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 음악을 듣는다는 것
2006년 12월, 서울 메트로가 AGB 닐슨미디어리서치에 의뢰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지하철 2호선의 표준 캐릭터는 “음악을 듣는 여대생”의 모습이었다(링크). 지하철 2호선의 이용객은 여성이 남성보다 많고, 20대가 35%를 차지하고 있으며, 전체 이용자의 25%는 음악을 듣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출퇴근길에 귀에 이어폰을 꼽고 있는 사람을 보는 것은 일상적인 모습이다. 그들은 음악을 듣는 사람, DMB 방송을 보는 사람, PMP로 영화를 보는 사람 등 그 모습은 다양하지만, 그들은 공통적으로 무엇인가를 ‘듣고’ 있다. 그들은 그렇게 ‘들음’으로써 자기만의 세계로 접속해 들어간다.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던가, 지루하지 않다던가, 남는 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 있다던가 하는 효과는 자신만의 세계로 접속해서 얻어지는 결과다. 귀에 이어폰을 꼽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내 옆에서 부대 끼는 사람들에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개인적 음악 듣기의 역사
인간이 음악을 개인적으로 듣게된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산업혁명 이후 18~19세기에 나타난 기술은 음악을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재현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지금처럼 전기미디어에 의해 복제된 음악은 19세기말에 발명된 축음기에 의해 나타나게 된다.
축음기 발명 이전의 음악은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과 그것을 듣는 사람 사이에 큰 간격이 존재했다. 연주자(들)에 의해 하나의 음악이 만들어졌다가 사라지고, 몇몇 사람들만 그것을 듣고 즐길 수 있었다. 그것은 기억 속에서 재현시키는 것 외에는 다시 즐길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축음기의 발명 이후 음악은 음악을 만들어낸 것과 분리되게 된다. 이제 음악은 전세계의 곳곳의 수많은 곳에서 동시에 생겼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수십년 전의 소리가 지금 여기에서 다시 나타나기도 한다. 이것은 축복임과 동시에 불행이었다.
음악이 복제되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모든 음악과 소리가 뚜렷하고 확실하게 들리는 세계에서 모든 소리가 반복해서 재생되기에 시끄럽고 뚜렷하게 구분하기 힘든 세계로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듣기’는 개인적인 것이 아닌 집단적인 것이었다. 당신이 듣는 음악은 나도 들을 수 있다. 내가 아내에게 하는 이야기가 옆집 아저씨의 귀에도 들어간다. 그런 것이다.
‘듣기’를 개인적으로 변화시킨 것은 1920년대의 상업 자본이었다. 처음에는 공적인 의사전달, 정보전달의 수단으로 사용되던 전화와 라디오 방송에서, 사람들은 떨어져있는 누군가와 소통하는 것과 같은 감각을 느낀다. 그러자 사람들은 미디어로 존재했던 것들을 사적인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발견한 자본은 더 많은 사용을 장려하기 위해 그런 ‘사적인 사용’을 장려하게 된다.
그렇지만 음악은 여전히 어떤 ‘장소’에 묶여 있었다. 음악가와 청취자 사이의 넓은 거리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음악을 재생하기 위한 기계가 있는 장소에 묶여서 들어야만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제약을 처음으로 깬 것이 1978년에 개발된 소니의 휴대용 카셋트 플레이어(워크맨)이었다.
감각은 인간을 지배한다
그렇다면 왜 음악을 듣는 것일까?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듣는’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감각은 흔히 내 밖의 있는 것과 만날 때 우리 내부에서 이뤄지는 ‘반응’을 의미한다. 음식을 먹을 때 느껴지는 것들을 보자. 우리는 눈 앞에 있는 음식을 보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보고, 씹는 소리를 들으며, 씹히는 감촉을 느낀다. 보통 그 다섯 가지의 감각이 멋지게 조화를 이루면 우리는 훌륭한 ‘경험’을 했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렇게 감각으로 세계를 느끼며 살아간다. 감각에 좋은 것은 ‘즐거움’이고 감각에 나쁜 것은 ‘불쾌함’이다.
감각으로 세계를 파악할 수 있기에, 이 감각을 어떻게 여기는 가가 바로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는 가의 문제가 되었다. 그것은 때로는 혼의 본질을 볼 수 없게 만들기에 다스려야 할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내 안에 있는 것과 밖에 있는 것 가운데 성질이 비슷한 것이 서로 호응하여 느껴지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지나치면 쾌락이 되지만 적당히 조화를 이루면 선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무시당하기도 하고 타협하기도 하고 쫓아가기도 하는 감각. 그러나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비슷한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감각을 ‘다스려야’ 한다고 믿는다는 사실이다. 감각이 다스려져야 한다고 믿는 것은, 우리가 그것에 너무 쉽게 굴복한다는 이유와 더불어 감각은 때와 장소에 따라서 다르게 느껴진다는 사실, 다른 이가 느끼는 것이 나와 비슷하면서도 서로 같지 않다는 현실 인식에서 나온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음악을 듣는 행위는 “나만의 세계로 접속”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청각이 일상적으로 세계에 열려져 있는 감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귀에는 현실의 온갖 자극이 전달되어 온다. 우리는 그 자극을 인지하지 않더라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다. 또한 청각은 시각과는 달리 ‘보이는 것의 소리(가시 음향)’과 ‘보이지 않는 것의 소리(비가시 음향)’을 모두 잡아낸다. 그래서 청각은 “지금, 바로 여기”라는 현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우리는 이제 ‘청각’의 통제를 통해 새로운 ‘가상의 환경’을 만들어내는 법을 익혔다. 개인용 오디오 기기들은 우리에게 움직이는 음악 환경을 제공해 줬다. 움직이는 음향 환경은 우리들이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워크맨의 이어폰을 귀에 꼽는 순간 우리의 청각은 이 세계와 단절된다. 개인용 오디오 기기는 현실에 들려주는 구체적인 음향들을 삭제한다. 대신 우리가 선택한 감상적인 음악들이 그 자리를 메꾼다. 현실은 거세되고 감정은 살아난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다른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현실의 거세를 위해 쓰여지는 청각
그렇다면 거세되는 현실은 무엇일까. 그것은 현실이라기보다는 어떤 상황에 존재하는 다른 감각이다. 지루한 시간을 빨리 자나가게 하기 위한 ‘시감각’의 거세, 지하철과 같이 좁은 공간에서 의미없이 존재하는 ‘시각’의 거세 등. 그렇게 감각이 거세된 상황을 만드는 것은 강요된 감각적 대상과의 소통을 거부하는 것과도 같다. 결국 ‘자신만의 세계’라는 것은 고작해야 자기 혼자 딴생각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이 그렇게라도 혼자서 딴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은 그만큼 주변의 환경에서 주어지는 감각의 폭력이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보기 싫어도 봐야하고,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하고, 맡기 싫어도 맡아야만 하는. 자연스럽지 않고 인위적으로 조작되어 사람들에게 집중을 강요하는 감각에 대한 폭력들이. 너무 많이 노출되어서 그것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지도 잊어버린 그런 폭력들. 커피숍에서 들려나오는 음악, 길거리의 소음, 눈을 뜨면 보이는 광고, 옆사람의 의미없는 수다, 종교를 강요하는 사람들과 번쩍이는 간판들, 미니 홈피와 블로그, 휴대폰 통화연결음에서 흘러나오는 내게는 의미 없는 음악들.
그래서 생각해 본다. 누군가는 개인적인 음악 듣기가 사회와의 소통을 거부하는 단절의 몸짓이라고도 하지만, 정말 그럴까.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닐까. 소니의 워크맨이나 애플의 아이팟이 히트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감각 폭력의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방법을 제공해 줬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