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은 칼보다 강하다(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영국 작가 에드워즈 불워 리튼이 쓴 「리슐리외 또는 모략」에 나온 대사다. 출처는 몰라도 이 말을 한 번도 안 들어본 사람은 드물다. 정말, 글쓰기가 폭력보다 더 힘이 쎌까? 장담하긴 어렵지만, 그런 말을 들을 만큼 펜은 참 독특하다. 인류가 만든 수많은 도구 가운데, 생각을 담고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몇 없는 도구라서 그렇다.
펜은 쓰기 편한 도구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그러지 못했지만, 연필(16C)과 만년필(19C), 볼펜(20C)이 발명 된 후에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이 됐다. 흔히 볼 수 있으니 쓰기도 많이 쓴다. 스마트폰이 등장하기 전에는 공부하거나 일할 때, 메모나 일기를 적을 때, 간단한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중요한 계약을 맺을 때도 펜은 빠질 수 없는 존재였다.
… 2007년 스티브 잡스가 “(손가락을 쓰면 되는데) 누가 펜을 원하지?”라고 묻기 전에는.
처음부터 디지털 기기와 함께였던 펜
맞다. 아이폰이 출시되기 이전까지, 펜은 스마트 기기와 처음부터 함께 했다. 아니 애당초 1993년 애플에서 출시한 원조 PDA ‘뉴턴 메시지 패드’가, 스마트 기기에 스타일러스 펜을 도입한 장본인이다. 이때 도입된 스타일러스 펜은 1990년대 중후반 팜 파일럿 PDA 시리즈가 큰 인기를 얻으면서, 스마트 기기 표준 인터페이스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얼마나 인기가 있었냐고 하면, 닌텐도DS 같은 게임기를 비롯해 터치스크린을 가진 노트북 컴퓨터와 휴대전화 등 대부분의 디지털 기기에 표준 디지털 펜으로 탑재됐을 정도다.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아무것도 쓰지 않는, 그저 꾹꾹 누르기만 하는 스타일러스 펜이 어째서 디지털 펜이 될 수 있냐고. 틀린 말은 아니다. 스타일러스 펜이 없으면 손톱이나 다른 둥글고 뾰족한 물건으로 대신하는 사람도 많으니까.
하지만 우리말로 ‘첨필’이라 부르는 스타일러스 펜은, 고대 메소포타미아부터 시작해 고대 이집트, 로마를 지나 중세 서양에 이르기까지 널리 펜으로 사용됐다. 이들이 글씨를 쓰던 대상이 종이가 아니라 점토판이나 파피루스, 밀랍을 칠한 나무판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컴퓨터 인쇄 도입 이전까지 학교나 군대에서는 철필이라 부르는 스타일러스를 이용해 글씨를 쓴 다음 등사기로 인쇄했다.
… 잊기 쉽지만, 필기구는 필기 대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인류 최초의 펜이었던 스타일러스 펜은 스마트 기기 디스플레이에 터치패널이 도입되면서 되살아났다. 초기 터치패널 디스플레이는 기술 적용이 쉽다는 이유로, 대부분 압력을 감지해 터치를 인식하는 저항막 방식(감압식) 터치패널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쓰기엔 정전식 터치패널이 더 좋았다. 반응 속도가 빠르고 손가락으로 쉽게 쓸 수 있다. 멀티터치가 가능하며, 이용자가 직접 기기를 만지며 조작하는 느낌을 준다. 결국 2007년 아이폰 발매 이후, 대부분의 스마트 기기는 정전식 터치를 사용하게 된다. 디지털 펜의 시대는 이렇게 저무는 듯했다.
2011년 출시된 갤럭시노트는 잊힌 펜을 되살렸다. 디스플레이 기술을 바꾼 건 아니다. 대신 펜을 바꿨다. 삼성 디스플레이에서 공급받은 HD super AMOLED 디스플레이를 채택한 이 제품은, 전자기 공명(EMR) 디지털 펜을 가지고 있었다. 딱딱한 덩어리나 다름없던 스타일러스 펜 말고, 스스로 전기 신호를 발생하는 진화된 디지털 펜, S펜을 채택한 것이다. 이 때문에 정전식 터치를 쓰면서도 펜 입력을 동시에 받을 수 있는 스마트폰이 됐다.
갤럭시노트의 특징은 두 가지다. 하나는 큰 디스플레이. 지금 생각하면 조금 어이가 없지만, 첫 번째 갤럭시노트는 5.3인치 크기 화면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화면이 너무 크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두 번째는 앞서 말한 S펜이다. 이 두 가지 특징을 기반으로 갤럭시노트는 ‘패블릿’이라 불렸던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이후 다른 스마트폰도 모두 큰 화면을 가지게 되자, S펜이 가장 강력한 갤럭시노트의 정체성이 되었다.
디지털 펜의 진화, 감성을 살리다
갤럭시 노트의 S펜은 스마트폰 시대로 접어들면서 우리가 잊어버렸던 느낌, 펜으로 무언가를 직접 쓰고 그리는 감정을 되살렸다. 스마트 기기를 조작할 때는 여전히 정전식 터치가 더 편하지만, 필사와 컬러링 북 유행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내 생각을 정리하고 표현할 때에는 손으로 쓰고 그리는 게 더 낫다. 덕분에 컴퓨터나 손으로 작업하던 많은 그림 작가가 스마트폰으로 옮겨오는 계기가 됐다.
지금 스마트 기기 시장은 디지털 펜의 춘추전국 시대라고 해도 좋다. 갤럭시노트 성공 이후 많은 기기가 다시 디지털 펜을 채택했다. 마이크로소프트사는 2013년 윈도 태블릿 PC 서피스 프로를 출시하면서 펜을 함께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펜을 싫어하던 애플에서도 2015년 아이패드 프로를 발표하면서 여기에 쓸 수 있는 ‘애플 펜슬’을 함께 발표했다. 이 밖에도 화웨이 같은 다른 회사에서 발표한 펜도 많고, 아예 필기 인식을 디지털 입력으로 바꿔주는 ‘몰스킨 펜 플러스 일립스’ 같은 제품도 계속 나오는 추세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폴더블 디스플레이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갤럭시 폴드를 비롯해 듀얼 스크린 노트북, 폴더블 노트북 등이 줄줄이 출시 예정이다. 구글은 책처럼 넘기는 기기에 대한 특허도 출원했다. 필기 대상이 달라지면 필기구도 진화한다. 폴더블 기기에는 접었다 폈다 하는 화면에 맞는 새로운 입력 방법이 필요하다.
음성 인식을 비롯해 여러 가지 인터페이스가 연구되고 있지만, 접고 펴는 형태를 가진 책과 노트의 오랜 벗이었던 디지털 펜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우리는 가까운 미래에, 폴더블 디스플레이를 음성, 몸짓, 디지털 펜으로 작동하는 새로운 인터페이스를 만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