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트로 퓨처리즘이 유행하고 있다

얼마 전 서울 을지로를 방문했다가, 재밌는 경험을 했다. 내가 알던 공간이 사라지고, 다른 곳으로 변했다. 지난 몇 년간 유행한, 1930년대를 흉내 내던 분위기가 여기엔 없다. 백열등을 흉내 낸 노란 불빛과 나무 가구가 있던 자리에, 네온 불빛과 플라스틱 가구가 들어섰다.

…카세트 퓨처리즘(Cassette Futurism)이 한국에도 찾아왔다.

 

카세트 퓨처리즘이란?

카세트 퓨처리즘, 가끔 카세트 펑크(Cassette Punk)/포미카펑크(Fomikapunk)라고도 하는 이 단어는 무슨 뜻일까? 80년대쯤 꿈꿨던 미래를 배경으로 삼는 SF의 한 장르이자, 이와 비슷한 스타일을 뜻한다. 정확히는 레트로 퓨처리즘(retro futurism, 복고미래주의)이라 불리는 SF 장르의 하위 장르다.

 

https://youtu.be/MdENmefJRpw

이 스타일을 대표하는 작품은 ‘빽 투 더 퓨쳐 2(1989)’다. 이 영화는 서기 2015년의 미래를 흥미롭게 묘사해 주목받았다. 디자이너론 ‘블레이드 러너’, ‘에이리언2’, ‘트론’ 같은 영화의 메카닉 디자인을 담당한 시드 미드가 손꼽힌다. 음악으로는 ‘베이퍼웨이브(vaporwave)’ 같은 장르 음악이 해당한다.

80/90년대에 제작된 많은 디지털 게임이나 ‘카우보이 비밥’, ‘신세기 에반게리온(구판)’ 같은 SF 애니메이션에서 묘사했던 미래도 여기에 해당한다. 우리로 따지면, 아래 만화에 나온 것 같은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 또는 스타일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모르겠다고 긴장할 필요 없다. 카세트 퓨처리즘은 신조어다. 관련 작품은 이전부터 만들어지긴 했지만, 애당초 레트로 퓨처리즘이란 장르가 80년대에 등장했다. 당시 사이버 펑크의 인기를 배경으로, ‘과거 기술을 간직한 채 발전했다면?’ 같은 상상으로 창작된 SF 장르를 뭉뚱그려 부르던 말이었다.

예를 들어 산업혁명 시기(19세기 말 즈음)를 배경으로 발전된 기술을 담은 SF 작품이라면 스팀 펑크, 근대 문명 시기(20세기 초 즈음)를 배경으로 하는 SF 작품이라면 디젤 펑크라고 부른다. 이런 대체 역사 계열 SF를 함께 부르는 말이 레트로 퓨처리즘이었다.

문제는 21세기다. 80년대도 과거가 되자, 레트로는 20년 주기라는 말을 증명하듯, 21세기 초부터 80년대를 회고하는 복고풍 콘텐츠(80’s revival)가 나오기 시작한다. 80년대 스타일은 나오는 데 이를 가리킬 말이 없자 만들어진 단어가 카세트 펑크, 또는 카세트 퓨처리즘이다.

* 레트로퓨처리즘-디젤펑크 스타일의 작품.
“stefanparis’s Gallery”. Stefanparis.deviantart.com. / CC Wikipedia.

정리하자면, 인간이 기술을 다루거나 소통하는 방법을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라 부르고, 거기서 사이버 스페이스란 말이 파생되었으며, 거기에서 펑크 문화(+해커 문화)의 영향을 받은 사이버 펑크란 단어가 만들어졌다.

사이버펑크의 인기에 다른 장르에도 스팀펑크, 디젤펑크, 솔라펑크 같은 이름이 붙고, 이들을 뭉뚱그려 레트로 퓨처리즘이라 불렀다. 그 후 몇십 년이 지나 80년대마저 과거가 되자, 80년대를 다루는 작품을 부를 말로 태어난 것이 카세트 펑크, 카세트 퓨처리즘이다.

그렇게 만들어지긴 했는데, SF 마니아를 빼면, 쓰는 사람은 그냥 레트로 퓨처리즘과 카세트 퓨처리즘을 같은 말처럼 쓰고는 한다. 왜냐고? 스팀펑크나 디젤펑크 같은 장르는 명확한 특징이 있는 먼 과거지만, 80년대는 아직 가까운 과거인데다, 작품이 아니라 스타일로 기억 되는 탓이다. 그러니까 그냥, 레트로다.

카세트 퓨처리즘 스타일의 특징

카세트 퓨처리즘이 그냥 레트로 퓨처리즘이 된 데에는, 카세트 퓨처리즘이 대상으로 하는 시대가 느슨한 탓도 있다. 짧게 잡아도 7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 다시 말해 컬러TV와 PC는 쓰고 있지만, 인터넷이나 휴대폰은 쓰지 않던 시절을 대상으로 한다.

서양에서 이 시기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격동의 시대가 어느 정도 정리되면서, 대중문화와 전자 기기가 부흥을 맞이했던 시대다. 개인용 PC가 보급되고, 아케이드 게임 센터와 가정용 게임기 붐이 일었고, MTV와 워크맨, 가정용 비디오가 큰 인기를 끌었다.

… 다른 어느 때보다도, 사람들은 이 시기를 ‘기술’과 ‘제품’으로 기억한다.

덕분에 다른 레트로퓨처리즘 장르에는 산업을 움직이는 에너지 이름이 붙었는데 반해, 이 시기는 기술 제품 이름이 붙었다. 카세트 퓨처리즘 스타일이 보여주는 특징도, 당시 기술의 미학적 특징을 따른다. 80년대 기술적 미학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고 볼 수 있다.

 

회색/베이지, CRT 모니터, 키보드, 스위치

예를 들어 IBM PC로 대표되는, 회색/베이지 톤의 기기들이 있다. 이런 기기에는 배불뚝이 모니터라 불리는 CRT 모니터도 함께 따라온다. 영화 ‘매트릭스’에 나온 녹색 문자가 표시되는 화면과 컴퓨터 사용 장면이 대표적이다.

영화 매트릭스, 컴퓨터 사용 씬


영화 에이리언도 마찬가지다. 우주 비행을 할 정도로 고도의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키보드와 스위치를 이용해 컴퓨터를 조작한다.

영화 에이리언, 컴퓨터 사용 씬


현 시대에는 이런 기기가 과거를 떠올리는 상징이자, 현 시대와 어긋난 묘한 분위기를 만드는 소품으로 사용된다. (과거에선) 미래의 공간에 놓여진 (현재에선) 과거의 기기. 포스트모던이 주도하던 80년대 즈음 분위기와도 걸맞다, 분위기만.

Photo courtesy of C2H4

 

패션 브랜드 코치에서 만든(?) 코치TV는 이런 카세트 퓨처리즘의 특징을 잘 살렸다. 영상 전체에 흐르는 VHS 글리치 효과, 배경에 있는 구형 TV와 전자 기기, 80년대 스타일 구도가 거꾸로 모던하게 느껴진다.

요즘 출시되는 기계식 키보드도 레트로 스타일을 지향하는 경우가 많다. 과거 레트로 스타일 키보드는 타자기를 본 딴 형태였다면, 요즘 레트로 스타일 키보드는 예쁘게 생긴 80년대다.

펜케이스 컴퓨터, 3D 프린터로 자작해서 만들 수 있는 제품
https://github.com/penk/penkesu

 

쌓여진 TV, VHS 글리치

코치TV가 보여주듯, 카세트 퓨처리즘을 떠올리는 또 하나의 스타일은, 쌓여진 브라운관 TV다. 우리는 고 백남준 작가의 작품 스타일로 익숙하지만, 실은 데이빗 보위가 출연한 SF 영화 ‘지구에 떨어진 사나이 (The Man Who Fell to Earth, 1976)’를 통해 유명해진 스타일이다.

영화 지구에 떨어진 사나이 스틸 컷 © Rialto Pictures/StudioCanal

 

현대에선 과거에는 없던 TV 탑을 통해 과거를 불러온다.

영화 ‘원더우먼 1984’ 스틸 컷

 

2019년 3월 보그 포르투갈 잡지 커버

 

80년대 가전 제품 판매점에선 실제로 저렇게 TV를 여러 대 붙여놓고, 영상을 틀고 있었다. 여러 대의 TV나 모니터가 붙어 있는 이미지는 이후 여러 SF 작품에서도 반복적으로 쓰인다. 방송국 부조실이나 CCTV 룸과도 비슷해서, 향수와 감시를 동시에 떠올리게 만든다.

당시 진열된 TV를 보여주는, 영화 첨밀밀(1997)의 한 장면

 

이런 가전 기기를 사용하면 어떤 느낌일까?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가정용 비디오 테이프를 재생했을 때 보이는, 낡은 자기 테이프 특유의 지직거림, VHS 글리치 효과를 사용한다. 현재 쓰이는 디지털 기기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디지털 세계가 ‘깨졌음’을 나타내기 위해 지금도 흔히 쓰이는 특수 효과다.

글리치 영상으로 화제를 모은 인디 공포 SF 영화 Backrooms(2022)

 

네온, 8bit 게임 그래픽, 사이버펑크

80년대가 꿈꿨던 미래를 배경으로 한, 카세트 펑크 계열 작품은 이상하게 드물다. 이유는 간단하다. 80년대가 꿈꿨던 미래를 이미 사이버펑크라 부르고 있어서다. 지금은 ‘하이 테크, 로우 라이프’라는 특징을 가진 장르가 됐지만, 80/90년대 사이버펑크는 SF의 주류 장르였다.

카세트 퓨처리즘에 해당하는 작품은 적지만, 대신 사이버펑크가 가진 미학적 특징을 가져와 하나의 스타일로 만들었다. 대표적인 아이콘이 바로 ‘네온’이다. 한때 정육점 불빛이라 불렀던 분홍빛 네온이, 지금은 카세트 퓨처리즘을 상징하는 색이 됐다.

원조격인 작품은 영화 트론(1982)이다. 당시 조악한 컴퓨터 그래픽 기술로 사이버스페이스를 표현하기 위해 썼던 방법이, 네온 빛으로 형체를 표시하는 거였다. 와이어 프레임으로 표현되던 그 시기 컴퓨터 게임 그래픽과도 잘 어울렸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는 네온 불빛 이미지를 만든 건, 네온사인이 뒤덮힌 홍콩 거리를 모델로 삼았던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였다.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혼란한 거리를 표현하기 위한 장치였지만, 현 세대는 이런 이미지를 쿨하고 매력적으로 받아들였다.

… 재미있게도, 네온 사인의 원래 전성기는 1940/50년대였다.

네온 불빛 효과를 가장 먼저 유행시킨 건 게이밍 기기다. 사이버펑크 느낌을 주고, 비싸도 멋지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 도입된 RGB 불빛이, 이젠 게이밍 기기를 상징하는 빛이 되어버렸다. 이젠 마우스와 키보드 뿐만 아니라, PC 본체와 그래픽 카드, 헤드폰, 모니터에도 이런 네온 사인 같은 불빛이 나온다.

성수동 팝업 스토어 금성 오락실

 

네온사인이 아니라 네온 같은 불빛이라고 하는 이유는, 네온사인처럼 보이는 것이 실제 네온사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네온사인은 원래 전기 잡아 먹는 귀신이다. 유리관으로 만들어져 있기에 관리에도 어렵다. 요즘 쓰이는 건 EL와이어라는 전기가 통하면 빛이 나는 선이다. 다른 기기는 LED 광원을 달아서 빛을 낸다.

현대카드 제로 에디션2 네온에도 이런 경향이 반영되어 있다.

 

80년대 시절 만들어진 게임을 떠올리게 하는, 픽셀 그래픽(Pixel graphic) 또는 도트 그래픽(dot graphic)도 카세트 퓨처리즘의 한 요소다.

픽셀 그래픽 인기 게임 데드 셀 게임 플레이 장면
픽셀 그래픽 게임을 소재로 삼은 SF 영화 Pixel(2015)


아예 레트로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게임기도 여럿 출시됐다. 예전 게임기 모양을 본땄지만 더 작고, 더 성능이 좋고, 한 대의 게임기로 여러 게임을 즐길 수 있다. 패미컴를 시작으로 슈퍼 패미컴 미니, 메가 드라이브 미니 등 주요 고전 게임기가 모두 나왔다. 아케이드 게임기를 재현한 제품도 존재한다.

재믹스 V 복각판 게임기 ‘재믹스 미니’

 

Less and More

카세트 퓨처리즘은 아직 동의를 얻은 단어가 아니다. 1980년대 기술을 지칭하는 말은 사실 없고, 그나마 카세트 퓨처리즘/ 카세트 펑크/ 레트로 퓨처리즘 같은 말이 조금 쓰일 뿐이다.

최근 일고 있는 카세트 퓨처리즘 스타일 부활에는, 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넷플릭스의 인기 SF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Stranger Things)의 인기가 한 몫 했다. 여기에 EL 와이어와 LED 광원이 싸지면서 쉽게 사이버펑크 분위기를 낼 수 있게 됐다.

무엇보다 많은 것이 지루해졌다. 디터 람스의 Less but Better을 모토로 삼은 듯한 기기 디자인 트렌드는, 화면을 끄면 모두 똑같아 보일 정도로 비슷한 제품을 만들어냈다.

넷플릭스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

 

반면 80년대는 좀 더 풍요롭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Less is Boring 이라고 비웃었다. 과감하고 다양한 색과 패턴을 썼던 멤피스 스타일이 유행했다. 지금보다 다채로운 색과 디자인, 손맛을 느낄 수 있는 기기들이 있었다.

성능은 보잘 것 없었지만, 그렇기에 서로 어떻게든 달라지려고 애쓰던 시기이기도 하다. 우리가 상상 속에서 소환한 80년대는 그렇다. 카세트 퓨처리즘의 세상은 일종의 과잉이다. 근사하지만 쓸데 없는, 예쁜 쓰레기의 시대다.

1970년대 오디오 브랜드 웰트론의 잡지 광고

 

이런 흐름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디터 람스가 다시 말한 것처럼, 세상은 Less and more 시대로 이동할 지도 모른다. 우린 이미 다르게 살 것을 요구받고 있으며, 모든 유행은 시간이 지나면 지루해진다. 하지만 전쟁, 역병, 기근, 인플레와 같은 사라진 줄 알았던 불안과 함께 다시 살아가고 있는 시대에, 좋았다고 상상하는 옛날을 소환하는 건, 살짝 즐겨볼 만하지 않을까?

지금은 비롯 세상에 눈치를 보는 가련한 월급쟁이지만 이래뵈도 우린 대한민국 최초에 신인류 X세대였고, 폭풍 잔소리를 쏟아내는 평범한 아줌마가 되었지만, 한땐 오빠들에 목숨 걸었던 피 끊는 청춘이였으며,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아날로그와 디지털 그모두를 경험한 축복 받은 세대였다.

70년대 음악에, 80년대 영화에, 촌스럽다는 비웃음을 던졌던 나를 반성한다. 그 음악들이, 영화들이, 그저 음악과 영화들이 아닌 당신들에 청춘이였고 시절이였음을 이제 더이상 어리지 않은 나이가 되어서야 깨닫는다.

2013년 12월 28일. 이제 나흘뒤 우린 마흔이 된다. 대한민국 마흔살 청춘들에게 그리고 90년대를 지나 식지 않은 시절을 버텨, 오늘까지 잘 살아남은 우리 모두에게 이 말을 받친다. 우리 참 멋진 시절을 살아왔음을, 빛나는 청춘에 반짝였음을, 미련한 사랑에 뜨거웠음을 기억하느냐고.

그렇게 우리 왕년에 잘 나갔었노라고 그러니 어쩜 힘겨울지도 모를 또다른 시절을 촌스럽도록 뜨겁게 살아내 보자고 말이다. 뜨겁고 순수했던 그래서 시리도록 그리운 그시절… 들리는가? 들린다면 응답하라, 나의 90년대여!”

– 응답하라 1994 마지막 대사.

이 분들 이제 곧 쉰이 되시겠네요. 지난 십년, 촌스럽도록 뜨겁게 살아내셨는지 갑자기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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