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만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버스가 너무 막히는 겁니다. 평소엔 1시간도 안 되는 거리를 2시간 걸려 갔습니다. 너무 막히니 졸다 지쳐 스마트폰을 꺼냅니다. 넷플릭스에서 뭐 볼 거 없나-하면서 둘러보는데, 많이 본 영화에 익숙한 이름이 걸려 있습니다. ‘여인의 향기’. 본 사람은 적어도 제목은 한 번씩 들어봤을 영화죠.
이게 언제 영화인데 넷플릭스 영화 상위 10위에 들어온거야? 하고 검색을 먼저 했는데, 뭐 특별한 이유가 보이지 않습니다. 대체 뭘까 궁금해서 틀어봤습니다. 사실 저도 이 영화, 본 적은 없거든요. 다만 이 대사만 유명해서 기억하고 있었죠.
“탱고를 추다 잘못하면 스텝이 엉키죠. 하지만 그대로 추면 돼요. 스텝이 엉키면 그게 바로 탱고지요(If you make a mistake, if you get all tangled up, you just tango on.).”
그래서 춤 아니면 음악 영화일 거라 지레짐작했는데, 아니었네요. 노인이 자살 여행을 떠나는 영화였어요. 아니다. 노인이 사는 의미를 잃고 좋아하는 것 다 해본 다음에 세상을 정리하려다, 같이 갔던 고등학생이 말려서 집에 돌아오는 영화입니다.
예, 그러니까 이 영화는, 그래도 살아-라고 말하는 영화입니다.
위에 고등학생이라고 쓰긴 했지만, 처음엔 고등학생인 줄 몰랐습니다. 뭔가 으리으리한 교정이 나오거든요. 학생들도 노안이고. 그래서 대학교인가? 싶었는데- 고등학교라고 합니다. 그렇게 보니 다들 교복을 입고 있네요. 찰리 심스(크리스 오도넬 분)는 이 명문 고등학교에 다니는 고학생입니다. 남들 놀러 가는 명절에도 아르바이트해야 하죠.
그런 그의 눈에 띈 것이 추수감사절 연휴 기간 노인(…)을 돌봐주는 아르바이트. 그가 돌봐야 한다고 만난 노인이 전직 군대 장교였던 프랭크 슬레이드(알 파치노 분). 근데 딱 봐도 이 할아버지, 보통이 아닙니다. 아주 그냥 첫 만남부터 독설을 쏟아냅니다. 말도 태도도 어투도 굉장히 심합니다.
와, 요즘이라면 저런 할아버지 고발하겠다-싶은데, 찰리는 심성이 정말 착해서, 이 일을 맡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뉴욕에 끌려가죠. 가만 보면 이 모든 게 프랭크의 계획 같아요. 젊은 시절을 즐겼던 뉴욕에 가서 죽고 싶은데, 시각장애인이라 혼자서는 못하니 ‘그런 계획을 방해하지 않고’, ‘뉴욕에 데려다 줄 수 있는’ 사람을 한 명 찾은 거죠.
하지만 …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죠? 그리고 찰리도 찰리 나름의, 뉴욕에 계속 머물 수 없는 사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 돌아가겠다는 찰리에게, 맛있는 것도 먹게 해주고, 좋은 호텔에서 잠도 자고, 뉴욕에 사는 프랭크의 가족과 함께 추수감사절 식사도 합니다.
찰리에게 멋진 만남을 만들어 주려고 탱고까지 추죠. 그때 나온 대사가, 우리가 기억하는 저 명대사였습니다. 따지자면, 모든 게 죽기 전 버킷 리스트를 해치우려는 프랭크의 계획이었습니다만. 그래도 뭐, 나름 뉴욕을 맘껏 즐깁니다. 먹고 춤추고 사랑했죠.
그렇게 논 다음, 애는 돌려보내고 이제 죽으려고 합니다. 그랬는데, 뭔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찰리가 프랭크를 놔주지 않습니다. 빨리 돌아가야 한다는 애가 돌아갈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결국 둘이 부딪힙니다. 너 왜 나를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않냐고. 그때야 튀어나오는 그의 본심.
“I’m too old. I’m too tired. I’m too f*cking blind!”
사실 처음부터 이상했잖아요. 허름한 조카네 집에 얹혀사는 할아버지가, 갑자기 비행기 일등석을 끊어서 뉴욕에 가질 않나. 최고급 호텔과 최고급 식사를 즐기고, 맞춤 양복까지 입습니다. 죽기 전에 돈을 다 쓰는 사람 모습이죠.
그렇게 돈을 다 쓰는 이유는, 사는 게 별로 의미 없어서. 너무 늙었고, 너무 지쳤고, 게다가 눈까지 멀었으니까요. 그래서 좋은 시절을 떠올리며 인생 그만두려고 했는데, 이 철없는 고등학생이 엉겨 붙은 겁니다.
이에 빡친 프랭크가 내가 안 죽어도 될 이유 하나라도 있으면 대라고 하니(Give me one good reason not to), 겁도 없이 두 가지를 댈 거라면서, 난 할아버지처럼 탱고도 잘 추고 페라리도 잘 운전하는 사람 못 봤다고(I’ll give you two. You can dance the tango and drive a Ferrari better than anyone I’ve ever seen) 말합니다.
어이없지만, 이게 프랭크가 죽지 않고 살 이유가 됩니다. 그리고 영화 끝자락에서, 찰리가 처한 곤경에서 찰리를 구하는 대활약을 하죠. 2시간 반이면 전혀 짧지 않은 영화인데, 버스 안에서 반을 보고, 집에 돌아와 집중해서 나머지 1시간 반 분량을 다 봤습니다. 중간 페라리 신이 조금 느슨한 것을 빼면, 소소한데도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의문이 하나 남았습니다. 아, 좋은 영화였다-하고 끝났는데, 하나를 모르겠더라고요. 왜 이 영화 제목이 ‘여인의 향기’지? 프랭크가 여자를 정말 좋아하는 괴팍한 할아버지인 것은 알겠는데, 왜 영화 제목이 ‘여인의 향기’일까요?
그래서 다시 돌려보니, 프랭크 할아버지가 이런 말을 했었네요.
“지난 몇 년간 날 지탱해 주는데 뭔지 아니? 그 생각이야. 언젠가는 … 언젠가는 이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 내가 여자의 팔에 안겨 있는 거야. 그녀의 다리가 날 감싸고 … 내가 깨어난 아침에도 그녀가 그대로 있어야 해. … 그녀의 체취, 그 따뜻함 말이야.
You know what’s kept me goin’ all these years? The thought that one day … Just the thought that maybe one day, I’d—I could have a woman’s arms wrapped around me—and her legs wrapped around me. … That I could wake up in the morning and she’d still be there. The smell of her. All funky and warm.”
영화 제목이 여인의 향기인 이유가, 여기 있었군요. 지치고 힘들어도 살아가는 이유라고 해야 하나요.
어찌 보면 성욕(…)이 프랭크를 지금까지 지켜준 원동력이었다고 해도 좋겠지만, 그것만은 아니겠죠. 그건 어쩌면 소속감 비슷한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봐줘, 나를 사랑해줘, 내가 바보 같아도- 나를 지켜줘-하는 것과 같은.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괴팍했던, 능력은 있지만 괴팍해서 승진도 못 했던 그가, 5년 전 어이없는 사고로 시력을 잃어버린 다음에 남은 건, 뭐, 그런 느낌이었을 테니까요. 그런 그가 다시 살 마음을 챙긴 건, 탱고를 잘 춰서도 페라리를 잘 몰아서도 아닌, 그런 말을 해주는 찰리 같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물론 프랭크도, 끝에 스스로 찰리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 돌진해 들어가, 자신이 필요한 존재임을 스스로 증명합니다. 전 찰리와 프랭크가 부딪히는 부분을 영화 클라이맥스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이들은 이 마지막 장면을 최고 명장면으로 꼽더라고요.
봄날, 내가 죽어도 세상은 그대로겠지-라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권합니다. 알 파치노가 얼마나 끝내주는 배우인지 맛보고 싶은 분에게도 좋습니다. 월, 화요일은 말고 목요일쯤 보시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주말 내내, 여운을 즐길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