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9일, 세계는 충격을 받았다. 미국 45대 대통령으로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미국 역사상 첫 번째 아웃사이더 대통령. 대부분 클린턴의 승리를 낙관하고 있었기에 충격이 더 컸다. 특히 실리콘 밸리가 받은 충격은 ‘절망’이라고 표현해도 좋겠다.
실리콘 밸리는 왜 트럼프 당선에 절망하는 가
버락 오바마가 재임하던 8년간, 실리콘 밸리와 워싱턴 정치는 조금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오바마는 자신을 긱이자 너드라고 지칭한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다. 그렇게 말할 정도로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덕분에 오바마 재임 기간 동안 실리콘밸리는 정치적으로 평온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페이스북 같은 SNS 서비스나 아이폰 같은 스마트폰이 크게 확산되었고, 구글과 아마존 같은 회사들이 이전보다 크게 성장했으며, 넷플릭스 같은 신규 서비스나 일론 머스크 같은 괴짜 천재, 유니콘이라 불리던 가치 높은 스타트업 기업들이 나타났던 때가 바로 이때다.
시장을 지배하는 기업들도 달라졌다. 2009년 시가총액 33위였던 애플은 2016년 11월 기준 1위 기업이 되었고, 22위였던 구글은 2위에 올라섰다. 3위는 MS, 6위 아마존, 7위는 페이스북이다. 반면 엑손 모빌이나 월마트 등의 구경제 기업들은 순위가 떨어졌다.
이렇듯 어떤 직접적인 연관 관계는 없지만, 오바마는 IT 기업들에게 우호적인 분위기를 만들었으며, 실리콘 밸리를 지지하는 한 축이었다. 실제로 오바마와 실리콘 밸리는 IT 기업들이 미국의 사회적/경제적 엔진이라 생각했다. 실리콘 밸리의 주요 인사들은 이번 대선에서 클린턴 후보를 공개 지지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판이 갑작스럽게, 완전히 뒤집혀 버렸다. 게다가 뒤집은 사람이 하필 도널드 트럼프이니, 절망할 수밖에.
트럼프 시대 IT 산업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누군가는 트럼프가 당선됐다고 해도 실리콘 밸리나 IT 산업에 끼칠 영향을 별로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실리콘 밸리 자체가 워싱턴 정치와 거리를 두고 있었고, 미국 IT 산업은 대통령이 개인적 감정으로 대하기엔 너무 크다는 것이 이유다.
… 하지만 실제로는, 실리콘 밸리뿐만 아니라 전 세계 IT 산업에 (악)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 쇼크가 IT 산업에 미칠 영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정책적인 부분이다. 당황스럽지만, 트럼프는 선거 기간 동안 IT 산업에 제대로 된 정책을 제시한 적은 없다. 그냥 싸웠을 뿐이다. 아마존은 독점 금지를 위반했다고 공격했고, 애플에겐 아이폰 공장을 미국으로 옮기라고 압박을 가했다.
그럼 누가 IT 정책의 틀을 짜게 될까?
현재 정권 인수 위원회에서 IT 정책에 관련된 사람은 두 명이다. 한 명은 제프리 아이젠나. 미국 기업 연구소, 이동통신사 컨설턴트 출신이다. 연방통신위원회(FCC)와 망중립성을 놓고 대립각을 세웠으며, 국가브로드밴드 계획(NBP) 등 오바마 정권에서 추진된 여러 IT 정책들에 반감을 가지고 있다.
미디어/인터넷 정책 전문가인 만큼 그가 정부의 첫 번째 정책 기틀을 짤 확률이 높다. 그 경우 FCC는 힘을 잃어버리고, 이통사는 인터넷 회사들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강력한 디지털 저작권 정책을 추진할 수도 있다. 간단히 말해 미국이 한국처럼 된다는 말이다.
결과적으로 넷플릭스 같은 콘텐츠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들에게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콘텐츠 서비스에 손대지 않은 대형 IT 회사들이 별로 없다는 것이 문제지만. 대신 통신 ‘인프라’에 투자하는 이동통신사들은 득을 볼 것이다.
다른 한 명은 실리콘밸리의 거물 벤처 투자자이자 베스트셀러 ‘제로 투 원’의 저자, 피터 틸이다. 실리콘 밸리에서 크게 성장한 사람(페이팔 창업자이자 페이스북 이사)이지만, 기본적으로 경제적 풍요가 실리콘 밸리에 집중되는 현재의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트럼프 역시 벤처캐피털에 대한 중과세 정책을 펼치겠다고 이미 말한 적이 있다. 이런 경우에도 벤처 캐피털들이 투자를 멈추지는 않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들이 투자하는 섹터가 바뀔 가능성은 크다. 어쩌면 더 이상, 성공적인 스타트업들을 만나기 더 힘들어질 수도 있다. 다만 법인세 인하 같은, 기업 입장에서 긍정적인 요소도 있기는 하다.
다른 하나는 분위기의 문제다. 그동안 실리콘 밸리는 해외에서 온 우수 인재들을 흡수하며 커왔던 경향이 있었다. 미국 사회 내에서 이민 정책이 달라지고, 반이민자 정서가 커지면 그들이 줄어들게 될 가능성이 높다. 당장 전문직 취업비자(H-1B)의 발급 조건이 더 나빠질 가능성이 있다. 미국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이 있다면 안 좋은 소식.
개인 정보 보호나 디지털 인권은 크게 후퇴할 가능성이 아주 높은 편이다. 트럼프는 아이폰을 쓰면서도, FBI와 애플 사이에서 ‘잠금해제’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을 때, 애플 제품 보이콧을 외쳤던 인물이다. 만약 같은 논란이 다시 일어난다면, 애플은 꽤 큰 시련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
트럼프 시대, 한국 IT 기업들에게 끼칠 영향은?
트럼프 시대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바로 나타났다. 넷플릭스, 아마존, 구글, 애플, 페이스북 등 주요 IT 기업의 주가가 떨어진 것이다.
한국은 어떨까? 한국 기업 입장에선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 일단 한국 제품들이 강력한 우위를 쥐고 있는 분야는 괜찮을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TV 같은 분야다. 이 분야는 미국 내 대체품이 별로 없고, 경쟁자들도 대부분 중국이나 일본 기업들이기 때문에, 미국이 다른 나라, 특히 중국을 견제할수록 보탬이 되는 부분이 있다.
다만 스마트폰이나 가전제품처럼, 미국 바깥의 공장에서 생산해서 미국으로 수출하는 제품들은 관세 문제를 겪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대부분의 기업들이, 미국 내에도 공장을 세우라는 압력을 받게 될 가능성이 있다. 예전 LG 화학에서도 GM과 전기차 배터리 계약을 맺은 후, 행정부에서 제동을 걸어서 결국 배터리 공장을 미국에다 지은 사례가 이미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트럼프 미 대통령 시대와 IT 산업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은, 결국 시장에 대한 문제다. IT 산업이 더 성장할 수 있을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다.
한국이 부동산으로 경제성장률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그동안 미국 ‘신경제’의 성장 동력은 IT 산업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성장한 IT 기술을 다른 산업에 적용시켜, 첨단 스마트 자동차, 청정에너지, 바이오와 나노 기술 등 첨단 제조업, 항공 우주, 의료 기술 등을 성장시키는 정책을 추진 중인 상황이었다. 전기 자동차 ‘테슬라’, 다시 쓸 수 있는 로켓 ‘스페이스 X’ 등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하지만 트럼프의 당선은, 그런 변화가 정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입장에서는, 미국이 이런 전략을 추진하면서 만들어질 시장에 진출할 시간이 늦춰진다고 볼 수도 있다. 미국은 그 자체로 세계 IT 시장의 ⅓ 정도를 차지하는 큰 시장이다. 미국 정부가 추진하는, 실리콘 밸리에서 만들어지는 트렌드는 바로 우리가 올라타야 할 시장이기도 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 시장에 들어갈 문이 굉장히 좁아진다. 2차 전지같이 친환경 에너지 정책 추진으로 인해 앞으로 열릴 것으로 기대됐던 새로운 시장은 축소되거나 사라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IT 산업,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
까놓고 말하자.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개인적인 생각을 밝히면, 이번 선거는 문화적으로는 ‘분노한 다수(=화난 백인)’가, 경제적으론 빈부격차와 사회 양극화가 결정지은 선거였다고 생각한다. 옳고 그른 것을 떠나 어떤 ‘정치적 올바름(PC)’이 경직되게 자신의 원칙을 강요하기 시작하면서 내재되어 있던 반발심과, 어려워진 가계 상황 등은 분명히 존재하는 현실이다. 피터 틸이 인터뷰에서 인용했던 말마따나, 결국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였다.
실리콘 밸리로 대표되는 IT 산업이, 부를 축적했던 대기업들이, 대다수 시민들이 마주한 실업, 청년 부채, 빈부 격차 등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있었을까. 오히려 일자리를 빼앗거나, 비정규직으로 전락 시키거나, 파트타임 원격 노동자를 늘리는 데에 일조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 문제는,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 IT 산업 역시 직면해 있는 문제다. 트럼프가 당선된 것에는, 실리콘 밸리의 원죄도 기여한 셈이다.
그 문제를 생각할 계기를 준 것이 도널드 트럼프란 것이 황당하지만, 우리도 진지하게 이 문제를 돌아보긴 해야 한다. 독보적인 아이디어와 기술 개발이 한 개인의, 한 기업의 배만 불리고 말뿐이라면, 굳이 받아들일 필요가 있을까. 사회의 희생을 대가로 이윤을 차지하는 혁신적인 기업이 있다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우리가 바꾸겠다고 선언한 세상은 무엇이었으며, 과연 우리는 세상을 바꿔서 뭘 어쩔 셈이었던 걸까.
그 문제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미국 대선에서 실리콘 밸리가 부딪힌 절망은, 곧 우리의 절망이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