다. 다만… 이렇게 커질지 몰랐을 뿐.
LP, 지워진 미디어가 돌아오다
지금 음악 산업을 이끄는 시장은 ‘스트리밍’이다. 국제 음반 산업 연맹(International Federation of the Phonographic Industry, IFPI)이 지난 4월에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스트리밍’ 시장은 전년 대비 41.1% 성장해 산업 전체 수익의 38%를 차지했다.
알다시피 CD 같은 피지컬 매체는 음악 산업이 다시 도약하고 있는 것과는 상관없이, 점점 시장이 줄어들고 있다. 2017년 수익 점유율은 30%로, 2016년에 비해 –5% 성장을 기록했다. 피지컬 매체만이 아니다. 성장률이 -로 접어든 것은 다운로드 음악 시장도 마찬가지다.
이 와중에 LP 판매량만 늘어났다. 미국에서만 작년 한 해 1400만 장이 넘게 팔렸다. 지난 10년간 10배 이상 성장한 수치다. 그래 봤자 전체 시장의 2.5%, 물리적 음반 판매의 8% 정도밖에는 되지 않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 누구도 LP가 스트리밍 시장을 대신할 거라고, CD 판매량을 넘어설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CD에 밀려 수명을 다했다 여겼던 올드 미디어가, 수십 년 만에 다시 살 길을 찾은 것이 신기할 뿐.
LP는 어떻게 해서 되살아났을까?
LP 산업이 부활하는 이유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복고 문화의 하나다, 아날로그 음악의 따뜻한 감성이 좋아서다, 아니면 ‘아날로그의 반격’을 쓴 데이비드 색스의 말처럼 ‘진짜를 가진다’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등등 굉장히 많은 의견이 쏟아져 나왔다.
… 그도 그럴 것이, 누구도 예상하기 어려웠던 문화 현상이거든.
생산량은 줄었지만 지난 100년이 좀 안 되는 기간 동안 LP판 생산이 멈추지는 않았다. LP판은 좀 흠집이 생겨도 어쨌든 들을 수는 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즐길 콘텐츠와 다시 찍어낼 인프라는 버리지 않고 있었다-라는 분석도 있다.
맥락을 잘 짚었다. 이런 상황이 인터넷 시대를 맞아 활발한 중고 거래를 이끌어 냈고, 이 때문에 LP판에 소장 가치가 생겼다. 하지만 나는 LP 판의 부활을 ‘복고’가 아니라 ‘디지털 문화가 익숙해져 발생한 현상’이라 본다. 처음부터 디지털이 익숙한 세대에겐 아날로그가 ‘새롭고 독특한 어떤 것’이니까.
포스트 디지털 문화 시대의 징후일까
대충 해보는 말이 아니다. ‘아날로그의 반격’에 나온 자료를 보면, 2015년 영국 LP 구매자의 절반 이상이 25세 미만이었다고 한다. 영국 BBC가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레코드판 구매자 가운데 7%는 아예 턴테이블도 없다. 41%는 턴테이블이 있긴 하지만 그걸로 음악을 듣지는 않는다.
… 이들에게 LP는, 아이돌 굿즈처럼 그냥 기념품이자 장식품이다.
그래서일까? 바이널 리바이벌을 일종의 힙스터 문화, 단순한 유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멋져 보이니까 산다는 말이다. 그렇게 보기엔 지난 10년간 지속적으로 성장해 왔다. 이쯤 되면 유행이 아니라 트렌드다. 아이돌 팬들과 마찬가지로, LP를 음악 소비 활동의 하나로 분명히 여기는 계층이 단단하게 존재하다는 말이다(한국이라고는 안 했다.).
무엇보다 지금은, 디지털 문화가 일반적인 것이 되면서, 사람들이 아날로그 제품이나 문화에서 새로운 가치와 장점을 발견하는 과도기다.
스트리밍 시대가 당분간 저물지는 않겠지만
색슨의 단어를 빌리자면 ‘포스트 디지털 문화’ 시대가 오고 있다고나 할까. 디지털 미니멀리즘, 디지털 웰빙, 디지털 디톡스, Z세대 등 그동안 숱하게 등장한 라이프스타일이 이쯤에서 하나로 모인다. 디지털 문화에 너무 익숙해 단점과 장점을 잘 알고 있는 세대들이, 아날로그의 장점을 발견해 빌려오기 시작했다.
이미 대세가 된 흐름을 뒤엎을 수는 없다. 음악 산업은 당분간 스트리밍 시장이 계속 커질 것이다. 아니, 미디어 업계 전체가 스트리밍 시장으로 넘어가고 있다. 모든 콘텐츠는 흐르고 즐기고 잊힌다. 하지만 그것이 행복한 경험이라고는 누구도 쉽게 말할 수 없다.
스트리밍 시대의 콘텐츠는 너무 많고 너무 재미있고 너무 쉽다. 모든 ‘투 머치’는 너무 지루하다. 어떤 이들은 지루함을 깰 새로움을, 새로운 다름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날로그는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대안이다. 과거 그대로 받아들일 이유는 없다. 그들이 발견한 장점은 개선된 기술과 결합해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으니까.
그 ‘새로운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