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5일, 미국에서는 애플이 주최하는 세계 개발자 회의 WWDC 2017년 행사가 열렸다. WWDC 답지 않게 하드웨어에 많은 공을 들인 행사였지만, 가장 눈에 띈 것은 역시 iOS11부터 증강현실(AR)을 지원하기로 했다는 것.
그동안 VR이 미래라고 말하면서도 예전 3DTV처럼 실패한 기술이 되지 않을까 걱정했던 사람들에겐 굉장히 좋은 소식이었다. 이제 판이 완성됐으니까. 페이스북,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인텔, 삼성에 이어 애플까지 주요 ICT 회사들이 모두 가상현실 시장에 들어왔다는 것은, 분명히 기술에 미래가 있다는 말이니까.
애플, 단숨에 증강현실 시장의 판을 엎다
애플이 구글 글래스 같은 새로운 하드웨어를 내놓은 것은 아니다. 출원한 특허를 봐서는 VR 헤드셋을 내놓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일단 이번엔 올해 가을에 선보일 iOS 11에 새롭게 증강현실(AR) 기능을 추가하는 선에서 그쳤다. 이를 통해 세계 최대의 증강 현실 플랫폼이 되겠다-라는 것이 애플의 계획이다.
준비도 단단히 한 것 같다. 개발자들은 AR 키트를 다운로드해 지금부터 아이폰용 앱을 만들 수가 있다. AR은 현실 세계의 이미지에 컴퓨터 그래픽을 덧씌워서 가상 현실을 보여주는 기술이라, 자연스럽게 현실과 CG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한데, 이날 애플이 선보인 증강현실 화면은 상당히 자연스러웠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래도 성공하겠냐고. 나는 성공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쪽에 베팅한다. 솔직히 애플이 이렇게 쓰면 어떨까 제시한 앱의 활용도는 게임이나 쇼핑, 산업 디자인 같은 것으로, 그다지 새롭지는 않다. 하지만 이번엔 애플이 머리를 많이 썼다.
간단히 말해, 인프라를 갖춰 놓고 AR 개발 툴을 공개했다. 이번에 선보인 AR킷으로 만든 앱은 아이폰6s 이후에 나온 모든 아이폰과 아이패드에서 사용할 수 있다. 아이폰6s 가 나온 지 1년 9개월이 지났으니, 사실상 지금 사용하고 있는 대다수의 아이폰과 아이패드에서 AR킷으로 만든 증강현실 앱을 이용할 수 있다.
8억 대의 기기에서 사용할 수 있는 애플 AR
AR은 아이폰만 있으면 쓸 수 있다. 카드 보드도 필요 없다. 지금 당장 널리 쓰일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앱을 만드는 사람 입장에선 일단 8억 대의 기기가 있으면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올해 가을 새로운 아이폰이 발표될 즈음엔, 꽤 다양한 증강현실 앱을 만나볼 수 있을 것 같다.
거기에 더해 맥용 VR 지원도 이뤄지며, 유니티와 언리얼 엔진이라는 VR 개발의 주요 툴을 모두 AR 킷에서 사용할 수가 있다. 이 정도면 100만 대가 팔렸다는 소니 VR 헤드셋보다도 개발자들에겐 더 구미가 당기는 조건이다. 2016년 VR 플랫폼 출하량은 다 합쳐서 3천만 대 수준이다.
여기서 한방 먹은 것은 구글. 당시에는 증강 현실이라고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이런 증강 현실 기술에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분명 이제는 개발 중지된 구글 글래스였다. 거기에 더해 프로젝트 탱고라는 AR 프로젝트도 3년 전부터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애플 발표로, AR의 중심이 한방에 애플로 넘어가버렸다. 구글은 AR 플랫폼 구축에는 실패했으니까. 앞으로도 문제다. 최소 수억 대가 넘는 기기에서 쓸 수 있는 AR 앱과, 아직 몇 대 안 나온 탱고 전용 스마트폰으로 쓸 수 있는 앱 중 어떤 것을 개발자들이 만들겠는가?
구글, 인공 지능과 AR의 만남을 추구하다
물론 여기서 호락호락 물러설 구글이 아니다. 구글은 이미 AR과 인공 지능의 만남을 시도한 바 있다. 지난 5월 17일 열린 구글 연례 개발자 콘퍼런스 구글 I/O에서 발표한 ‘구글 렌즈’라는 앱이 그 주인공이다. 인공 지능과 증강 현실이 결합된 앱으로, 가게 사진을 찍으면 어떤 가게인지 알려주고,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찍으면 자동으로 와이파이에 연결해 주는 똑똑한 AR 앱이다.
한편 모바일 VR 쪽에선 여전히 구글이 강자다. 이번 I/O에서는 구글의 모바일 VR 플랫폼인 데이드림 2.0이 발표됐다. 엄청나게 빨라진 그래픽 신기술 및 독립형 가상현실 헤드셋을 공개하고, 추가로 갤럭시S8등 여러 가지 스마트폰을 데이드림 지원 스마트폰으로 품었다. VR 화면을 TV로 보낼 수도 있다.
거기에 더해 크롬 VR을 이용해 헤드셋으로 웹서핑을 할 수도 있게 만들었고, 독립형 헤드셋 앞에는 카메라 2개를 달아 주변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월드 센스 기술도 쓸 수가 있다. 이미 유튜브라는 강력한 동영상 플랫폼을 가상현실 콘텐츠 플랫폼으로도 쓰고 있는 만큼, 모바일 VR에서는 여전히 강자다.
페이스북과 MS의 도전도 계속된다
최근 VR 시장은 초기의 거품이 꺼지면서 회의론도 나오고 있지만, 차근차근 자신이 있을 곳을 찾아가고 있다. VR 테마파크 및 VR 체험방의 형태로 사람들에게 VR 경험을 선사하고 있으며, AR은 여러 가지 ‘스마트 도구’ 형태로 앱이 제작되고 있다. 아이팟과 PDA 시대를 지나고 나서야 스마트폰 시장이 열린 것처럼, 새로운 시장은 갑자기 빵-하고 터지는 것이 아니다.
페이스북은 VR과 AR 양쪽 모두에 손을 대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둘 다 커뮤니케이션을 증진하는 용도로 개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페북은 기술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난 4월 열린 페이스북 개발자 행사 F8 선보인 VR 앱 ‘페이스북 스페이스’가 대표적이다.
…증강 현실을 적용한 카메라 효과 플랫폼은 셀카에 스티커를 붙여주는 정도이니 일단 넘어가자.
MS는 5월 11일에 열린 MS 빌드 2017 개발자 회의에서 기존 홀로 렌즈 보다 많이 저렴한, 299달러의 MR 헤드셋을 선보였다. 사실 Mixed Reality라고 불리는 MR, 융합 현실 분야는 아직 마이크로소프트가 거의 독보적인 상황이긴 하지만, MS 홀로 렌즈가 워낙 비싸 보급이 거의 이뤄지지 않았었다.
이번 저가형 MR 헤드셋의 보급이 어떤 반전의 기회가 될지 지켜보고는 있지만, 시장에 조금 더 빨리 나올 필요가 있어 보인다. 더불어 인텔의 알로이나 (아직도) 베일에 가려있는 기업 매직 리프도 좀 더 일을 하길 바란다.
가상현실의 여신은 누구에게 미소를 지을까
눈치 빠른 사람은 알아챘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VR 헤드셋을 만드는 HTC 바이브나 삼성 기어 VR, 오큘러스 리프트 같은 회사는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지금 불붙고 있는 것은 가상현실 기술을 사회에 도입하는 과정에서 벌이는 플랫폼 전쟁이기 때문이다.
어떤 플랫폼을 선택할 것인가는 우리가 어떤 기술을 어떻게 사용하게 될 것인가-와 직결된다. 결국 VR이나 AR, MR 모두 쓰이게 될 가능성(나중엔 서로 구별도 하지 않을 가능성까지)이 높지만, 누구도 미래를 알 수는 없으니 각자 옳다고/유리하다고 생각되는 길 위에서 최선을 다할 수밖에.
과연 가상 현실의 여신은 누구에게 미소를 지을까?
하나는 분명하다. 성공 여부를 떠나 이미 VR 기술은 계속 선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 들어간 돈이 있으니 되든 안되든 뭔가는 나와야 한다. 그리고 애플은 여기에 결정타를 날릴 준비를 하고 있다. 솔직히 이번 WWDC 2017에서, 이런 반전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나도 몰랐다.
최근 2021년까지 가상/증강현실은 1500억 달러 시장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보고서가 나왔다. 보고서를 다 믿는 것은 아니지만, 시장 상황은 천천히 낙관적인 쪽으로 바뀌고 있다. 올 가을, 뭔가 즐거운 ‘싸움 구경’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이폰8보다 iOS 11 출시가 더 기다려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