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11일부터 14일까지, CES 2021이 온라인으로 개최됐다. 내건 슬로건은 올 디지털 CES. CES는 CES인데, 예전과는 (어쩔 수 없이) 크게 다르다. 조금 늦었지만, 내 멋대로 CES 2021을 한번 정리해 본다.
힘들던 CES 2021 시청
예전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는, 거대한 쇼핑몰을 돌아다니는 느낌이었다. 볼 것도 많고 봐야 할 것도 많고, 우연히 만나게 되는 새로운 제품도 있는. 어떤 제품이 실제로 인기가 많고, 어떤 제품이 과대 포장됐는지를 확인하는 재미나, 실제 제품이나 기술을 직접 보고 만지는 재미도 있었다.
반면 올 디지털 CES는 뭐랄까, 숙제하는 기분으로 봤다. 뭔가에 대해 보고 싶으면 일일이 찾아가고 클릭하고 기다리고, 이런 일이 반복됐다. 좋게 말하면 적극적으로 확인해야 하는 건데, 나쁘게 말하면 많이 피곤하다. 다행히 새로운 언론 보도 형태가 많이 시도되서, 그걸 보는 즐거움은 있었다.
어떻게? 주요 IT 매체에서는 CES 24시간 생중계를 시도했다. 이번엔 행사 진행 시간 기준이 30분 정도였기에, 생중계하면서 그걸 보여주고, 끝나면 기자들끼리 방금 본 것에 대해 실시간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이다. 사실 CES 2021 행사장(?)보다 실시간 중계를 더 많이 봤다. 그래서 행사에 참여했다는 느낌보다, 며칠간 생중계를 봤다는 느낌이 더 크다.
장점은 없었을까. 있다. CES는 원래 전시와 컨퍼런스로 진행되는 행사다. 다만 이제까지 컨퍼런스에 관한 관심은, 솔직히 별로 없었다. 행사 참가자들이 행사장만 돌아다니기에도 시간이 부족했던 탓이다. 이번엔 온라인으로 중계된 탓인지, 다른 해에 비해 컨퍼런스에 좀 더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온라인 행사 답게 자막이 지원된 탓도 있다. 단, 영어만 제대로(…). 한국어는(…).
산업간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이번 CES 2021은 어떤 모습을 보여줬을까? 크게 TV와 컴퓨터, 자동차, 로봇으로 나눌 수 있을 듯 하다. 여기에 더해 5G 연결성과 스마트 시티를 꼽기도 하지만, 글쎄? 개별 제품으로 선보였다기보다는, 5G 연결이 가능한 제품과 관련 이야기가 좀 나왔다.
TV와 컴퓨터 등이 핵심 제품으로 떠오른 이유는, 다들 알듯 코로나19 때문이다. 거꾸로 보면, 코로나19가 CES 2021을 규정했다고 봐도 좋다. 다들 코로나19 시대에 어떻게 살 것인지, 코로나19가 사라진 다음 어떻게 살 것인지를 다뤘다.
개인적으론 산업간 경계가 완전히 무너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까지 우리 회사가 무엇을 해왔는지, 우리는 어떤 회사인지, 이렇게 자신을 규정하던 것들이 의미가 없어진 시대가 온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예를 들어, 한글과컴퓨터에서는 이번 CES에서 드론과 가정용 로봇을 선보였다. 사무용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회사에서 웬 드론일까? 생각했는데, 드론을 만들고 싶은 것이 아니라, 드론 플랫폼 서비스를 만들고 있다고 한다. 분야는 다르지만, 어차피 소프트웨어를 만든다는 면에선 비슷…할까?
IBM에선 자율주행 선박 메이플라워에 관한 이야기를 공개했다. IBM이 배를? 아니다. 이 배를 움직이는 AI 캡틴 기술을 만들었다. 스스로 바다를 항해하며, 환경 데이터를 수집하는 배라고 한다.
소니에서는 에어픽이란 촬영용 드론을 개발하겠다고 한다. 소니 카메라를 이용해서 촬영할 수 있는 드론이다. 그 밖에 게이밍 노트북을 만들던 레이저에선 마스크를 내놨고, 삼성에선 한 손을 가진 가정용 로봇을 선보이기도 했다. 각자 잘하는 것을 확장해, 다른 제품을 만든 사례는, 이번 CES 2021에서 수도 없이 선보였다.
TV, 컴퓨터, 자동차, 로봇
예의상 TV 얘기도 해보자. 사실 CES의 핵심 제품인데, 항상 그닥 재미가 없는 제품이다. 이번엔 미니LED TV가 많이 선보였다. LCD 디스플레이 백라이트로 미니LED를 사용한 TV다. 3만 개 정도의 미니LED를 이용해, 더 좋은 화면을 보여줄 수 있다고 한다. LG에선 QNED이라는 이름으로 공개했고, 삼성에선 네오 QLED라고 부른다.
중국 TCL에선 OD ZERO라는 기술을 탑재한 미니LED를 선보였다. 하이센스의 레이저 TV 같은 제품도 보였다. 여기까지만 하자. 아쉽게도 온라인 전시라서, 오프라인 전시만큼의 관심을 끌진 못했다.
자동차쪽은 참가 업체가 좀 줄었다. 다만 굵직한 발표가 있었다. GM에서 발표한 전기 트럭 배송 서비스 ‘브라이트 드롭’이다. 트럭 안에 배송 로봇을 넣어서 긴 거리는 트럭으로(EV600), 근처에 도착하면 배송 로봇(EP1)이 운반하는 형태다. 이런 차량을 만들기 위해 2025년까지, 27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한다. 함께 공개된 자율 주행차와 에어 택시 콘셉트 모델도 많은 관심을 받았다.
BMW에선 올해 출시 예정인 전기차 iX를 소개하고, 여기에 탑재될 차세대 디스플레이와 운영체제 iDrive를 보여줬다. 아우디 역시 그란 투리스모, 그러니까 고급 스포츠카 전기차 e트론 GT 콘셉트 모델을 공개했고, 국내 부품 업체인 만도에서도 자유 장착형 첨단 운전 시스템(SbW)를 선보였다-고 한다.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올해 CES 2021은 진짜 전기차 파티가 됐을거다. 내연기관차를 전기차로 전환시키려는 작업이 빠르게 진행되고, 주식시장이 상승하면서, 올해 IPO를 앞둔 전기차 스타트업이 많아서다. 당연히 온라인 행사에선 홍보 효과를 거둘 수 없으니, 이번엔 빠졌다.
컴퓨터는 다른 해에 비해, 올해 유독 두드러졌다. 코로나19로 인해 갑자기 성장 산업으로 변한 탓이다. 잘 팔리니까, 더 다양한 제품을 내놓고 있다. 특히 고급 게이밍 컴퓨터나, 교육용으로 많이 쓰이는 크롬북 신제품이 많이 등장했다.
신제품보다 눈에 띈 건 신형 칩셋이다. AMD에서는 7나노 공정으로 만든 라이젠 5000 모바일 프로세서를 공식 발표했다. 인텔에서도 12세대로 알려진 코드명 엘더레이크 관련 정보를 공개했다. 엔비디아에서도 지포스 RTX 3060 그래픽 카드와 노트북용 RTX 30 칩세트를 선보였다.
아—쉽게도, 다들 지금 구할수도 없고, 제때 구하게 될 지도 알 수 없다.
당장 살 수 있는 제품은 또 있다. 로봇이다. 삼성전자에서는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 청소기 제트봇 AI를 비롯해, 여러 가지 로봇을 선보였다. 가사 로봇, 서빙 및 안내 로봇, 웨어러블 보행 보조 로봇 등 많은데, 제트봇을 제외하면 아직 연구 중인 단계라고 한다.
LG전자에서는 클로이 살균봇을 소개했다. UV-C 램프를 이용해 스스로 돌아다니며 공간을 소독하는 로봇이다. 그 밖에도 올해 출시 예정인 파트너 로봇 큐티(Cutii)나 애완로봇 모프린 같은 여러 로봇이 등장했다.
아이스크림, 내 사랑을 받아줘
그 밖에 다른 주목할 만한 제품은 뭐가 있었을까? 개인적으론 아이스크림 제조 머신 콜드 스냅이 가장 눈에 띄었다. 아이스크림 팟을 얹어서 다양한 아이스크림을 뽑아 먹을 수 있는 제품이다. 집에 하나 두면 좋겠지만, 이걸 사느니 집 앞에 있는 아이스크림 전문 할인점에 한번 더 갈게 뻔해서 아쉽다.
레이저에서 공개한 프로젝트 헤이즐 스마트 마스크도 많이 이야기된 제품이다. 표정이 보이게 전면부를 투명하게 만들고, 마이크와 스피커가 내장되어 있다고 한다. 실제품으로 만들어질거라 기대하진 않는다. 바이오밀크라는 인공 모유 제품도 이번 CES 2021에 참가했다. 아기마다 서로 다른, 맞춤형 우유를 생산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가장 관심이 컸던 제품은 위에 있는 가정용 재활용 머신, 라쏘다. 플라스틱 등을 넣으면 알아서 분류, 분쇄해서 재활용 가능한 물질로 만든다. 2023년 출시 예정인데, 출시 가격이 문제다. 3500달러정도 예상된다. 아이디어만 남기고 장렬하게 산화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CES 2021이 시작되기 전, 이번 CES는 사냥이 아니라 채집 같은 느낌이 될 거라 썼다. 생각보다 훨씬 보기 힘들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열리긴 했지만, 사실 이렇게 다시 열리는 건 바라지 않는다. 다만 이번처럼, 오프라인 CES와 온라인 CES가 함께 열리는 건 괜찮겠다고 여겼다. 내년에는 다들 라스베가스에서 볼 수 있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