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기억을 마주할 때는 언제나 당혹스럽다. 길을 걷다가 튀어나온 보도블럭에 걸려 넘어질 때처럼, 계단을 내려가다 내려간다는 사실을 잊고 발을 헛딛을 때처럼. 그것이 내가 살아왔던 시간을 ‘내가 알고 있는’대로 확인 시켜 주는 것이 아닌, ‘사실’ 그대로의 단편들을 비추고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들을 확인할 때의 낯설음. 그 때의 내가 내가 아니었으면 하고 바랬었던 부끄러운 기억, 이쁘게 포장되고 편집된, 추억들과는 상관없이 여전히 자기자신의 방식으로 흐르고 있는 시간에 대한 확인.
그리고 초라한 자신에 대한 확인 사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시절의 이야기들은 왜 그리 재미난 걸까.
오늘 나우누리에서 편지 보관함을 폐쇄한다는 공지사항을 보고 찾아갔던 Mybox 메뉴에선, 그런 기억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1995년에서 1999년까지 5년동안 받았던 2247통의 편지와 메모들이.
…지난 몇 년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2. 다운이 안되어 갈무리를 받았다. 1번부터 시작해서 쭈욱 흩어가며 글을 읽어본다. 참,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래, 그 때는 그랬지라고 생각하다가, 맘 속으로 조용히 울고, 웃다가, 그만, 참을 수 없어 담배를 피워 문다.
그 때 나와 얘기를 나눴던 그 수많은 사람들은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때론 밤새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불렀고, 때론 단 한번의 얼굴도 보지 못했고, 때론 만화방에서, 대학로 거리에서, 집회장에서, 대학 캠퍼스에서, 전주에서, 울산에서, 스쳐지나가듯 한 번씩 만났던 그들.
많이 편지하고, 쪽지 나누고, 메모를 남기면서 살았던 그 때.
별빛바다, 나미, 내 동생… 지금 참 많이 보고 싶은 얼굴.
아직까지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문자를 주고 받는 유일한 이.
쁘리띠정, 정은이, 아이디를 만들어줬다고 무척 좋아했었다.
기운 빠지는 일이 있으면 내 앞에서 룰루랄라 쇼 해준다고 했다. … -_-;;
하늘못, 술못, … 유구무언.
동숙이 녀석, 지금쯤 누구와 살다가 헤어졌다고 했던가.
항아, 이 녀석은 지금 나와 같은 사무실에 들어와 있고,
하리, 칼리, 눈물 많고 고집쎄고, 어디서 무엇을 할 지 종잡을 수 없었던 아이.
풀꽃처럼, 옛날 내게 해준다던 실연 이야기는 언제쯤 해 줄 수 있을까.
인치조, 동주형.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말로는 나를 많이 아낀다고 주장했었는데. -_-;
아아, 비취조 형은 또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갑자기 게임 만든다고 그래서 당황했었는데
길소, 가끔 결혼식에서만 얼굴을 마주치는데, 여전히 눈뜨고 세수하는 법도 못 배웠는지.. ^^
그리고 의로운길, 민주교편, 지희, 지영, 떼굴 … 내가 많이 실망시켰을 지도 모를 꼬메프. 다들 잘 지내는 지.
유경, 일본어 공부는 잘하는지. 끝내 피자 사준다는 약속은 못 지켰네.
유리, 넌 지금 뭐하고 살고 있는 지. 밥 사준다는 데도 못 얻어먹었지.
참 많이 고생시켰을 유용, 사과씨. 매일 밤 밤새며 번개하던 메아리 사람들. 수철형, 광백형, 대들보님, 브릴리안트, 새날이, 부엉이.
많이 울고 웃게 만들었던 찬우물 사람들. 형들, 누나들, 동기들, 동생들. 부시삽을 해준 친구들, 통이, 씨하트, 탱, 훗까 시, 콩알형, 차마 말로 옮기기에 미안한 사람들. 고마운 사람들.
아콰 사람들, 학사모 사람들, 노사모 사람들…
유정, 페비, 별이, 제도, 피노형… 등돌리고 배신하고 떠나는 사람들 뒤 켠에서,
끝까지 나를 믿어주고 보듬어 주었던 사람들.
3. 그동안 나는 학교를 졸업했고, 2번의 연애를 끝냈고, 2번 소개팅을 했으며, 3번 동호회 시삽을 했고, 공익근무요원 생활을 마쳤고, 1번 대인기피증에 걸렸고, 3번 잡혀갔다가 나왔고, 4가지의 아르바이트를 했으며, 19개의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한달에 4권의 책을 읽고 7권의 잡지를 읽으며 20번의 회의를 하고, 매일 8시간씩 웹서핑을 하고 4잔씩의 커피를 마시고 30분씩 비디오 게임을 한다. 한달에 평균 세 편의 원고를 쓰고 다섯달 동안 담배를 끊었다가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30명 정도의 친구들이 실연을 겪었음을 내게 알렸으며, 50여명을 제외한 전원이 삼십대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많은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온다고 한다. 나쁜 일은 지워지고 좋았던 기억만이 남는 거라고, 그래서 인간은 살아갈 수 있는 거라고 만화 ‘몬스터’ 18권에서 말했다. 어차피 모든 인간은 만났다가 헤어진다. 서로의 맘을 진정으로 알아줄 수 있는 관계따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부끄럽고 아팠던 기억따위는, 몰래 감추면서 없었다고 사기치는 것은 아닐까. 헤어지지 않을 수 있었는데 헤어진 것을 변명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착각을 하는 것은 아닐까. 시간이 지날 수록 기억할 수 있는 힘이 부족해, 모든 것이 원래 그랬던 것처럼 착각을 하는 것은 아닐까.
서로의 마음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거라고,
그렇게 둘러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간의 상처란, 모르는 척 외면한다고 해도 가슴 속 깊숙한 곳에서 살아있는 것인데.
그 시간들로 인해 버려졌던 많은 것들을 그대로 품고 그렇게 잠들어 있을 뿐인데.
3. 지금도 다들 잘 지내고 있는지.
나를 기억하기는 하는 지.
그 때처럼 푸른 꿈 하나 계속 꾸면서 살아가는 지.
나는… 나는,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는데.
참 많이 사랑받아서, 이렇게 잘 살아가고 있는데.
당신, 내가 기억하고 나를 기억하는 당신
잘 살아가고 있는 지
정말, 잘, 살아가는 지.
* 마이느도루님의 “오래된 편지들을 읽었다.”를 읽다 예전에 써둔 글이 생각나서 옮기다. 이 사람들 가운데 몇 명은 다시 만나 여전히 친하게 지내고 있고, 몇명과는 연락이 닿아서 소식을 주고 받으며, 한두명은 결혼을 하거나 앞두고 있고, 대부분 힘들지만 재밌게 살아가고 있다. … 그리고 몇몇은, 이제 연락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