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중공업, 예의 없는 것들을 그냥 보고만 있을 것인가

정당성에 대한 이러한 회의는 계획들에 대한 단순한 반발과 혼동될 수 있을 정도로 완만한 단계를 거치며 무르익어 가지만, 그런 양상들을 통해 지도자들에 대한 전반적인 신뢰도는 소리없이 잠식되어 간다. 그들은 그들의 형식적인 제도적 정당성을 온전히 간직한 채 사회학적 정당성을 무감각하게 상실하는 것이다.(13)

재검토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이 지도자들의 제도적인 정당성이 아니라 그들의 도덕적 정당성이다. 부인되는 것은 그들의 권위가 아니라, 사회적인 대화에서 출발하여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하는 그들의 무능력이다. 그리고 불신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들의 노하우가 아니라, 차라리 그들의 존재양식과 그들의 윤리의식이다.(35)

– FORESEEN 연구소, <21세기를 위한 새로운 엘리트>, 동문선, 1999

일본에서는 한 기업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사장이 나와서 사과를 하는 것을 심심치않게 볼 수 있다고 한다. 심지어 극단적으로 관련 책임자들이 자살을 하는 것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반대다. 어떤 사고가 터져도, 어지간하면 책임자들은, 특히 최고 책임자들은 자리에서 도망가고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 다른 나라에서는 밑의 직원이 잘못하면 사장이나 회장이 도의적 책임을 지는데, 한국에선 최고 책임자에게 책임이 있어도 어느새 아랫사람 몇명이 대신 덮어쓰고 끝나고 만다.

이 나라는 항상 그랬다. 삼풍 백화점이 무너졌을 때도,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도, 대구 지하철 공사장이 터졌을 때도, 목포에서 비행기가 떨어지고 부산에서 기차가 땅으로 쳐박혔을 때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막상 다들 말은 인재라고 하면서도 어떤 사람때문에 생긴 일인지는 묻지 않았다. 그저 운없는 몇 명만 감옥에 갔을뿐. 그리고 우리는 모두 잊어버렸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이준 회장(2003년 4월 출소, 2003년 10월 사망)은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7년 6개월의 형밖에 받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옛 흔적을 짓누르듯 설계된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서 있다. 성수대교가 무너졌을때, 성수대교 건설당시 책임자였던 동아건설 최원석 회장의 혐의를 상당부분 입증했으면서도 기소에는 실패했다. 그저 하위직 관계자 몇명이 구속됐을뿐. 대구에서 지하철 공사장이 폭발하고, 나중에 지하철에 방화 참사가 일어났을 때도 맨 밑의 관련자 몇 명만 구속됐을 뿐 최고 책임자들이 사과한 적은 아마도 없었다.

작년 목동 아이스링크 화재 사고때는 행사 취소에 대한 사과를 <현대 카드> 관계자가 아닌 “김연아”가 해야 했으며, 이번 삼성중공업에 의한 태안반도 유조선 기름 유출사고때도 “삼성중공업 회장”은 코배기도 보이지 않았다. 며칠전 경기도 이천에서 일어난 ‘코리아냉동’의 냉동창고 화재 사건에도, 회사 대표는 어제(1월 9일, 수요일)에야 다른 사람을 통해 연합뉴스에 전화를 걸어 사과의 뜻을 전했다.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누구는 죽어도 효율성 효율성을 외치지만, 우린 살기위해 일을 하는 것이지 일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은 제로섬 게임도 아니고, 약육강식의 세상도 아니다. 진짜 그렇다면 인류는 이미 멸망해야 했을 것이다. 우리는 함께 사는 존재다. 나 혼자 되는 일 따윈 없다. 자신의 책임하에 있는 사람들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면, 맨 윗 사람이 책임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야 아랫사람들이 믿고 따르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나라는 뭔가 잘못됐다. 윗사람은 계속 도망가고 꼬리만 죄를 뒤집어쓰고 짤린다. 아니. 그건 낫다. 태안반도는 “자원봉사의 위대함”을 외치는 언론의 보도 속에 누가 뭘 잘못했는 지는 계속 묻혀만 가고 있다. 이건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다. 조폭의 사회다. 이런 세상에선, 사람들이 “아무리 개똥이라도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조폭의 보스가 하는 역할이 그거 아닌가.

하지만 다시 묻고 싶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만 하냐고. 언제까지 저 책임지지 않는 것들을 당연하게 내버려둬야 하냐고. 언제까지 저 리더가 될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리더의 지위를 줘야만 하냐고. … 언제까지 저 예의도 없는 것들에게 아량을 배풀고 있을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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