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1995년에 작성한, 레포트입니다. 당시 ‘신세대’ 또는 ‘X세대’ 담론이 유행하고 있었거든요. 세상은 우리보고 ‘니네 이렇다, 저렇다’ 그러는 데, 정말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야? 하는 질문을 던지며 썼던 글(예, 그땐 저도 젊었습니다.). 다시 읽어도 부끄럽지만, 몇년 전 90년대생이 온다- 같은 책이 인기를 끌면서 이 글이 다시 생각나더라고요. 왜 어른들은 다음 세대를 항상 같은 식으로 말할까… 같은 느낌? 그래서 자료 삼아 정리해 봅니다.
이 글에서 말하는 신세대는 74~79년생을 지칭합니다. 그러니까, 서태지 이후에서 IMF 이전까지, YS 정권 밑에서 20대를 맞았던 세대라고나 할까요. 그러고보니 이제는 모두 40대가 됐네요. 여러분들이 꼰대라고 부르는 그 사십대 아저씨가, 실은 신세대였답니다. 그러니까… 그냥 저때는 저랬구나. 이 사람은 저때 저렇게 생각했구나-하고, 그냥 편하게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신세대, 혁명을 시작하라!
1.들/어/가/며
“……공산주의의 유령이 사라졌다는 풍문이 떠돌더니 이제 신세대라는 괴상한 유령이, 아니 마녀들이 떠돈다는 풍문이 돈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은 신세대의 공도 신세대의 탓도 아니다. 그들은 단지 새로운 시대에 등장했을 뿐이다. 사람들은 혼돈이 오면 쉽게 유령을, 마녀를 만든다. 자기들의 위기를 전가할 적당한 대상물을 찾아내기 위해. 그건 무척 위험한 일이다. 신세대는 유령이나 마녀가 아니다……위기는 가능성에 다름아니다. 혼돈이 질서를 형성한다……”
( 주인석, [상상, 넘나들며 감싸안는 힘], 계간 상상, 1993년 가을, p9)
몇년 전 부터 우리는, 지독히도 아픈 사랑니 때문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것은 신세대라는 이름의,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붙여진 이름 때문에 생긴 사랑니였다. 우스운 것은, 막상 우리는 사랑니 때문에 꼼짝도 못하고 퉁퉁부어 있는데, 사람들은 이빨을 고쳐줄 생각은 안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냥 옆에서 자기들끼리만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어떤 이는 와서 이 치통은 이렇게 저렇게 발생한 거다, 라고 말만 하고 가고, 어떤 이는 바보같이 치통에 걸렸다고 욕만 하고 가고, 어떤 이는 와서 치통에는 이 약이 좋다며 약 광고만 실컷 하고 갔다. 우리는 아파서 눈물이 나고 있는데, 다들 와서는 자기들 이야기만 실컷 하고 가는 것이다.
그러다 미메시스란 아이들이 화가 나서 선언을 했다. 우린 이 이빨을 빼야겠다고.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라고. 그런데, 불행히도, 그들은 이빨을 어떻게 빼야하는 지를 몰랐다. 많은 아이들이 그들의 뒤를 이어 이빨을 빼려고 했지만, 우리는 이빨을 뽑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너무 어려웠다.
왜 신세대인가
왜 신세대인가. 무엇이 신세대인가. 그리고 왜 나는 이제와서 다시 신세대론을 이야기하려고 하는가. 93년 하반기부터 신세대 담론은 우리에게 깊숙히 침투해 들어왔다. 그것은 분명 미메시스 그룹의 “신세대 : 네 멋대로 해라”라는 책의 출간을 계기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갑작스런 담론의 침공에 우리들은 어쩔줄 몰라했다.
어떤 친구는 자신은 신세대라며 공공연히 얘기하고 다니기도 했고, 어떤 친구는 신세대를 거부하며 그런 건 있지도 않다고 중얼거렸다. 나도 때로는 그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고, 그들의 얘기로 나의 행위에 변명을 한 적도 있었다. 어쨌든, 우리는 논쟁의 중심에 있지 못했다. 막상 대상은 우리이고 사람들은 우리를 가지고 씹는데,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그들이 만든 장단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을 뿐이다. 당연하다. 우리는 어렸던 것이다!
우리는 아직 그들을 상대할 만큼 강한 무기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흔들렸고, 그것이 재미없게 되버리자, 신세대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결론조차 없이, 그들 멋대로 그 담론(?)은 중지되었고, 그들은 떠나갔다. 이제 남은 건 우리들 뿐이다. 치통에 걸려 아파하는 우리들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다시 신세대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이것은 나를 찾기 위한 몸짓이다. 사람들이 이리저리 갈기갈기 찢어버린 나의 모습을, 그래서 그들에게 멋대로 끌려만 가는 나의 모습을 되찾기 위한, 나의 몸부림이다. 신세대라 불리웠던, 그리고 그들에게 멋대로 X세대로 다시 포장되어 버린, 불쌍한 우리의 모습을 복원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이것 역시 ‘이빨 뽑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실패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도한다. 어차피 … 이빨을 뽑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을테니까.
2. 신세대라는 이름의 유령 : 이제까지의 신세대론
신세대란 용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세대라는 용어는 단순히 ‘새로운’ 세대나 ‘젊은’ 세대 정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신세대란 용어에는 뭔가 개운찮은 뒷 맛을 남기는 재투성이의 뉘앙스가 담겨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렌지족에 대한 가쉽에서 시작된 신세대 논의는 자본의 날렵한 더듬이에 이끌려 어느새 ‘X세대’운운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강영희, [신세대=오리무중 표현 이제는 그만], 캠퍼스 라이프 신문 94년 11월).
그래서 먼저, 다른 말을 하기 전에, 이제까지 이야기 된 신세대 론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이제까지 다른 이들은 신세대에 관해서 무엇이라고 말했고, 우리를 어떻게 보았는 지를. 그래야 가능한 그들이 해 왔던 오류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이야기를 말할 수 있을 것만 같기에.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회자된 신세대론은 크게 두가지로 구분지어 볼 수 있다.
첫째는, 한국일보가 선봉에 선, 질타와 경계와 비난의 의미로 쓰여진 글들이다. 때로는 아카데미즘으로 포장하고 있기도 하고, 때로는 직설적인 말로서 표현되기도 하지만, 그 큰 틀은 별로 다르지 않다. 압구정동이라는 상징적인 곳에 새로운 아이들이 나타나 무위도식하고 팔자 좋게 사는 것이 아니꼬와서 꾸짖는, 그런 글들.
전쟁도 혁명도 쿠데타도 겪은 적이 없고, 가난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자란, 즐거움만 챙기고 이념이나 명분도 없이 반공의식도 희박하고 삼강오륜도 모르는, 그런 아이들이 너무너무 미워서 (주인석, [신세대 누구냐], Hitel 바른통신모임 게시판에서 갈무리) 떠드는 이야기들.
둘째는, 미메시스 류의 신세대론들이다. 위의 글들과는 반대로 찬양과 희망과 격려의 의미로 쓰여진 글들이다. 이들은 신세대를 찬양하고 멋대로 하라고 이야기 한다. 내용은 도발적이며 이제껏 우리가 터부시 해왔던 모든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긍정시 한다.
구세대들에게 크게 소리친다. 당신들은 신해철도, NEXT도, 서태지와 아이들도 제대로 모른다고. 알아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우리에겐 우리들 나름대로의 새로운 규칙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위해 살아갈 것이라는.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식의 판단을 내리고 싶지는 않다. 문제는, 각각의 신세대론들이 가진 장단점을 이해하여 우리가 그런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는 데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위의 두가지 신세대 론을 하나하나 차례로 점검해 보기로 하자.
2.1. 구세대의 신세대론
구세대의 신세대론을 이끄는 중책을 맡은 이는 한국 언론이다. 93년초에 신세대론이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한 이유, 미메시스의 책과 신한국의 新신드롬, 오렌지족 소동(이건 분명한 소동이다. 세상에 부유층 자제가 문제를 일으킨 것이 어디 한 번이었던가. 이 땅의 천박한 자본주의아래서 필연적으로 탄생 할 수 밖에 없는 그들을 어떤 族으로 까지 말하며 더불어 이 땅의 젊은이들을 모조리 나쁜 놈으로 몰아부칠 권리가 누구에게 있단 말인가!)을 바탕으로 이들은 줄기차게 기획이나 특집등의 형태로 신세대 론을 말하기 시작했다. 언론이 어떤 때에 신세대 론을 펼쳤는지를 살펴보면 이들이 신세대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지가 분명해 진다.
93년 연말의 신세대 유행에 힘입어 줄곧 바뀌었음을, 이제는 바뀐 세상이라고, 新을 얘기하던 그들은, 94년도 초에 오렌지 족의 프라이드 운전자 구타 사건에 이은 박한상의 부모 피살 사건이 나자 일제히 스스로의 색깔을 분명히 하며 신세대를 질타하기 시작했다. 한국일보의 연재특집 [신세대, 두고만 볼 것인가], 경향 신문의 [비틀거리는 신세대], 동아일보의 [신세대, 가치관 혼란 심하다], 서울신문의 [인성 위기 신세대]란 기획 기사들이 일제히 박한상 사건 이후에 터져나오는 것을 보면 그것은 더욱 분명해 진다.
그런데 내용을 살펴보면 어째 이상하다. 신세대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고, 오렌지 족으로 불리우는 부유한 아이들의 이야기와 도피성 해외 유학을 떠난 아이들의 이야기 밖에 없다. 그래놓고는 말한다. 신세대는 정신차려야 하고, 우리가 그들을 철저한 인성교육을 시켜서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부유층이고 해외 유학이라도 나간 사람들이란 말인가? (아이러니칼한 일이 하나 있다. 한국일보는 1990년에 이미 신세대에 대하여 특집 기사를 연재하고 그들에 관하여 두 권의 책마저 펴냈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아는가? 신세대는 정치에 관심이 많고, 남을 위해 봉사하길 좋아하며, 철학도 현실 실천적인 철학을 좋아한단다!)
이십대는 언제나 욕만 먹는다
그 밖에 신문에서 전개하는 신세대 담론들이나 신세대란 제목을 달고 나오는 기사들도 온통 천편일률적이다. 이상할 정도로. -경향 신문의 [신세대, 그들은 누구인가], 국민일보의 [신세대 그리고 X세대], 한국일보의 [대중문화에 비친 신세대]등의 기사를 보라. 우리가 몇년 전에 보았던, 요즈음 젊은이들에 대한 이야기, 그것 그대로인 것이다.
그저 이름만 젊은 무엇 무엇에서 신세대로 바뀐 것뿐이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남들의 시선을 크게 의식하지 않으며, 첨단 문명을 누린다. 효에 관한 생각도 별로 없고, 의무보다 권리를 우선시한다. 나라를 사랑하지도 않는다. 유행을 따라하고 스타를 좋아한다. 거기에 컬러 감각이나 전문직에 관한 얘기가 양념으로 조금 가미된 정도?
거기에 필수적으로, 신세대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얘기를 꼭 첨가한다. 그리고 그들은 또 이야기 한다. 이들로 하여금 소비에 따르는 생산, 권리에 따르는 의무에 충실하도록 하는 것이 기성 세대의 책임이라고 (한국일보, 94년 8월 29일자, 사설). 그래서 우리는 인성교육에 충실하고, 옛날의 좋은 전통을 되살려야 한다고 (거의 모든 신문의 신세대 관련 기사의 마지막 글을 보라! 결론은 언제나 하나로 나온다. ).
현실 사회주의권의 몰락을 계기로 역사, 가치의 극단적인 평가절하와 욕망, 일상의 극단적인 평가절상이라는 과도기의 편향이 유행처럼 휩쓸고 지나가던 시기에, 오렌지 족에 촛점이 맞추어진 철없는 신세대에 대한 논의는 마치 공허한 폐허 속의 흥미로운 눈요기감 역활을 담당했다 (강영희, [오렌지족과 신세대론의 제자리], 강영희의 문화읽기 –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주)사회평론, 1994, p210 )
결국 이들의 논의는, 다른 수많은 얘기들을 뚫고, 사람들에게, 신세대에게 스스로 그 낱말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지게 했다. 지나가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물어보라. “당신은 신세대입니까?”라고.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표시할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뒤의 설문조사 결과에서 밝히겠다. 그리고, 반대로 분명히 긍정적인 신세대론의 영향도 퍼져나가고 있음을 밝혀둔다. 아직은 미미하지만.).
그러나 다시 물어보라. “그렇다면 당신은, 구세대와 같거나 비슷하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아마 백이면 백, 모두다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우습지만, 신세대의 개념은 거부감과 동시에 강박관념도 낳았다. 매체를 보라. 온통 신세대로 뒤범벅이 되지 않았는가? 이미 중년이 된 이계진씨까지 SBS 새 토크쇼에서 신세대 아나운서의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떠들 정도로!).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인가? 신세대는 아니고, 구세대와는 틀리고. 언제까지 이런 기묘한 현상을 접해야만 하는 것일까?
오렌지족과는 다른 신세대
신세대는 오렌지족과 동일시 될 수 없다. 그리고 신세대를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수 세대인 X세대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기성의 척도로는 재어낼 수 없다는 뜻에 한정되는 것이다. 요컨데 신세대는 분명 나름의 특성과 취향을 지닌 구체적인 실체라는 말이다(강영희, 위의 신문기사 ).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이 말하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살아숨쉬는 신세대와는 다르다. 지금 언론이 말하는 것은 지배 이데올로기를 방어하기 위한 신세대 론이다. 그것이 이런 구세대의 신세대론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래서 신세대에 대해 새롭게 이해하는 척하면서, 결국엔 기존에 써먹던 말을 그대로 써놓고는, 이것이 신세대라고 말하고 있다.
2.2. 신세대의 신세대론 – 신세대, 네 멋대로 해라!
우리는 서태지의 음악을「메틀랩」이니, 「몰개성」이니,[강한 실험성」이니 하는 식으로 한정시키고자 하는 모든 노력과 싸울 뿐만 아니라 그들 비평가와 법률가와 장사꾼들의 거만한 노력이 얼마나 부질없고 헛된 노력인가를 증명 해낼 것이다.
우리는 서태지를 20세기의 가장 창조적인 아티스트의 한사람으로 추천하고자 한다. 우리는 그의 음악을「생태학적 기계사운드를 통한 창조적 이미지 예술」이라 부르기로 했다.
… 신세대를 철없는 아이들로 규정하는 관행에 반대한다.이는 신세대의 사회적인 파워와 감성적인 열정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기 때문이다.새로운 세대는 기존의 질서가 부여해온 억압에 대하여 참을 수 없는 분노를 표현하고 있다.”
1993년 8월, [신세대, 내 멋대로 해라]라는 이름의 책이 한권 나와서 기성세대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 책은 도시문화 혹은 신세대 문화를 탐구해온,스스로 신세대 필진이라고 나선 송재희씨등 이십대후반에서 삼십대초반의 젊은이 5명에 의해 집필됐다. 기성인들이나 학부모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신세대 문화를 방어적인 위치에서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기성문화에 대한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신세대문화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신세대의 다원적 삶을 가능토록한 분수령이었다고 믿는 이들은「시간표도 없이 깃발도 없이」,「아우토반위의 신기루],「코리아 아파르트 헤이트」등 10편의 글을 통해 샤론 스톤과 프리랜서, 미니스커트를 옹호하며 우드스톡 공연이 열린 60년대 록문화를 흠모했다.
또『사회적 의무감이 없다』고 질타하는 어른들을 향해서는『그것은 인민복의 미학』이라고 야유한뒤 『자유는 선과 통한다.깡통속의 살코기가 아니라 진정한 인간을 원한다』고 소리치고 있다.이 책은 매우 도전적이고 급진적이며 또한 선동적이다. 기성의 가치관-제도-사회를 비판할 때 이들은 도전적이고, 새로운 인간과 사회를 주창할 때 이 신세대 론은 급진적이며, 신세대들을 불러모을 때 이들은 선동적이다. 인간 역사 권력 자본주의등 도처에다가 이들은 논쟁점을 설치하고 있다(시사저널, [혁명성 분출하는 무서운 아이들], 1993년 8월 5일자 ).
자유는 선과 통한다. 깡통 속의 살코기가 아니라 진정한 인간을 원한다
그리고 이들의 뒤를 이어 자포니쿠스 동인의 [신세대: 우리는 즐거운 것만 아름답다 한다], 일거성 출판사의 [그대가 길이 되어 가라],[누가 뭐라든 너의 길을 가라], 이홍씨의 [정답은 없는 거야, 내 뜻대로 사는 거야]등의 일련의 신세대 관련 서적들이 꼬리를 물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의 일련의 주장들은 (별로 논할 가치가 없는 이홍씨의 책은 빼기로 한다. 그의 글은 짜집기를 한 것이며, 유행에 맞추어 출간한 흔적이 역력하다. ) 몇몇의 공통된 주장을 같이 하고 있다. 그것은 신세대는 개성과 감성의 세대이며, 지난 날의 권위주의, 형식주의들을 거부하고, 진실하고 명랑하며, 매우 합리적이고, 열심히 살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신세대의 가치관, 미학관을 자신의 것으로 하면서 글을 쓰고, 따라서 신세대에 대한 옹호는 절대적이다. 물론, 때로는 신세대가 87년도 노동자 대투쟁의 산물이라고 지나치게 비약해서 이야기 하는 면도 없지는 않지만 (미메시스, [신세대: 네 멋대로 해라], 현실문화연구, p35 ).
이들이 신세대의 특징을 구세대와 비교하여 도식화 시킨 것들은 다른 분석들에서도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성의 문화에서 감성의 문화로, 무거움의 문화에서 가벼운 문화로…등등. 그러나, 이들의 글이 다른 글들과 다른 점은, 이러한 특성들을 신세대가 가지는 저항의 한 방식으로 파악했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이들이 지적한 점들은 (천민?)자본주의적 질서와 반봉건적 의식이 결합하여 위선적인 가치관이 난무하는 우리 사회의 곪아있는 곳을 잘 드러낸다 (김수진, [미메시스의 ‘신세대, 네 멋대로 해라’에 대하여], 연세춘추 1993년 8월 23일자 ).
그러나 이들에게서도 몇가지 문제점은 여전히 드러난다.
첫번째, 이들은 명확한 저항 지점을 가지지 못해 혼돈과 혼란에 빠져있다. 저항은 있으나 막연한 불특정 다수에게 저항을 함으로써 언젠가 생존의 위협에 철들어 다시 구세대로 편입할 위험이 여전히 남겨진 것이다. 우리는 단지 어떤 속성으로부터 미래의 일을 예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지나온 과거의 세월에 대한 검토 없이 단절만을 강조함으로써 세대간의 연결 고리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두번째는 신세대를 옷차림과 같은 기호 또는 텍스트의 차원으로서만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분석이 자본의 전략을 밝혀내는 데에는 유효하지만, 수용자의 전략을 밝히는 데에는 철저히 무력하다는 것에 있다 (이범, [최근 문화분석과 신세대론의 맹점].
서울대 대학신문의 이 글과 관련하여 다음호에 고길섶씨는 반론의 입장을 나타낸다. 그것은 택스트를 ‘사회적 과정의 실천’들로 보지 않고 ‘산물’로 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련의 신세대론들이 오히려, 텍스트를 분명히 ‘산물’로써 취급한 혐의가 짙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
미메시스는 [신세대…]의 마지막을 신세대의 반란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단호하고 절대적이며 명쾌하게 옹호한다”는 말로 끝맺고 있다. 그러나 그 반란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지침은 그야말로 ‘네 멋대로 해라’일 뿐이다. ‘멋대로’ 할 수 없는 현실에서 그같은 지침은 무력하다. 사실 그들의 주장은 단호하고 열정적이지만 추상적이고 비약이 심하다. 미래는 신세대의 것이다. 신세대의 사고를 이해하지 않고선 미래를 설계할 수 없다(천호영, [운동권의 신세대 : 미메시스의 문화론], 월간 말, 1993년 10월호 ).
그렇다면, 신세대의 사고를 이해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만 할 것인가. 지금부터, 진정한 신세대의 모습에 대하여 한번 이야기 해 보기로 하자. 그리고 멋대로 할 수 없는 현실에서, 진정한 우리의 저항점은 무엇이어야 할지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2.3. 신세대는 없다?
이밖에도, 신세대는 존재하지 않는 실체란 주장도 상당히 존재한다. 93년 가을 신세대 심포지움을 준비했던 [이대 학보]의 편집국장 남은지(21, 신방과4)씨는 “신세대 기사와 심포지엄에 관심을 보인 학생들은 학회 활동을 열심히 하는 운동권 성향의 학생들 뿐이었다.”며 “또 어떤 신세대론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찬동하는 구석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임성희(서울대 사회과학대학 석사과정)씨는 사회 변화의 한 단면만을 가지고 이를 세대개념까지 도입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을 한다. 구세대의 변화는 느리고 신세대의 변화는 빠르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것이지 이 땅에 새로운 세대가 등장한 것으로 보아선 안된다는 것이다 (임성희, [신세대 논의를 보는 시각], 서울대 대학신문 1993년 9월 6일자 ).
3. 신세대 : 통계로 본 신세대의 자화상
아래 글은 “DATA BOX – 소비자군 분석 : 신세대, 광고정보 1993년 1월호, p115″를 기초로 분석한 내용이다. 조사 대상이 된 자료는 92년 전국 5대 도시권의 만 13-50세 남녀 4000명을 대상으로 실시되었던 대흥 라이프 스타일 조사의 관련항목들을 분석해서 만들어졌다.
* 글 쓸 당시 조사할 수 있는 자료가 이런 것들 밖엔 없었습니다. 인터넷이 많이 보급된 시대도 아니라서-
– 신세대의 인구구성비
먼저 신세대가 인구분포에서 차지하고 있는 인구구성비를 살펴보면, 70~79년생에 해당하는 연령층의 인구수는 약 260만 여명으로 인구층의 14.5%를 차지하고 있다. 80년의 17.2%나 85년의 15.1%에 비해서 인구구성비는 약간씩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으나, 절대 인구수가 계속 증가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그 인원수는 상당히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신세대의 구매능력
신세대는 절대적 궁핍을 벗어난 풍요로운 세대로서 충분한 구매력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한 달 사용하는 용돈은 5만원 이상이 전체 응답자의 70%를 차지하고 있으며, 월 11만원 이상의 용돈을 쓰는 비율도 37%에 이르고 있어 신세대의 경제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신세대의 라이프 스타일
생활 측면에서 신세대의 가장 큰 특징은 패션-유행에 대한 민감함과 유명 의류 브랜드 의류에 대한 선호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라이프 스타일상 캐쥬얼 스타일 의류의 비중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또한 신세대는 평소 장소나 분위기에 어울리게 옷을 입으려고 노력하며, 옷을 구입할 때는 본인에게 어울리는지를 신중하게 따지는 자기표현 시대로서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이러한 특징은 샴푸, 무스, 헤어스프레이와 같은 개성표현제품의 높은 사용 비율과 화장품의 사용 비율에서도 기성 세대에 못지 않은 높은 비율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 구매 성향 및 광고 관련 항목 동의율
신세대의 구매성향은 유명 브랜드 제품을 선호하고 세일기간을 이용해 이러한 제품을 구매하며, 물건을 살 때는 가격이나 품질 등을 꼼꼼이 따지는 신중한 구매자로서의 특징을 보여준다.
유명 브랜드 선호계층으로서 우리는 구입할 제품이 어느 회사 제품인가에 신경을 쓰며, 많이 알려진 상표일수록 더 신뢰하지만, 물건을 살 때는 이 상점 저 상점을 둘러보며 가격을 비교하고 가급적 세일 기간을 기다려 제품을 구매하는 알뜰함을 보여준다.
한편 외제품에 대해서는 외제가 국산보다 낫다고 전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나, 국산이든 외제든 질 좋은 제품을 쓰는 것이 소비자의 권리이고 수입이 개방되면 외제가 국산보다 잘 팔릴 것이라고 응답해 이들이 외제품의 품질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의 단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광고에 대해서는 광고에서 하는 말을 그대로 믿지는 않지만 광고를 하는 것 자체가 그 제품의 품질을 어느 정도 보장해 주며, 실제 제품을 구입할 때 광고에서 얻은 정보로부터 도움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 정보매체, 구매 스타일
시청각 세대로서 라디오나 신문보다는 주로 TV에서 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얻으며, TV는 또한 이들의 중요한 오락도구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구매 라이프 스타일 유형을 비교해 보면 신세대들은 브랜드 지향형의 비율이 전체 집단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나고 있다.
– 여가 활동
일이나 공부외의 여가활동에 대한 관심은 많으나, 마땅히 갈 곳이나할 일이 없다는 것이 신세대의 고민이다. 육체적-정신적으로 가장 활발하게 움직일 시기에 있는 우리는 여가활동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지만, 정작 여가 시간이 생기면 주로 TV를 보고 여가시간이 생겨도 특별히 할 일이 없다고 불평을 하기도 한다.
( 일간스포츠, X세대 그들은 누구인가. 다음 설명 참고. )
위성안테나 설치하고 싶다 : 67%
영화관람 : 1-2회 55%, 3-4회 21%, 5-9회 9%, 10회이상 4%, 1회미만 4%
도서구입빈도 : 한달 1-2권 55%
스포츠 활동은 보는 것보단 참여 : 44%
지난 겨울 스키장에 갔다왔다 : 10%
여가는 집 밖에서 : 61%
– 개인 성격과 사회관
신세대는 도전적이고 모험적이며, 과정보다는 결과지향적이다. 자기자신에 대해서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지고 있으나, 자신의 평가보다는 타인의 평가에 민감한 특징을 보인다.
물질적 가치를 중시하는 물질만능주의와 쾌락주의적인 가치관을 지니고 있으며, 사회규범에 대한 심한 혼란감을 느끼고 있다. 신세대들은 새로운것에 대한 호기심이 많고, 위험이 따르더라도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고자 하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편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 대부분은 자신이 가치있는 사람이며 남들이 하는 일은 자신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떤 일을 할 때 남들의 평가가 어떨지에 대해서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성격라이프 스타일 유형을 살펴보면 다른 연령층과 비교해 감정을 밖으로 잘 드러내지는 않지만 새로운 것에 대한 모험과 도전을 꺼리지 않는 내성적 고집형과 신중한 행동형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고, 신중하며 적극적 행동을 꺼리는 소극적 신중형의 비중이 낮게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주목할 만한 것은, 우리의 신세대들은 우리사회의 규범에 대해서 법대로 사는 사람들은 손해를 보고 정직한 사람이 성공할 수 없는 사회, 무엇이 옳고 그른지 혼란스럽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어 이들이 느끼고 있는 사회 규범에 대한 가치관의 혼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일간스포츠의 X세대 조사]
(일간스포츠의 의뢰를 받아 한국리서치에서 조사한 자료. 서울및 지방 4개 대도시에 거주하는 18-24세 사이의 남녀 1천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실시하였다. 표본은 연령, 성별, 지역에 따른 3단계 비례화를 표집법에 의해 추출돼 서울 5백명, 부산과 대구 각 1백50명, 광주 대전 각 1백명이 응답했다. 각 지역 내에서 응답자의 성별, 연령별 구성비는 실제 모집단의 분포와 일치한다. 조사기간은 지난 8월 26일에서 9월 8일까지였으며, 담당연구원에 의해 교육 받은 면접원이 해당 응답자를 일대일로 만나서 설문지를 이용해서 면접하는 일대일 개별면접 방식으로 진행됐다. ) 이 설문은 지난 94년 10월 일간스포츠에서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조사한 설문결과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 X세대의 정의
우리는 스스로 X세대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54%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남녀간의 차이는 거의 없고 18-20세의 연령층에서 61%, 21-24세의 연령층에서 48%로 나타났다. 그 특징으로 꼽은 것은 ‘개방적이고 솔직하다'(86%), ‘나만의 것을 추구한다'(85%), ‘개인주의적이고 현실적이다'(78%), ‘적극적으로 사고하고 도전한다'(68%), ‘유행보다 개성을 존중한다'(65%)등이다.
– 가치관, 관심사
X세대의 가치관은 자기만의 세계를 갖는 것과 편안함과 개방성을 추구하는 가치관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위의 설문조사 결과와 마찬가지로 규범의 혼란 상태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하고 싶은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리고'(58%),
‘자기 물건에 누가 손대는 것을 싫어하고'(72%),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하고'(76%),
‘수입보다 시간이 여유있는 직장을 선호하며'(69%),
‘좋은 직장을 위해 좋은 학점을 따놓고'(68%),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돈으로 쇼핑이나 여행을 하지만'(62%),
‘돈이면 안되는 일이 없다.'(64%)고 생각하고,
‘법을 지키면 손해인 경우가 많으며'(51%),
‘여성의 술담배는 전혀 문제가 안되지만'(70%),
‘여성차별이 여성에게 더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58%)
– 연애, 이성, 결혼관
X세대의 결혼 연애관은, 다른 분야도 그렇지만 진보와 보수가 양립하고 있는 양상을 보인다.
‘결혼배우자와의 연령차는 문제시하고 있지않으며'(79%),
‘국제결혼(74%)’, ‘성격차에 의한 이혼'(72%)에도 찬성을 한다.
그러나 ‘계약 결혼'(26%), ‘사랑과 섹스의 분리'(35%)에는 찬성할 수가 없다는 입장이다.
동성애의 경우는 66%가 반대하고 34%가 가능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고,
키스 경험은 54%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두드러졌다.
동성연애, 계약 결혼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찬성비율이 높았으며,
‘결혼을 반드시 해야하는 것이 아니다.’란 질문에 남성은 56%만, 여성은 78%가 긍정을 표시했다.
결혼을 해도 맞벌이를 하면서 아이를 갖지 않는 것엔 64%,
혼전 성관계 역시 57%가 문제시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글을 마치며
사실 이 레포트는, 크게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는 신세대론에 대한 검토, 다른 하나는 설문조사를 통해본 신세대들의 모습, 다른 하나는 경험적으로 느끼고 있는 신세대들의 모습, 그리고 거기에서 뽑아낸 신세대들의 가치관과, 실천(?)에 대한 제안입니다. 하지만… 뒷 부분은 생략합니다. 부끄럽기도 하고, 이제와 자료로 남길만한 가치는 없다고 여겨져서 입니다. 왜 부끄럽냐고 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기성 세대가 말하는 신세대를 체험하겠어!하면서 놀러다닌 결과로 보여서(…).
아무튼 여기까지입니다. 사실 신세대론은 기성 언론이 20대를 재단하기 위해, 다시 말해 학생운동에 열심이었던 이전 20대(민주화 또는 386 세대)와 갈라치기를 위해 만들어진 혐의가 짙습니다. 니네는 이제 학생운동하지 말고 소비나 해라-라는 거죠. 그렇지만 동시에, 신세대-라고 불렸던 70년대 생들의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에 의해 만들어진 담론이기도 합니다.
확실히 다르긴 달랐거든요. 그러니까 1990년대는 70년대생들에 의해 기존에 존재했던 권위적 질서가 많이 깨지던 시절입니다. 386이 권위주의를 엎기 위해 싸웠다면, 그걸 라이프 스타일로 받아들이고 깨던 것은 신세대들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이때 만들어진 문화적 질서가 지금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어찌됐든, 386과 신세대는 자신의 시대를, 또는 자신이 살아가던 시대의 아젠다를 끌어안고 만들어내던 세대였습니다. 그게 좀 얄팍하긴 하고, 또 소비문화에 침몰당하긴 했지만… 최소한 같은 세대의 롤모델은 같은 세대에서 찾을 수 있었고, 다른 세대가 눈치를 봤던 것도 사실이니까요.
386과 신세대는 정치와 문화-라는, 서로 다른 영역의 흐름을 만들어갔던 세대들입니다. 반면 지금의 세대에게 붙은 여러 이름은, 어찌보면 꽤 씁쓸하네요. 50년대에 태어나 70년대에 20대를 맞이했던, 전후세대와 차라리 비슷한 모습이랄까요. 그때나 지금이나, 오로지 생존- 또는 먹고 살기위해 삶을 저당잡히고 있는 것은 비슷하니까요. 음, 물론 다른 점도 많지만요.
하지만 지난 세대도 그 시절을 거저 먹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는 생각하고, 얘기하고, 고민하고, 그러다 결국 움직이고, 노래하고, 글을 썼지요. 예,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쓰고 또 썼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그 시대의 문화고, 희망이며, 절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글도, 그 많은 글들중 정말 쓰잘데기 없었던 글 중 하나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라도 쓰고 또 썼습니다.
우리가 누군지, 또는 내가 누군지, 정말 알고 싶었거든요. 우리 입으로 우리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래봤자 20대 후반에는 다들 “내가 뭘하면 좋은지 모르겠어” 병에 걸리긴 했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솔직히, 카렌님이 그 무렵 난 80년생이야! 하고 치고나왔을때, 우리들도 이제 다 죽었구나- 이제 진짜 새로운 세대가 시작되는 구나-하고 다들 생각했어요.
그나저나 요즘 들리는 이야기는, 이거나 저거나, 많이 답답하네요. 어차피 20대 욕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데, 다들 무기력하게 휘둘리는 기분이랄까요. 자기 세대를 긍정하는 이야기를 잘 들을 수 없는 것 같아서-
실은 그래서, 이런 쓰잘데기 없는 글을 올리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그때는 이런 머저리 같은 글이라도 쓰면서 생각하고 움직였습니다. 아마 지금 세대는 그냥 써도 아랫 글보단 훨씬 잘 쓸 수 있을 거에요. … 그러니까… 다른 분들도 하나씩 써보시면 어떨까-하구요. 생각하고 얘기하던 것들을 쓰고 모이고 움직이는 순간, 뭔가 쿵-하고 움직이기 시작하거든요.
이 글, 마음껏 비웃어 주시길 바랍니다. 솔직히 못썼습니다. 대신 비웃는 마음으로, 하나만 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미메시스가 했던 것처럼, 정치에 관심 없냐고 비웃는 사람들에게 “그건 인민복의 미학이다”라고 호되게 갈겨줄 수 있는 글 하나를. 20대 개독론을 넘어 20대가 20대를 긍정할 수 있는 마음을-
나는, 거절한다
블리치에서 오리히메가 기술을 쓸 때 내뱉는 대사지요. 어쩌면 이런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바로 20대의 힘이 아닐까요. 세상이 당연하다는 듯이 강요하는 노란색 안전선들, 그 안에만 있으면 안전하다고 속삭이는 많은 유혹들, 그것들 앞에서, 나는, 거절한다고 내뱉을 수 있는 힘.
… 쪽 팔린 글을 올리면서, 단 하나 가져보는 소원이자
… 쪽 팔린 글에 대한 변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