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가지 일이 많은 2024년 12월입니다. 저도 다른 분들처럼 비상계엄 철폐와 탄핵 가결을 위한 집회에 다녀왔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이번 겨울은 어쩔 수 없이 기억에 많이 남을 것 같습니다. 진짜 날도 추운데 왜 그랬을까요.
집회에 나와 색색으로 반짝이는 응원봉을 보면서, 예전에 쓴 단어가 하나 생각납니다. 21세기 인터넷 문화를 움직이는 핵심 키워드 중 하나로 꼽은, 애드호크라시(Adhocracy)입니다. ‘일시적인, 임시로’라는 의미인 ‘Adhoc과 ’ 조직‘을 의미하는 ’cracy'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단어죠.
워렌 베니스(Warren Bennis)가 쓴 'The Temporary Society(1968, 미번역)'에 담긴 신조어로, 나중에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가 '미래의 충격(Future Shock, 1970)'에서 새로운 미래 조직을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하면서 알려지게 됩니다.
간단히 말하면 어떤 일을 처리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뭉쳤다가 흩어지는 조직형태를 뜻합니다. 원래는 기존 관료 조직과는 반대되는 형태의 조직을 가리키기 위해 썼죠. 급격하게 변하는 시장이나 산업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이런 애드호크라시 형태 조직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요.
어? 그럴 땐 태스크포스라고 부르지 않나?라고 생각하시면 맞습니다. 특정한 목적을 가진 일시적인 조직을 만드는 점에서 비슷하죠. 전문성이나 실력이 조직을 구성하는 잣대고, 운영은 보다 유연하고 민주적으로 이뤄집니다. 어쨌든 '문제만 해결하면' 되는 거니까요.
이런 조직 형태가 제안된 이유도 매우 명백합니다. 기존 조직이 효율성에 정면으로 역행하기 때문이죠. 애드호크라시는 ‘예측할 수 없는 기업환경 변화에 대응하려는 적재적소주의의 변용’이라 볼 수 있습니다.
아, 그런데, 이런 적재적소주의를 표방하는 애드호크라시와 응원봉 집회(?)가 무슨 관계냐고요? 그건 플래시몹과 마찬가지로, 소셜네트워크/인터넷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필요에 따라 모이고 헤어지는 방법으로 우리 삶이 구성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 분명 조직론이었는데, 알고 보니 우리 삶의 형태가 됐다고나 할까요.
단어는 낯설지만 이런 애드호크라시적 행태는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이런 조직 형태가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온라인 게임이고, 인터넷 모임이고, 러닝 클럽이나 독서 모임 같은 소모임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적당히 거리를 두고, 특정 목적을 위해 모이고, 거기서 각자 역할을 정해 수행합니다. 목적이 이뤄지면 깔끔하게 헤어지고요. 조직론에서 말하는 애드호크라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억지로 사람을 모으지 않고, 정보를 게시하고 함께할 사람을 찾는다는 점일까요.
... 그러니까, 남의 목적이 아니라, 자기 목적을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되는 그룹.
사실 오래전에, 2002년 '미군 여중생 압사 사건' 때 시작한 촛불 집회도 이랬어요. 네티즌 앙마가 한 커뮤니티 게시판에 촛불로 추모하는 시간을 갖자는 글을 올리고, 아무도 없어도 좋다, 나 혼자라도 나가서 촛불 들고 있겠다- 이러면서 시작됐죠.
여기서 다시, 적재적소, 효율성 같은 응원봉 집회와 거리가 있는 것 같은 말이 등장합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등장 이후, 우린 정말 이상하게 바쁘게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 그래도 긴 근무 시간에 즐겨야 할 콘텐츠는 늘고, 운동과 공부도 더 열심히 해야 합니다.
... 슬프지만, 우린 '속도와 효율성을 중시하는 빨리빨리 문화'에서 사는 사람들이거든요.
바쁜 세상에서 원하는 걸 조금이라도 많이 얻으려고 하니, 애드호크라시가 개인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일종의 시스템이 된 겁니다. 다른 사람에 맞춰 내 스케줄을 짜기보다, 내가 짬을 내는 시간에 잠깐 함께할 사람을 찾는 게 더 편한 거죠.
덜 친하고 덜 반갑겠지만, 외롭지는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는 이미 애드호크라시사회입니다. 하지만 그런 시스템이 2008년 촛불 집회를 만들었고, 2017년 박근혜 퇴진 시위에 이어 2024년 비상계엄 반대 응원봉 집회까지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인터넷이 널리 보급된 곳에선 빠르게 정착한 것이 애드호크라시입니다. 인터넷 문화 자체가 애드호크라시적 행태의 기반이니까요. 동남아시아를 비롯해 많은 곳의 민주화 운동 역시 애드호크라시에 기반하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가 다른 점이라면, 경험치가 많이 쌓였다는 것. 우리에겐 실제로 군부 독재를 무너뜨리고, 대통령을 끌어내린 경험이 있습니다. 게다가 지난 몇십 년간의 경험을 통해, 빠르게 임시 시스템을 구축하는 방법도 잘 압니다. 다른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먼저 움직이는 개인도 많고요.
다만, 이런 사회가 가져다줄 어떤 고립감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에게 소속감은 매우 중요하니까요. 온라인 게임에선 이런 부분을 느슨하지만 지속적 조직인 ‘길드’ 구성 등으로 해결하지만, 애드호크라시 사회의 개개인은 과연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