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에 두고 오래 읽는 책이 있습니다. 자료로 쓰는 책도 있지만, 주로 매번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을 주는 책입니다. 처음 읽을 땐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일 때는, 참 신기합니다.
랜디 포시 교수의 ‘마지막 강의’도 그런 책입니다. 처음 읽었을 땐 자기계발서 같았습니다. 다시 읽을 땐 가족에 대한 절절한 사랑이 보입니다. 얼마 전 ‘퍼스트 펭귄’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열었을 땐, 아이고, 울면서 이 책을 썼겠구나-싶었습니다.
남기고 떠나는 아이를 생각하며, 살았다면 아빠로서 해줬을 얘기를, 급하게 꾹꾹 눌러 담았구나-하고요. 세월이 지나도, 아이들이 아빠를 이런 사람으로 기억해줬으면 좋겠다고.
퍼스트 펭귄(The First Penguin)은 카네기 멜런 대학교 컴퓨터 공학 교수였던 랜디 포시가, 수업 시간에 학생에게 주던 상의 이름입니다. 비록 실패했지만, 꿈을 이루기 위해 큰 위험을 감수한 학생을 격려하는 상이죠.
왜 퍼스트 펭귄일까요? 적이 은밀하게 잠복해 있을지도 모르는 물속으로 뛰어들어야 할 때, 반드시 어느 하나는 첫 번째 펭귄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합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앞서간다고 해서 ‘퍼스트 무버’라고도 합니다. 뉘앙스는 조금 다르지만, 앞날이 불확실한 위험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는 점에서, 모든 퍼스트 무버는 퍼스트 펭귄입니다.
IT 세계에는 이런 퍼스트 펭귄들이 참 많습니다. 1984년에 나온 세계 최초의 휴대폰 모토로라 다이나텍 8000X, 들어보신 적 있나요? 출시가격 4천 달러에 33cm에 달하는 크기, 800g 가까운 무게를 자랑하는 벽돌폰입니다. 완전 충전에 걸리는 시간은 무려 10시간이고, 오래 쓸 수도 없었습니다. 지금 보면 이런 걸 휴대폰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싶지만, 그때는 휴대전화 네트워크도 없었던 시절인 걸 생각하면(휴대폰과 네트워크가 함께 구축됐습니다.), 그 어떤 폰보다 혁명적 변화를 시작한 제품입니다.
다른 펭귄도 있습니다. 1994년에 나온, 전자수첩과 휴대폰을 합친 듯한 IBM 사이먼 폰은, 세계 최초의 스마트폰이라고 불립니다. 1998년, 우리나라에서 만든 세계 최초의 MP3 플레이어 새한 엠피맨은, PC로만 들을 수 있었던 MP3 파일 음악을 PC 바깥으로 끄집어낸 첫 제품입니다.
다들 처음 들어봤다고요? 당연합니다. 퍼스트 펭귄은 대부분 시장에서 실패했으니까요. 사실 그래서, 대부분 퍼스트 무버가 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개척자가 아니라 패스트 팔로어가 되려고 하죠. 기다리다가 남이 성공하면, 그걸 재빨리 베껴서 따라잡는 방식입니다. 경쟁은 심하지만 안전하고 확실합니다. 퍼스트 펭귄은 정말 적어요. 다들 뒤에서, 누가 먼저 뛰어들길 기다립니다.
랜디 포시는 왜 이런 실패자에게 상을 줬을까요? 실패하지 않고서는 성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경험이란,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갖지 못했을 때 얻어지는 것이니까요.
우리는 완벽하지 않으며, 삶에서 실패는 당연히 거치는 과정입니다. 처음부터 한 번도 죽지 않고 켠 김에 왕까지 게임을 깰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게임만큼이나 인생에도 경험치는 중요합니다. 기왕 실패할 거면, 제대로 실패하는 게 낫고요.
그러니까 가끔, 과감하게 실수해도 좋습니다. 실수가 오히려 가치 있는 기억이 됩니다. 퍼스트 펭귄이 되기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삶이 항상 안전하지는 않다는 것을, 그럴 수도 없다는 걸 세상에 보여 주세요. 어쩌면 랜디 포시가, 자기 아이에게 남기고 싶었던 메시지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