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전자 키트라는 물건을 좋아했다. 미리 만들어진 기판에 정해진 부품을 납땜하는 일이 전부였지만, 도둑 경보기나 라디오를 비롯해 이런저런 기기를 직접 만들 수 있었으니까. 전자 키트, 과학 상자, 조립식 장난감(프라모델+모형 비행기)이 우리 세대 남자아이들의 3종 선물 세트였다고 해도 좋다.
요즘에는 아두이노나 라즈베리 파이, 또는 3D 프린터가 전자 키트를 대신하는 모양이다. 한번 해볼까-하고 들여다본 적이 있는데, 생각보다 어렵게 느껴져서 관심을 접었다. 쓸 수 있는 물건을 직접 만든다-라기보다는, 아두이노 같은 키트를 ‘써보기 위해’ 무엇인가를 만든다-라는 느낌이 더 강했다.
… 하아, 스마트폰을 조립할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말이지.
한숨을 쉬는 사이, 킥스타터에 재미있는 물건이 올라왔다. 메이커폰. 어라? 해서 들여다보니, 휴대폰을 조립할 수 있는 키트다. 조금 더 둘러보니 이런… 스마트폰이 아니라 그냥 휴대폰이다. 물론 그냥 휴대폰은 아니다. 조립은 납땜질을 해야 하지만, 조립이 끝나면 프로그램을 짜서 이 폰을 조작할 수 있다. 20세기 전자 키트와 21세기 기술이 만난 셈이다. 어, 이거 좋은데?
이 키트를 선보인 메이커부이노는 이런 전자 키트를 만들어 파는 회사다. 작년에는 DIY 게임기를 내놔서 큰 인기를 얻기도 했다. 그들은 메이커 운동 진영에 속해있는 사람으로서, 그들 스스로도 메이커이며, 다른 이도 메이커가 되길 원한다.
메이커부이노가 내놓은 키트는 그래서 전자 키트를 많이 닮았다. 사람들이 만들어보고 싶은 것을 만들게 해 준다. 기판에 납땜질하는 재미도 있고, 끝난 다음 제대로 쓰기 위해 프로그래밍하는 재미도 있다. 아두이노, 파이썬을 비롯해 스크래치까지, 다양한 프로그래밍 언어를 지원한다.
물론 조립만 하면 음성 통화 및 문자 메세지는 물론이고, 간단한 게임이나 Mp3 음악을 듣거나 하는 일도 가능하다. 쓰고 나니 휴대폰이 아니라 스마트폰이잖아-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스마트폰은 셀카를 찍거나 페이스북을 보거나 카톡을 읽거나 하는 그런 일이니, 오해가 없기 위해 일단 휴대폰이라고 하자.
키트 값은 약 100달러. 이 가격으로 메인 보드, 케이스, LCD, 무선 모듈, 프로세서 등 휴대폰을 만들기 위한 모든 부품을 가질 수 있다. 물론 직접 만들어야 한다. 조립 시간은 사람에 따라 달라지지만, 예상 시간은 약 7시간. 땜납과 인두와 니퍼는 직접 준비해야 한다. 모두 전에 집에 있었던 도구다. 음, 파이썬 언어를 좀 익혀두면 좋지만, 필수는 아니고.
잘 모르겠다고? 괜찮다. 아무것도 몰라도 된다.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튜토리얼이 준비되어 있으니까. 이건 팔 물건을 조립하는 것이 아니라, 건프라와 마찬가지로 재미로 만들어 가지고 노는 키트다. 커뮤니티도 있고, 다양한 색을 가진 케이스도 있다. 만약 레트로 기기를 좋아하는 어른이라도 마음에 들 거다. 난 UI를 보는 순간 살짝 꽂혔다. 이 그리운 모습이라니…
비싸진 않지만, 그래도 망설이는 당신을 위해, 핑계거리를 만들어드리자면, 이 폰으로,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울 수 있다. 위에 썼잖아요. 여러 가지 프로그래밍 언어를 지원한다고. 정확하게는 이 폰에서 작동하는 프로그램을 만들다보면 프로그래밍 언어를 익힐 수 있다,가 되겠지만.
이미 펀딩은 설정 금액을 넘겼고, 배송은 11월부터 시작된다. 다만… 아직 사지 마세요. 참 예쁜데, 아쉽지만 권할 수가 없다. GSM 전용폰이라서, 한국/일본에선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네트워크 사양 살펴보다 울었다. 내년쯤 LTE 메이커폰이 나오길 기다리며, 일단 손가락만 쪽쪽 빨고 있어 보자. 그래도 관심 있다면 킥스타터 페이지(링크)로.
… 하아. 오늘 밤도 별이 바람이 스치우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