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의 가전제품 전시회인 CES2013 소식을 듣다가, 속에서 열불이나 죽을 것만 같았다. 대체 뭘 보여주고 싶은 걸까? 미디어에서는 연일 ‘이번에도 한국 기업이 빛났다!’라고 떠들지만, 빛나기는 커녕 무엇을 기대하더라도 그 이하의 소식만 들려오고 있었다. 자고로 전시회는 기업과 사람들이 처음 만나는 자리다. 그 근본은 유저를 향한 것이 아니라 기업들끼리 비지니스를 하기 위한 열리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전시회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없다면 구태여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 전시회에 참가할 이유가 없다.
사업은 기업들끼리 한다지만 꽃단장은 사람들을 위해서 한다.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보기 위해 전시회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때론 직접 찾아간다. 그래서 좋은 전시회에는 두근거림이 있다. 아직 출시도 되지 않은 프로토 타입의 가젯을 처음 만날 때의 즐거움, 유명 CEO 들의 컨퍼런스를 통해 기업들이 원하는 트렌드를 확인할 수 있는 자리, 새롭게 도전하는 신생 기업들이 운좋게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 곳, 그것이 바로 IT 전시회고, 우리가 CES에 대한 소식을 기다리는 이유였다.
하지만 이번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익숙한 것들이 꽃단장을 하고 새로운 것인양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리고는 설레발을 친다. 이제 중요한 것은 하드웨어가 아니라고. 소프트웨어이고, 스마트 기기들이 서로 얼마나 잘 연결되는가-하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흥미로운 하드웨어가 없어도 이해해 달라고.
그래, 이해는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반쯤은 포기하고 있었다. CES2013 같은 IT 전시회가 곧 나올 제품들을 확인하는 자리가 아닌, 기업들이 설레발을 치는 자리가 된 지 조금 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블랙베리 플레이북이나 인텔의 MID를 아직도 기억하시는 분? 별로 없을 것이다. 관심은 관심이고 출시는 출시다. 아무리 큰 관심을 받았어도 몇몇 제품들은 망하거나 제대로 출시도 안됐다.
그처럼 이젠 곧 나올 것처럼 얘기하던 제품이 결코 출시되지 않아도 이상한 일이 아니고, 새로운 트렌드를 이끌어 나갈 것 같았던 제품들이 흉물이 되어버리는 것도 자주 본다. 그런 경향은 CES, Cebit, IFA 등 흔히 세계 3대 IT 전시회라 불리는 곳에서 더 심해진다. 특히 3월에 열리는 세빗이나 8월에 열리는 IFA와는 다르게, CES는 북미 지역에서 연초에 열리기에 더욱 설레발을 치는 편이기는 했다. 그래서 반쯤 포기하고 속아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커넥티비티를 얘기하고, 태블릿 PC를 얘기하고, OLED TV와 UHD TV를 중심에 놓고 얘기하다니-
… 그건 좀 너무 하잖아!
신제품이 신제품이 아닌 시대
왜 그리 흥분하냐고? 이미 나왔던 이야기를 우려먹고 있기 때문이다. 소개팅하려고 나갔는데 전에 한번 만났던 여성이 다시 나온다면 기분 좋겠는가?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얘기한다면, 위에서 말한 OLED TV나 UHD TV, 태블릿PC, 스마트기기간의 연결성(Connectivity)이라는 테마는 2009년부터 계속 얘기 되어 오던 것들이다. 특히 작년에 집중 조명 받았었다. 그것을 올해도 또 들고 나온 것이다.
물론 다른 점도 있다. 예전처럼 시제품이 아닌, 실제 양산을 눈 앞에 두고 있거나, 판매를 시작한 제품들이란 차이다. 하지만 이미 팔고 있는 제품을 보려면 하이마트를 가야지 CES를 찾아가진 않을 것이다. 곡면(Curved) 디스플레이를 가진 TV도 발표하지 않았냐고? 유감이지만 이미 예전에 개발된 제품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곡면 디스플레이를 갖춘 모니터가 2009년에 이미 판매된 적이 있다. 다만 생산 비용이 많이 들어서 아직도 판매할 생각이 없을 뿐.
다른 제품들도 마찬가지다. UHD TV 같은 초고해상도 TV는 해당 해상도를 지원하는 콘텐츠가 상당히 적기에 당분간 많이 보급될 가능성이 낮다. OLED TV는 시장을 선도할 기술임은 분명하지만 아직까진 가격이 너무 비싸다. 태블릿PC와 스마트폰을 가전제품에 연결시킨다고? 20세기말부터 숱하게 얘기했던 ‘홈오토메이션’ 서비스를 개명한 발상에 불과하다. 새롭다고 내세운 것중 진짜 새로운 것도, 기대되는 것도, 쉽게 살 수 있는 것도 없다. 이러니 화가 안날 수가 있겠는가?
물론 이유는 여러가지를 댈 수 있다. MS, 애플, 구글등의 대형 기업이 빠진 것도 그렇고, 완제품 하드웨어 업체 대신 인텔, 엔비디아 등 핵심 부품 업체들이 전면에 나선 것도 그렇다. 혁신의 형태가 달라 느껴지지 않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노베이션 3.0’의 저자 신동형은 자신이 낸 보고서를 통해 이번 CES2013을 일종의 과도기, 어쩔 수 없는 시기의 전시회라고 얘기한다. 기존의 질서가 혁신에 의해 뒤집어지고(와해성 혁신), 그렇게 뒤집어진 상태에서 지배적인 혁신이 결정되고, 그 지배적인 혁신이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점진적 혁신)의 시기이기 때문이다.
뉴욕 타임즈등 주요 외신들은 냉정하게 이제 하드웨어의 성능 경쟁이 정점에 다다랐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이미 기기의 성능은 충분히 진화했다고. 예전처럼 보다 얇고 보다 빠르고 더 오랫동안 쓸 수 있다는 사실에 사람들이 환호하는 시대가 아니라고.
…그렇지만 진짜 진실은 따로 있다.
첫째, 점진적 혁신의 시기에 기업들은 시장을 만들어내기 보다 지키는 것에 집중하게 된다는 것.
둘째, 주요 기업들의 발빼기로 경쟁자를 만날 수 없는 전시회였다는 것.
셋째, 고객에게 필요한 가치를 아직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기업들은 아직 미래가 어느 곳으로 향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시장을 이끄는 힘을 잃어버렸다.
스마트 기기, 마케팅 전략이 바뀌다
스마트 기기 시장은 아주 단순한 욕구를 바탕으로 성장했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 컴퓨터로 하던 일을 하고 싶다-라는 욕구를 바탕으로. 집으로 가는 길에 이메일을 주고 받고 싶다. 길에서도 검색을 통해 정보를 얻고 싶다. 심심할 때 게임을 하고 싶다. 친구들과 얘기하고 싶다. 내 자랑도 하고 싶다. 그러니까 시간을 아끼고, 심심할 때 시간을 떼우고,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을 바탕으로 성장한 시장인 셈이다. 이를 바탕으로 이미 주요 국가의 스마트 기기 보급율은 70%를 넘어섰다. 한국 스마트폰 사용자 숫자만 3000만명이 넘는다.
시장이 어느 정도 성숙했을 때 기업들이 사용하는 전략은 3가지다.
⑴ 우선 높은 수준으로 기술을 끌어올리는 것은 당연하고,
⑵ 그 다음엔 규제 전략을 사용한다. 그러니까 특허권, 상표권, 저작권등을 이용해 다른 기업이 이 시장에 들어오지 못하거나 물러서도록 만드는 전략을 쓴다.
⑶ 마지막으로 자신들만의 폐쇄된 생태계를 만든다. 애플 제품끼리만 가능한 서비스, 카메라 회사들의 전용 렌즈 규격 등이 그렇다. 이 시점에선 CES2013같은 하드웨어 전시회는 환영받기 어렵다.
경쟁자가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중요하다. TV에서는 삼성, LG, 소니 등 주요 회사들이 모두 참여했지만, 스마트 기기 시장에서 중요한 하드웨어 회사들은 이번 CES2013에서 빠지거나, 주요 제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하나의 제품이 얼리어댑터 시장을 넘어 메인 스트림으로 나올 때 가장 자주 써먹는 전략이 바로 ‘라이벌과의 전투’다. 라이벌과의 경쟁만큼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언론에 자주 오르내릴 수 있는 이야깃 거리는 드물다.
하지만 그 라이벌이 같은 장소에 등장하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재미없어진다. 그래서 라이벌이 하는 것과 똑같은 판을 벌여서 맞불을 놓는다. 그 때문에 이제 이제 주요 스마트 기기들은 CES 같은 IT 전시회에서 발표되지 않는다. 애플이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만의 미디어 이벤트를 열어서 제품을 공개한다. 그것도 비슷한 시기에 서로 다른 회사들이 연달아.
바보야, 중요한 것은 하드웨어야!
그런데 정말 그런 것일까? 단순히 마케팅 전략이 바뀌었기에, 시장을 지켜야 하기에 IT 전시회가 지루해져 버린 것일까? 솔직하게 대답하자면 아니오-다. 오히려 정답은, 기업들이 팔아야 하는데 팔 것이 없다-라고 보는 쪽이 더 맞겠다. IT 전시회가 지루하다는 것은 ‘사고 싶은 물건이 없다’라는 것과 같은 말이다. 사고 싶은 물건이 없다는 말은 그런 물건을 기업들이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고. 다시 말해 최근 전시회는 기술은 있으나 가치가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이 어떤 물건을 사고 싶게 만들, 그 무엇이.
이미 스마트 기기 시장을 만들었던 사람들의 기본적인 욕망은 충족됐다. 최근에 나온 스마트 기기들은 아무 것이나 골라도 기본적인 기능을 이용하는 데에는 별 불편함이 없다. 그러니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오히려 기업쪽이다. 뭔가 사고 싶은 것을 만들어야 하는데, 너무 덩치가 커지다보니 오히려 신기한 제품을 보여주기가 힘들어진다. 작은 기업이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려니 이번엔 규제로 그들을 막아버린다. 그래놓고 기껏 보여준다는 새로움이 새로운 부품이 나오면 그에 발맞춰 하드웨어 라인업을 새롭게 바꾸는 정도다.
이번 CES2013은 그런 답답함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몇 가지 달콤한 말로 포장을 했지만 그 포장은 새로운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자기 고백에 다름 아니었다. 대체 이런 답답한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되어야만 할까? 기술은 삶을 바꾸고 삶은 다시 기술을 바꾼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사고 싶은 제품에 목마르다. 그래서 기업이 팔고 싶은 제품이 아닌, 우리가 사고 싶은 제품을 요청한다. 소프트웨어가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그것을 구현하는 것은 분명히 하드웨어다. 이제 기술이 삶에서 배워야할 차례다. 제대로 된 응답을 기대한다.
* 아레나 옴므 코리아에 실었던 글입니다.
* 예전에 썼던 글을 백업하는 차원에서 올려놓습니다.
* IFA 2013에 사례만 바꿔 적용해도 되는 글이라는 것은 슬프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