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의 미학, 삶의 미학

1. 촛불은 전기가 발명되기 이전, 밤을 밝혀주는 몇 안되는 수단이었다. 이집트에서 발견된 기원전 3000년전의 촛대는, 인류가 아주 옛날부터 초를 사용했음을 말해준다. 현재와 같은 초는 19세기에 파라핀 왁스가 발견되면서부터 만들어 졌다. 이때 초를 주형틀에 부어넣는 기계가 발명되었으며, 지금 우리가 들고있는 양초가 되었다. 양초에는 불의 밝기를 나타내는 칸델라를 측정하는 역할을 하는 ‘표준양초’라는 것도 있다. 이 표준 양초는 시간당 120개의 촛농을 태우는 1/6파운드(약 76g)의 향고래 왁스 양초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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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세기 들어 촛불은 인권운동가들에 의해 인권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어둠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는 빛, 거짓으로부터 세상을 밝히는 이성, 비합리적인 세상에 맞서는 합리적인 행동의 상징. 미국에선 매년 11월 23일 인권운동 축제를 개최하면서, 촛불 세레모니를 열기도 한다. 지난 봄, 티벳에서 학살이 일어났을 때, 이에 항의하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열린 집회에도 항상 촛불이 놓여있었다.

▲ 티벳 학살에 항의하기 위해, 하바드 스퀘어에서 열린 프리티벳 집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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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국에서 대규모의 촛불이 등장한 것은 2002년 가을이다(그 전에도 집회에서 촛불을 든 적이 없진 않았다.). 미군 장갑차에 의해 미선, 효순 두 학생이 살해된 사건의 재판이 불공정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에 항의하기 위해, 네티즌 앙마가 제안하여 성사된 이 집회는, 2002년 월드컵때 광장의 경험과 맞물리며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효과를 낳았다. 조직된 것이 아닌 ‘광장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의 자발적 출현. 네트워크를 통해 퍼나르고 날라진,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던 대중의 출현. 진혼의 촛불, 저항의 촛불이 태어난 것이다.   

이후 촛불이 다시 등장한 것은 2004년이었다. 그 촛불 역시 진혼의 촛불, 저항의 촛불이었다. ‘민주주의의 죽음’에 대한 조의와, 한나라당 마음대로 하게 놔두진 않겠다는 저항을 담은 촛불(대한민국 헌법 1조가 이때 만들어진 노래다.). 이때부터였을거다. 보수층이 헌법 위에 ‘국민정서법’이 있다고 말하며, 네티즌들을 위험한 세력으로 몰아가기 시작한 것은.

4. 그리고 2008년, 다시 거리에 촛불이 섰다. 진혼의 촛불, 저항의 촛불은 이제 비폭력 직접행동의 상징, 민주주의의 주권자인 국민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민중, 민초, 시민, 아무튼 저 낮은 곳에 있던 어떤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 촛불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 촛불은 그동안 외로웠다. 우리만 맞고 우리만 피흘리는 줄 알았다. 사람들은 그저 보수언론이 가리키는 대로 따라가고 생각하고, 그래서 이렇게 홀로 타다가 무참하게 꺼져버릴 것만 같았다. … 그런데, 오늘 시국 미사에서, 신부님이 그러시더라.

‘여러분, 많이 외로우셨죠’

우리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돈도 없고 빽도 없고 가진 것이 없어서, 또 이렇게 두들겨 맞다가 잊혀지고, 끝나버릴 줄 알았는데, 그 순간, 희망이 다시 지펴졌다. 무관심하고 무관심하고 무관심했던 어떤 이들에게 상처받았던 마음이, 조금, 위로가 됐다. 우리, 혼자가 아니었구나. 어떻게든 싸우고 뚫고 나가야, 저 대답없는 정권이 반응이라도 하지 않겠냐고,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어도 이대로 주저앉아 버릴 순 없지 않냐고 다그치던 마음이, 조금, 진정이 됐다.

5, 거리의 촛불은 지금, 삶의 미학을 만들어나가고 있는 중이다. 사실 삶의 미학은 별 것이 아니다.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해서 선택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저 멀리 수도승들이나 가능한 줄 알았던 삶의 미학을, 바로 지금, 우리들  스스로가 만들어나가고 있다. 라면 하나를 골라도, 신문 하나를 봐도 생각을 하고 고민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아예 먹거리 자체를 걱정하며 채식으로 돌아섰다. 스스로가 나섰던 자리를 스스로가 치우고, 스스로가 하고픈 말을 신문으로 찍어 나눠준다. 

촛불 집회 현장도 다르지 않다. 필요한 만큼 모금이 이뤄지고,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먹거리와 장비들을 누군가가 가져와 나눠준다. 사람이 필요하다고 외치는 곳에 달려가는 사람들이 있다. 스스로 예비군복을 입고 최전방에 있기를 자처하고, 스스로 의료지원을 나가며 밤새는 사람들이 있다. 누가 하라고 등 떠민 것도 아닌데, 이런다고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플랑카드를 들고 끝까지 서 있는 사람들이 있고, 비폭력을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올리며 현장을 기록하는 사람들이 있다.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기를 선택한 사람들.
촛불의 미학을 삶의 미학으로 승화시킨 사람들.

우리는 오랫만에, 스스로 살아가기를 선택한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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