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에 졌을 때, 노무현은…

하드디스크에 쌓인 옛글들을 정리하다, 이젠 조금, 서글픈 자료를 하나 찾았습니다. 2000년 4월, 제 16대 총선에서 부산에 출마했던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낙선 이후 자신의 홈페이지에 남긴 소감글입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노무현 팬클럽 임시 게시판이 만들어지고, 결국 노사모가 탄생하게된 계기로 알고 있습니다.

가망 없었던 부산에서의 선거에서 떨어지고나서, 그는 어떻게 생각했는지, 먼저 한번 읽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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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감이라고요? 물론 섭섭하지요.
그러나 억울하게 귀양을 가서도 아침마다 임금이 계신 북쪽을 향하여 절을 올려야하고
임금님을 원망하거나 하는 일은 삼가야 하는 것이 충성스러운 신하의 도리라고 하니
유권자를 원망하는 이야기는 삼가해야겠지요.

다만 성실히 자신을 변명하고 직언을 드린다는 선에서 몇 말씀 드리겠습니다.
승리니 패배니 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저는 누구와도 싸운 일이 없습니다.
상대 후보와 싸운 일도 없고 부산 시민들과 싸운 일도 없습니다.
정치인이라면 당연히 추구 해야할 목표에 도전했다가 실패했을 뿐입니다.

저 역시 투표 하루 전날만 해도 선거를 승부로 생각했고 승리를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개표하는 날 저녁 심란한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링컨의 연설문을 읽는 동안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링컨은 남북전쟁의 승리를 목전에 둔 시점에서 한 취임사에서 승리니 패배니 하는
말을 단 한마디도 쓰지 않았습니다.
남부를 적으로 몰아 세우지도 않았고, 정의니 불의니 하는 말이나 선이니 악이니
하는 말로 남과 북을 갈라 치지도 않았습니다.
화해와 사랑을 이야기했습니다.

같은 성경으로 같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제각기 상대방을 응징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느 쪽의 기도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 라는 구절에서는
참으로 미국의 역사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왜 부산으로 왔느냐고 묻습니다.
다 아시는 일이라 새삼스럽습니다만 더러 오해도 있는 듯 하여 다시 말씀 드립니다.

제가 부산으로 간 이유를 말씀 드리기 전에 오해를 불러일으킬 염려가 있는 표현
몇 가지를 바로 잡았으면 합니다.

저의 부산행을 두고 민주당의 “동진”이라거나 지역감정 “돌파”를 위하여,
또는 지역감정과 “싸우러” 갔다는 표현들이 그것입니다.

지역감정이라는 것이 영남에만 있는 것이 아니니 민주당의 동진으로 해결 될 일도
아니고 정면돌파나 싸움으로 해결될 일이 아닌데 자꾸만 전투적인 용어로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지역감정 해소에 해로울 것만 같다는 것이 근래의 저의 생각입니다.

감히 말씀 드리면 저는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여 부산으로 갔습니다.
지난날 세계 여러 나라의 역사에서 정치인들이 이런 저런 이유를 내세워 집단간의
불신과 적대감을 부추겨서 벌린 일 치고 그 집단에게 불행을 가져오지 않은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훗날 역사가 오늘날 우리 나라의 상황을 그런 역사의 하나로 쓰게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정치인은 그런 역사 속에서 겪어야 할 우리 민족의 불행을 막아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부산을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90년 3당 통합당시 김 영삼 총재가 여당으로 가고 나서 저는 야당을 다시 살려 보려고
동분서주 해 보았습니다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리고 탄식을 하며 가는 곳마다 외쳤습니다.

“김영삼 총재님, 부산에는 민주주의가 필요 없습니까?
야당없는 민주주의가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그 이후 저는 부산에 야당 하나 만들어 보겠다는 일념으로 뻔히 떨어질
선거에 두 번이나 출마했고 이번에 다시 부산에 도전 한 것입니다.

이번에 부산에서 당선되면 부산에도 정당간에 서로 비판하고 견제하고 경쟁하는
민주적이고 생산적인 정치, 그리고 어느 당이 정권을 잡더라도 항시 중앙 정부와의
교섭통로가 열려 있는 정치구조를 만들어 보고 싶었습니다.

저의 낙선을 보고 이번 도전이 비현실적이고 무모한 짓이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결과야 패배로 나타났지만 투표 바로 직전까지도 여론조사는 저의 당선을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위험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위험하다고 도전하지도 않는 사람이 세상을 변하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제 홈페이지에 많은 글이 올라 와 있더군요.
대부분이 부산 시민들을 비난하는 글들이었습니다.
저 또한 부산 시민들이 야속하고 원망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외마디로
부산 시민을 비난하는 데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지역주의가 어디 부산만의 문제인가요?
지역주의가 이기주의와 편견 또는 독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 누구도 그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가짐에서 출발해야 지역주의 문제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호남에서 부산을 욕하시는 분들께 말씀 드립니다.
지금도 과거의 행적을 모두 덮어두고 김 대중 대통령 옆에 서기만 하면
무조건 지지하고 만세를 부르는 일은 없습니까?
지금이라도 제가 민주당을 떠나거나 김 대중 대통령과 맞서게 되더라도
호남에서 제가 당선될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를 걱정해 주시는 마음들이야 모두 고맙지만 마구 욕설을 퍼붓는 일은
정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하필이면 왜 우리가 그토록 미워하는 그 사람 곁에 서서 우리에게 표를 달라고
합니까?” 이런 질문도 있었습니다.
저는 이 질문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저에 대한 나름대로의 애정을 느끼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단호하게 답변하겠습니다.

왜 그토록 그를 미워하십니까?
아직도 그 분이 빨갱이라고 믿기 때문입니까?
그분이 거짓말쟁이고 권모술수를 부린다는 거지요?
김영삼씨나 이 회창씨는 그만한 거짓말을 하지 않던가요?
노태우 정권을 군정이라 규정하고 군정종식을 그토록 외쳐놓고
그 군정과 손잡은 것 보다 더 큰 거짓말이나 권모술수가 따로 있던가요?
지금도 김 대중 정권이 부산 경제 죽이기를 하고 있다고 믿고 계신가요?

우리 영남 사람들이 정권을 가지고 있을 때 광주사람들이 백주 대로에서
정권의 명령을 받은 군인들에게 총질을 당한 사실은 알고 있는지요?
지금도 서울의 잘 사는 동네는 영남사람들이 많이 살고 못사는 동네에는
호남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이유를 어떻게 이해하고 계신지요?
권력만 있으면 안되는 일이 없던 지난 수십년간 권력 근방에는 얼씬도 해 보지
못했던 그들의 한을 이해 해 주었으면 합니다.

저 역시 못마땅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만 지난 수십년간 우리 영남사람들이
그들에게 했던 일을 사죄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이해하고 도와주려고 합니다.

저의 낙선을 애석하게 생각해 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감정이 아니라 관용과 지혜로 이 난관을 극복해 나갑시다.
서로 처지를 바꾸어 한 발씩 물러서서 생각합시다.
그리고 합리적인 대안도 모색해 봅시다.

선거구 제도는 반드시 바꾸었으면 합니다.
지역구도의 해소에 그 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읽다가, 매일신문의 김정길 명예주필이란 사람이 쓴 “노무현이 천국에서 보내는 두 번째 유서” 라는 글이 생각나더군요. 참, 천박해도 그렇게 천박할 수가 없는 글이었습니다. 자기 스스로 내뱉는 말이 똥인지도 모르는 그런 사람들.

…이런 글을 쓸 줄 알았던 노짱이, 그따위 유서를 천국에서 보냈을 거라구요? 🙂

그렇지만- 김정길씨, 당신에게 화내는 일따윈 그만둘 겁니다. 길지도 않은 인생, 그런 하찮은 것에 신경쓰면서 살만큼의 여유는 없습니다. 할 일도, 해야할 일도 너무 많은 걸요. 문득, 노무현의 글에 있는 마지막이, 다시 이렇게 읽혀집니다.

“저의 떠나감을 슬퍼해주시는 애석하게 생각해 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감정이 아니라 관용과 지혜로 이 난관을 극복해 나갑시다. 서로 처지를 바꾸어 한 발씩 물러서서 생각합시다. 그리고 합리적인 대안도 모색해 봅시다.”

노짱의 죽음이후, 분노하며 슬퍼하고 있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에겐 노짱을 나쁘게 말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다같이 나쁜 놈이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뜨거운 분노만으로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리고 노짱이라면, 지금 슬퍼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틀림없이, 이렇게 덤덤하게 말했을 것만 같습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요.

분노하며 욕하기 보다, 내일을 만들어 나갑시다. 가슴은 아프지만, 차분히 식혀야만 할 땐 식혀야만 합니다. 우리는 어차피 지금을 살고 있으며, 지금을 살아야만 합니다. … 인물, 그리고 조직과 자금과 정책. 이 네 가지가 언제 어느 때나, 정치를 만들어나가는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그 가운데, 내 자신은 어디에서 무엇을 만들어나갈지, 조금 더 진지하게 고민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 노건호씨가 올렸던 글도 있는데.. 그건 나중에 올려드릴께요. 같이 올리려고 하다보니, 글이 너무 길어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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