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고양이가 있었던 자리

* 보시고 가슴 아프실 지도 모를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홍대 마포 도서관 앞 길을 걷는데, 왠지 낯선 포스터가 한 장 붙어 있다. 뭔가- 해서 들여보다가, 마지막 아기 고양이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았다.

노란 고양이가 낳은 아이였던 모양인데, 마지막 아이마저 모두 숨을 거뒀나 보다. 왜 죽었는 지야 모르겠지만… 서울에서, 길냥이들이 산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었던가…

며칠전 출근길 지하철역 앞에서도, 한 아기 고양이가 죽는 것을 봤다. 개봉역은 역 앞 짧은 골목을 두고 건널목이 있어서, 건널목 신호에 맞춰 사람들이 떼로 몰려왔다가 사라지고는 한다. 그날도 사람들이 떼로 오는 것에 놀란 아기 고양이가 다급하게 뛰다가, 역앞에서 유턴하는 차량 밑에 밟혔다.

아기 고양이 밟힌 정도야 운전자에게 기별이나 갈까. 아무 것도 모르는 운전자는 그냥 차를 계속 몰고 지나갔고, 사람들은 무심히 발걸읆을 옮겨 지하철역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탄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담배 피다가 그 장면을 목격한 나는, 어찌할까-하고 고민하는데, 한 아가씨가 쓰러져 있는 아기 고양이 앞에 선다.

아가씨도 어찌할 줄 몰랐는지 고민하다가, 가방을 뒤져 종이 한 장을 꺼낸다. 그리고 아기 고양이를 역 근처 자전거 보관소가 있는 곳에 옮겨다 놓는다. 그리곤 근처에서 토스트를 파는 아저씨에게 무언가 부탁을 하더니, 다시 지하철 역으로 올라간다.

가만히 다가가보니, 오선지가 그려진 종이밑에 젖소무늬 아기 고양이가 누워있다. 종이를 들춰내고 보았더니, 이미 몸은 축 늘어졌고 눈은 그대로 뜬 상태다. 혹시나 몰라 목을 만져봤지만, 아기는 이미 죽었다. 어느새 근처로 다가온, 무가지 배포하는 아주머니가 같이 보다가 혀를 끌끌찬다.

…왜 그렇게 차는 함부로들 몰고 그런데…

오후 시간에 다시 가보니 아기 고양이는 이미 치워지고 없다. 아마 청소부 아저씨가 실어갔으리라. 또는 누군가가 쓰레기통에 집어 넣었을 지도 모르겠다. 여름이라 빨리 썩었을 테니, 파리가 끓었을테고, 누군가가 빨리 치우라고 성화를 부렸을 지도 모르겠다. 생명이란 그렇게도 덧없다.

…아기 고양이가 있었던 자리에는 딱 그만큼의 핏자국만 남았다. 자국을 보니 소름이 밀려온다. 얼마나 아팠을까. 그 작은 것이 토해낸 핏자국을 보니 가슴 한 켠이 아릿하게 저리다. 죽은 아기 고양이나 나나, 같은 목숨값을 가지고 태어난 탓이다.

어차피 이런 것이 길냥이들에겐 자연-인거라고, 그렇게 말할 사람들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사고를 당해 죽듯, 아기 고양이도 그렇게 죽어갔을 뿐이라고. 그럴지도 모르겠다. 고양이를 사람처럼 여길 생각도 없고, 휴머니즘의 달달한 눈으로 쳐다보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렇지만, 우리 곁에 같이 살고 있는 존재-라면, 어느 정도 공존-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 무작정 미워하고 내치고 잡아죽이기 보단, 서로 해치지 않으며 살 수 있을만큼, 함께 머무르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안그래도 이렇게 쉬이 죽는 생명들인데, 또 우리가 해치며 살아야만 할까.

죽어도 좋은 목숨 같은 것은, 없지 않을까.
어차피 나도 지금 모기를 때려 잡았다.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동물의 고기를, 다른 식물의 몸을 먹지 않고 살 수 없다는 것은 안다. 어쩌면 모순이라고 여기면서도, 여전히 그렇게 말한다.

…죽어도 좋은 목숨 같은 것은,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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