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잘가. 이 말 밖에는 못하겠네. 아침에 잠에서 깨 아이폰을 손에 들었는데, 트위터에서 네 이야기를 들었어. 결국 떠났다고 하네. 멍-하더라. 아무 생각이 안나. 억지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음악을 듣는데 기분이 참 이상하다. 슬프다-가 아냐. 안됐다거나 그런 기분도 아냐. 그냥 먹먹하더라. 이제 네 노래를 들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그냥 먹먹하더라.
그냥… 담배만 하염없이 땡기더라.
2. 컴퓨터를 켜고 아이튠즈를 열고, 검색어로 달빛요정-을 집어넣어봤어. 뭐, 그럭저럭 다 있네. 인필드 플라이, 소포모오 징크스, 굿바이 알루미늄, 스코오링 포지션, 전투형 달빛요정…까지. 내가 뭘 그리, 널 좋아했다고, 니 음악들, 이리 다 사모았는지 모르겠다. 근데… 미안해. 솔직히 말할께. 니 음악을 듣는다고, 나, 한번도 말해본 적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니 음악을 좋아한다거나, 잘 듣고 있다고, 나, 한번도 말한 적 없었다.
…그냥 그랬어.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노래는, 내겐 늘상, 혼자 중얼거리며 듣는 노래였으니까. 어디가서 이 음악 ‘찌질해서 정말 좋아!’라고 말하고 다니는 것도, 조금 쪽팔린 일이니까. 미안해. 그랬다. 니 음악은 내겐, 정말 혼자 몰래 듣는 노래였어. 한없이 마음이 흔들리고 힘든 날에, 몰래 아이팟에 넣어놓고, 베란다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 몇 대 피며 주구장창 듣는, 그런 노래.
현실은 그렇지 않더군
난 부끄러워 키 작고 배 나온 닭 배달 아저씨
영원히 난 잊혀 질거야 아무도 날 몰라봤으면 해
난 버티지 못했어 모두 다 미안해
내게도 너에게도
내 인생의 영토는 여기까지
주공 1단지 그대의 치킨런
세상은 내게 감사하라네
그래 알았어 그냥 찌그러져 있을게
어제 나는 기타를 팔았어
처음샀던 기타를 아빠가 부실 때도
슬펐지만 울지는 않았어 어제처럼
–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치킨런 중에서
3. 그래, 이런 노래를 이제, 너 아니면 누가 부를까. 장기하가 부를까? 크라잉넛? 남격 밴드? 루시드 폴? 유희열? … 다 찌그러져 있으라 그래. 너 아니면 못 불러. 너 아니면, 이런 노래는 다시 못만들어. 찌질해서 미칠 것 같은 노래, 그런데 그 찌질한게, 나랑 별로 다르지 않아서 슬퍼지는 노래.
그래서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면… 브루스 스프링스턴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혼자 망상도 했다. 달콤하디 달콤한 중2병 노래만 가득한 세상에서, 너라면, 충분히 그럴만한 놈이 된다고 믿었다. 뭐, 그냥 그랬다는 거야. 쪽팔린 팬의 망상놀이. 어차피 다 필요없는 옛날 이야기. 요정은 갔으니까. 응, 요정은 갔으니까.
모든게 좋아질 거야
시간이 지나면 예전보단 조금 나아질 거야
지금 난 여기 어두운 방구석에서
세상을 등진 채 단지 분노하며
찌그러져 있지만
언젠간 모든게 다 좋아질 거라고 생각해
그건 내가 이미
푸른 하늘에 찬란히 빛나는 햇살의
아름다움을 알고 있기 때문이야
한때야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아직 난 모든 걸 다 용서 못 했지만
괜찮아 그건 내가 이미
다 좋아질 거야 다 좋아질 거야
다 좋아질 거야 모든건
– 달빛요정 역전 만루홈런, 칩거 중에서
4. 잘 가. 이런 세상, 더 있는게 좋았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저작권료를 도토리로 주는 세상, 예술가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 하니, 1년에 1천만원만 벌어도 되지 않냐고 묻는 세상, 돈이 없으니 연애도 못하는 세상. 잘가. 고생 많았네. 그래도 우린 우리 힘으로 먹고 살았으니, 그것 하나는, 떳떳하잖아.
잘 가. 거기선 예쁜 애인 만나서 붕가붕가도 많이 하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실컷 놀고 먹고 싸고 달려라. 좋은 소식 생긴다면 가끔은, 여기에도 알려주렴. 잘 가.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가끔 니 이름, 니 노래를 부르고 있을께. 잘 가.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