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의 체스판, 스퀘어 오프

어린 시절 보드 게임을 꽤 좋아했다. 친구들과 옹기종기 모여 부루마블을 하거나, 카드 게임을 하거나, 기타 등등 여러 게임을 즐겼던 것 같다. 게임 = 나쁜 것이라 여기는 어른들 덕분에 탄압을 당해 그만둘 수밖에 없었지만(그 어른들의 취미가 바둑과 고스톱이었던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한 여자 인간 친구와는 체스를 두기 위해 자주 만나다, 썸인지 뭔지 모를 분위기를 타 본 적도 있다. 사실 아직도 그게 무슨 상황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토요일에 만나 카페에서 한두 시간 체스를 두다 보면 저녁이 되고, 저녁이 되었으니 같이 밥 먹고 시간 나면 영화도 보고 그랬을 뿐인데, 친구들이 다 사귀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물론 다 옛날 일이다. 지금은 인터넷으로 뭐든 할 수 있는 세상이니까. 부루마블? 물론이지. 체스, 고스톱, 바둑? 껌이다. 카탄 같은 게임도 가능하다. PC로도 가능하고 스마트폰으로도 즐길 수 있다. 그런데 막상 두다 보면, 뭔가 맛이 나지 않는다. 즐거움이 덜하다.

 

… 전자책과 종이책의 차이처럼, 비슷하지만 그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어떤 벽이 있다.

 

그러다 이 제품을 발견했다. 킥스타터에서 성공적으로 펀딩을 마치고, 프리 오더를 받고 있는 체스판이다. 가격도 아주 비싸진 않다. 250 달러 정도니까. 좋은 체스판은 그보다 비싼 것도 많다. 찾아보니 CES 2017에서 상도 받았다.

 

아, 정말 중요한 것을 말 안 했네. 이 체스판, 혼자서도 둘 수 있는 체스판이다. 마법사의 체스판처럼, 인공 지능이랑 대결할 수도 있고, 네트워크에 연결된 익명의 앵그리니슨52와 게임을 할 수도 있다. 거기에 더해 유명 체스 플레이어들이 체스를 두는 것을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도 있다.

 

악, 정말 정말 중요한 것을 말 안 했다. 그러니까 이 체스판은, 우리가 직접 만질 수 있는 그런 현실의 체스판이다. 그런데 말들이, 내가 손을 대지 않아도 저절로 움직인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에서 알파고의 바둑돌을 대신 뒀던 바둑 기사가 필요 없는, 그런 체스판이란 이야기다.

 

이걸 보고 처음엔 꺅- 소리 질렀다. 어린 시절 꿈꿨던 그런 체스판, 물론 그때는 유령 기사… 같은 것과 두는 게임이었지만, 그런 상상 속 체스판이 현실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기술적인 면을 따지면 크게 대단하지는 않다. 체스판 안에 자석 달린 작은 로봇팔 같은 구조가 있고, 그 팔이 정해진 장소로 체스말을 옮기는 구조다.

 

하지만 아이디어를 이렇게 구현시켰다는 것이 중요하다. 말이 움직이는 것도 우리가 체스말을 옮기는 모습과 비슷하다. 그래서 마치, 유령과 대결하는 느낌의 체스를 둘 수 있다. 바둑은 어렵겠지만, 이 제품이 히트하면 중국에서… 장기판을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닐 것으로 보인다.

 

게임은 3가지 형태로 즐길 수 있다. 먼저 앞서 말한 네트워크 대결 모드, 묘수 풀이 모드, 그리고 다른 사람의 시합을 저절로 움직이는 체스판 위의 말을 보면서 관전하는 모드다. 이 관전 모드는 스스로 움직이는 판이 아니라 그냥 테이블 디스플레이 형식으로라도, 바둑에서 재현해 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벽에 걸린 판이나 TV로 보는 것과, 판 앞에서 보는 것은 또 정말 다른 느낌이니까.

 

문득, 옛 여자 인간 친구가 궁금해졌다. 이젠 한국에도 안 산다. 다른 나라에서 공부하다가 또 다른 나라에서 취직했다는 말만 들었다. 어느날 문득, 네트워크로 체스를 두고 있는 나한테 등장한다면 참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 본다. ‘100%의 체스 파트너를 만나는 일에 대하여’라도 쓰고 싶은 아련한 마음이다.

 

현실은, 아마 다 늙은 어느 날 양로원에서, 인공지능이나 네트워크 상의 체스 상대를 상대하며 노년을 보내고 있을 내 모습이 떠오를 뿐이지만. 행여 기력이 딸려 손 대신 목소리로 체스말을 움직이고 있는 거나 아닌 지 모르겠다. 아 그러고 보니, TRPG를 이런 식으로 구현해도 재미..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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