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 책장 위에는 아직 버리지 못한 추억의 물건이 있다. LP판, 레코드판 아니면 바이닐 레코드라 부르는 음반이다. 대부분 20세기에 만들어졌으니, 나이가 참 많다.
턴테이블이 없으니 들을 수도 없는데, 어쩌다 보니 버리지 못하고 같이 산다. 음악은 사라지지 않아도, 음반은 시간이 지나면 틀 수 있는 기기를 찾기 어렵다. 레코드판은 90년대 초반까지 쓰이다 사라진 포맷이다. 우리나라에선 1995년에 생산이 중단됐다.
앞으로 새 물건은 보지 못할 것 같았는데, 십여 년 전부터 레코드판이 다시 팔리기 시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잠깐 유행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2022년에는 CD보다 더 많이 팔렸다고 한다.
미국음반산업협회에서 내놓은 ‘2022년 미국 음악 산업 결산’ 보고서를 보면, LP판 판매량은 4,100만 장으로, 1987년 이후 처음으로 CD 판매량(3,300만 장)을 앞질렀다.
…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레코드판이 CD를 앞지른 이유
솔직히 고백하자면,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매출만 따지면 이미 2020년에 레코드판이 CD를 앞질렀다. 이후 CD 판매량이 늘면서(2021년 4,660만 장) 다시 순위가 바뀌었지만, 2022년에는 판매량과 매출 양쪽에서 LP판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다시 말해, 이번에 레코드판이 물리적인 음반 판매량 1위에 올라서게 된 것은, CD 판매량 감소 때문이다(개당 가격이 오르면서 매출 자체는 늘었다. 2023년 기준, LP 매출이 17.1% 늘면서 전체 물리 음반 매출을 4% 끌어올렸다.).
LP판 판매량이 무섭게 치고 올라오고 있기도 하다.
2007년 열린 미국 ‘음반 가게의 날(Record Store Day)’ 행사가 시발점이었다. 아이튠즈 같은 디지털 음악 서비스에 밀린 미국 대형 음반 판매 업체 타워 레코드가 파산하면서(2006), 위험하다 느낀 소형 음반 가게들이 모여 연 행사다.
이 행사가 성공하면서 판매량이 반전했다. 이후 미국에서 매년 백만 장 정도 팔리던 LP판이, 2008년부터 두 배씩 뛰기 시작해 매년 늘어만 갔다(이걸 바이닐 리바이벌(Vinyl revival)이라 부른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이해하기 쉽지는 않다. 기술과 사회 변화는 항상 함께한다. 레코드판이야 19세기부터 만들어지고 있었지만, 이런 녹음된 음악이 많이 팔리기 시작한 건, 1960년대 엘비스 프레슬리의 시대부터다. 이후 1970년대 우드스톡 같은 대형 음악 축제와 비틀스의 시대가 레코드판의 전성기였다.
1984년에는 카세트테이프 판매량에 밀렸고, 1987년부터는 CD 판매량에도 밀렸다. 크기가 커서 듣기도 힘들고 관리나 보관도 불편했던 탓이다. 1980년대 음악 산업은 MTV와 워크맨이 만든 변화가 지배했다. 여럿이 듣는 것이 아니라 혼자 간편하게 듣는 스타일로 소비 양식이 바뀌었다.
음악 산업 영광의 시대는 CD가 만들었다. 1999년 음악 시장은 275억 달러로 정점을 찍었다. 2000년 CD 판매는 9억 2,450만 장에 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불편함이 바이닐 리바이벌을 불러일으켰다. 바이닐 시대를 경험했던 베이비붐 세대에게는 향수를, 바이닐을 아예 접해보지 못한 세대에게는 새로운 경험으로 다가갈 수 있었던 탓이다.
불편하게 앨범 겉표지에서 레코드판을 꺼내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그 판 위로 레코드 바늘을 올리며 듣는 것이, 새롭고 멋진 경험이 됐다. 레코드판 유행은 디지털 문화가 너무 익숙해져서 생긴 현상이라 봐도 좋다.
2번째 음악 황금시대의 부산물
실제로 미국 레코드판 구매자를 연령대별로 놓고 살펴보면 25~34세 구매자가 21%로 55세 이상 구매자와 같은 비율이다(35~44세와 45~54세는 각각 19%). 다들 알듯 현시대 LP판 구매자는 절대 올드하지 않다. 한국 예스24에서 판매한 결과를 보면 20•30대 구매자가 40%를 넘는다.
데이비드 섹스가 쓴 ‘아날로그의 반격’에는 2015년 영국 LP 구매자의 절반이 25세 미만이었다고 하니, 2010년대 중반부터 레코드판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계속 성장해, 지금 같은 바이닐 리바이벌의 토대가 됐다고도 볼 수 있겠다.
출퇴근하거나 일하면서 음악을 틀어놓는, 그런 ‘소비’에 익숙한 사람들이 음악 듣기에만 집중하는 ‘감상’이 가진 장점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멋있게 느끼게 됐다고 해야 할까.
사실 레코드판 판매량이 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레트로가 유행하기 때문이다, 아날로그 음악의 따뜻한 감성이 좋아서다, 진짜를 가진다고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등등 다들 많은 이유를 댄다.
레코드판이 굿즈(팬덤을 위한 상품)가 됐다는 주장도 있다.
레코드판을 듣지 않거나 들을 수도 없으면서 레코드판을 사는 이는 생각보다 많다. CD보다 커다란 겉표지는 장식해 놓기 좋다. 소유욕도 충족시켜 준다. 남들과는 다른, 남들은 사지 않는 물건을 샀다는 뿌듯함도 있고, 인스타그램 등에 자랑하기도 좋다.
굳이 베블런의 유한 계급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남들과 다르게 소비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과시하는 행위는, 예로부터 오래오래 이어지던 행동이다. 실물 앨범 소비가 음악 차트 순위에 반영되기 때문에, 실물 앨범 구매가 아티스트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물론 대세를 뒤집을 수는 없다. 2022년 기준 스트리밍 음악은 미국 시장 전체 매출의 84%를 차지하며, 매년 성장하고 있다. 2013년부터 음악 시장이 성장세로 전환하고, 2021년 전성기에 가까운 259억 달러 매출을 기록한 데에는 ‘스트리밍 서비스 유료 구독’이 큰 기여를 했다.
… 우린 지금 인류 역사상 가장 자주, 오래, 여러 방법으로 장소 불문하고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다.
레코드판 시장은, 이렇게 성장하는 음악 시장이 제공한 니치 마켓이다. 디지털에 지쳐, 또는 좀 더 색다른 것을 찾는 사람이 찾아 정착한 시장이다. 레코드판 앨범은 희소할 수밖에 없으니, 필요하면 중고로 팔거나 운 좋으면 더 비싼 값에 판매할 수도 있다.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스트리밍 콘텐츠 시대에, 이런 자산 가치는 덤이자 핵심 가치다. 어쩌면 ‘너무 많은 무소유’에 지친 사람들이 도망가 쉴 수 있는, 마지막 남은 오아시스일지도 모르겠다.
* 여성동아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