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말을 낳고, 말은 힘이 된다고 합니다. 사실 말에 대한 금기는 인류가 원시시대부터 가지고 있던 가장 오래된 금기중의 하나입니다. 부정타는 말을 하면 안된다던가, 불행한 결과를 말하면 안된다던가, 죽은 이의 이름을 입에 올리면 안된다던가 하는.
그래서 말에는 언령(言靈)이 있다고 합니다. 말그대로 “말에도 혼이 담겨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혼에는 힘이 있어서, 말한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죠. 우리가 누군가에게 덕담을 건네거나 축복을 하는 것, 욕을 하거나 저주를 퍼붓는 모습 모두 언령을 믿기에 이뤄지는 행위입니다. 주술이나 주문, 기도 역시 같은 일입니다.
사실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말은 마음을 옮기는 행위입니다. 무엇인가가 이뤄지길 바라면서 내뱉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살아가면서 가장 신경써 할 행동중의 하나가 말을 조심하는 것입니다. … 하지만 정말 무서운 것은, 자신이 내뱉은 말은 항상 자신이 책임을 져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이 뱉은 말은 다시 자신을 구속합니다.
오늘 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한 아줌마가 지하철에서 아기를 안고 있느 젊은 부부에게, 당장 교회 나가라고, 그러지 않으면 저주 받아 죽을 거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퍼부었다는. 아주, 끔찍한 저주죠. 갓난 아이를 안고 있던 그 젊은 부부는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지 그 자리에 없었어도 짐작이 갑니다.
정확하게 이야기 하자면, 그 아줌마는 종교인이 아닙니다. 협박이나 저주는 가장 손쉽게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언령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갉아먹는 불안의 언령입니다. 그 아줌마는 교회를 나가라, 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와 신을 빙자하여, 자신이 힘이 있는 척 행세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 앞서 말했지만, 협박이나 저주는 그리 쉽게 입에 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돌아올 리스크까지도 결국 자신이 책임져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불안의 언령을 이겨내는 방법은 없을까요? 간단합니다. 그것은 사물의 이름을 정면에서 마주보고, 제대로 불러주는 것입니다. 이름을 마주보지 못하고 그것을 외면하거나 회피하려고 할때, 우리는 오히려 더 불안에 빠지게 됩니다. 그것이 현실에서 이뤄지지 않을 것임을, 그저 악담에 불과한 것임을 알면서도 우리가 “혹시나”하는 마음을 가질때, 불안의 언령은 정말로 힘을 가지게 됩니다.
조금 힘들지라도 진실을 마주대하는 것, 그것만이 가짜 힘을 행세하려 드는 것들을 이겨내는 방법이지 않을까요?
…물론 저라면, “저도 예언 하나 할까요? 아주머니 말하시는 꼴을 보니 하나님이 화나셔서, 이 지하철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잘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 겁니다.”
라고 말해버렸겠지만 말입니다. ㅡ_ㅡ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