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패드는 이미 PC다, 그렇게 쓰고 있다

2011년, 아이패드2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스티브 잡스는 ‘포스트 PC’라는 말을 꺼냈다. 지금까지 개인용 컴퓨터는 너무 쓰기 어려웠다며,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같은 제품이 새로운 PC가 될 거라는 말이다.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결국 태블릿PC는 태블릿PC이고 개인용 컴퓨터는 그냥 개인용 컴퓨터라는 결론이 났다. 아이패드는 콘텐츠 소비에 특화된 새로운 제품군을 만들어냈을 뿐이다.

2015년, 아이패드 프로를 발표하면서, 팀 쿡은 “PC 시대는 끝났다”라고 선언한다. 아이패드 프로를 이용하면 일할 때 쓰기에도 충분하다는 말이다. 그동안 약점으로 지적됐던 키보드도 있다. 애플 펜슬도 쓸 수 있다. USB 포트가 없다, 외장 저장장치를 연결할 수 없다고 비판받으니 3세대부터 라이트닝 포트를 버리고 USB C 포트도 달았다. 아이패드 전용 OS도 제공한다. 윈도만큼, 아니 그보다 풍부한 앱도 갖추고 있다. 뭐가 문제인가?

호언장담을 확인하고 싶었을까. 많은 이가 아이패드 프로만 가지고 일하기에 도전했다. 어떤 이는 성공했고, 어떤 이는 특정 상황에서 일하기는 좋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다시 말해 PC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기에는 충분하다, 하지만 대체할 수는 없다고 했다.

예상했던 일이다. 애플은 애플2 컴퓨터 이후 여러 번 PC 자리를 탐냈으나,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아이폰과는 달리, 애플에서 만드는 맥 계열 컴퓨터는 항상 일부만 쓰는 컴퓨터였다. 전략을 바꿔 아이패드 프로를 PC로 만들려고 했지만, 그리 성공했다 보이진 않는다.

 

 

사람들은 그럴 이유가 없다면 그렇게 하지 않는다. ‘파괴적 혁신’ 이론을 만든 크리스텐슨이 ‘일의 언어’라는 책에서 말한 것처럼, 어떤 제품을 사는 일은 내게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제품을 고용하는 것이다. 키보드가 있다, 외장 하드를 연결할 수 있다, 다양한 앱이 있다 등은 핵심이 아니다.

이 기기를 사서 내 업무를 할 수 있는가,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가 핵심이다. 그런 문제는 굉장히 다양하고, 수십 년간 윈도 PC 중심으로 업무 프로세스가 만들어져 왔다. 그걸 아이패드 프로로 해결하려면 굳이 귀찮게 새로운 방법을 만들고 배워야 한다. 누가 그러겠는가.

… 하지만, 다음 세대는 어떨까?

 

▲ 쌈얀 밋타운에서 본 풍경

 

몇 달 전 시사인에서 주최한 로봇 컨퍼런스에 참가했을 때다.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꺼내는데, 옆에 앉아있는 학생 세 명은 태블릿PC와 펜을 가지고 강의를 듣고 있었다. 지난 달에는 방콕 쌈얀 밋타운에 새로 생긴 협업 공간을 방문했다. 거기에서 공부하는 대학생들은, 열 명 가운데 일고여덟 명은 아이패드를 쓰고 있었다.

왜 그리 많은 학생이 아이패드를 쓰고 있었는지는 잘은 모른다. 다만 어떤 일을 하고 있었는지는 안다. 학생들은 아이패드로 자료를 읽고, 동영상을 보며 공부하고, 뭔가를 쓰고 있었다. 여기에서는 이미 아이패드가 PC였다. 본 적 없는 풍경이, 거기 있었다.

 

 

PC란 무엇일까. 우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용한 도구다. 그 문제를 잘 해결해줬기에 윈도 PC가 널리 퍼졌던 거고, 못했기에 아이패드 프로는 많이 팔리지 않은 거였다. 그 문제에는 ‘비용’도 포함된다. 작년에 나온 아이패드 9.7과 올해 나온 아이패드 에어 3은 그 문제를 해결했다. 아이패드인데, 펜도 쓸 수 있는데, 가격도 싸다. 이들에게 키보드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미국 교육 시장을 노리고 나왔던 저가 아이패드는, 본의 아니게 다른 나라 학생들의 PC가 됐다. 우리나라 대학생들도 노트북 대신 아이패드를 사용하는 비율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윈도 PC가 사라질 거라는 말은 아니다. 문제가 다양한 만큼 자기에게 맞는 기술을 고용해서 쓰면 된다. 한 가지 방법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 스티브 잡스가 틀렸다. 사람들은 쓰기 쉬운 PC를 원했지만, 거기엔 애플 펜슬이 필요했다. 팀 쿡이 틀렸다. 사람들은 비싼 아이패드 프로가 아니라, 그냥 아이패드로도 충분했다.

나중에는 결국 키보드가 달린 윈도 PC를 이용하게 되지 않을까? 상관없다. 뭐든 필요한 걸 고용해서 쓰면 된다. 다만 기억하자. 항상 우리가 정답은 아니다. 일상적으로 쓰는 기술은 그저 먼저 와서 익숙해졌을 뿐인지도 모른다. 어떤 기술을 어떻게 쓸지는 쓰는 이들에게 달려 있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입으로 쓰고 있다. 내가 말하면 스마트폰이 받아 적는다. 나중에 키보드 달린 기기에서 손을 보겠지만, 이젠 이래도 되는 시대다. 새로운 시대는 이미 와있다.

 

* 임볼든에 기고한 글입니다(링크)

* 말로 글 쓰는 게 새로운 방법인 듯 썼지만, 사실 근대 사회 이전 ‘필경사’라는 직업이 있었습니다. 예전엔 말로 구술하면 그걸 전문 필경사가 받아적는게 당연한 방법이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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