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한 분은 내과 의사 선생님. 워낙 꼬장꼬장하셨던 분이었는데, 어느 날 폐암으로 갑자기 입원하셨다. 병실 침대에 누워서도 그 꼬장꼬장함을 결코 잃지 않으셨다. 통증 클리닉에서 척추에 진통제를 투여받으시면서도, 항상 꼿꼿하게 자세를 지키셨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마지막 한 분은 큰 이모부. 병문안을 갔다가 많이 놀랐다. 체격이 무척 좋으신 분이셨는데, 위암에 걸리신 이후 삐쩍 말라버리셨기 때문이다. 배에 복수가 가득차 힘들어 하셨는데도, 조카가 왔다고 하니 억지로 웃으며 맞아주시던 모습에 괜히 미안했다.
2. 배우 장진영을 처음 보게된 것은 영화 <반칙왕>을 통해서였다. 엄청나게 예뻤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난 그때, 분명 그녀의 모습에 반했던 것은 맞다. 씩씩한 여자-라고나 할까, 아니, 자신의 삶을 혼자 힘으로도 꾸려갈 정도는 된다-라는 부드러움 속 강인함이 엿보였다고나 할까. … 저런 여자친구 있다면 정말 좋겠다-라고 생각했을 정도니까.
…그 이후, 아라한 장풍 대작전의 윤소이를 보면서 내가 저런 스타일을 좋아하긴 하는구나…하고 깨닫긴 했지만 -_-;
물론 그 이후 영화 <소름>을 보면서 당황해하고(..영화는 좋았지만…), <국화꽃향기>를 보면서 이런 신파극에도 출연하는 구나…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오버 더 레인보우>를 보면서 처음 가졌던 생각에 확신을 더하고, <싱글즈>를 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는 이 배우를 정말 좋아한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지금, 세상을 떠나 하늘로 돌아갔다…
3. 장진영은 어떤 캐릭터를 맡아도, 그 캐릭터의 가면을 잘 써내는 배우였다. 그러니까, 어떤 그럴듯함이랄까… 배우가 도드라지는 것이 아니라, 배역과 배우가 잘 녹아나는 느낌이랄까. 비록 좋은 영화만을 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녀에겐 부드럽게 배역의 옷을 입어버리는 힘이 있었다.
정말 프로레슬러라고 해도, 살인자라고 해도, 패밀리 레스토랑의 점장이라고 해도, 술집 아가씨라고 해도, 비행사라고 해도 믿어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드는. 원래부터 그 배역의 옷을 입고 있었던 것만 같은 착각이 들게 만드는. 그런 그녀가, 이제 하늘로 돌아갔다. 영화 속에서 위암으로 한번 죽었던 그녀가, 현실에서도 위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불쌍해서, 차마 좀더 힘내라고 말도 못했는데, 얼마나 많이 아픈지 눈 앞에서 여럿 봤으니까, 차마 살아야한다고 말도 못했는데.
4. <싱글즈>의 나난-이 세상을 떠났다. 내게 장진영의 죽음은 그렇다. 솔직히 잘 믿기지는 않는다. 그런 모습, 그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을 다시 만날 수도 없을텐데. 올 한 해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떠난다. 누군가가 이제 여기까지 그만, 시즌 끝! 하고 선언이라도 하는 것 같다. 지난 10년간의 세월이 모두 강제로 정리 당하는 기분이다.
오늘 밤엔 싱글즈 DVD나 다시 한번 돌려봐야 겠다. 그 안에서는 여전히, 그 사람이 웃고 있겠지. 어디 새로운 구직정보 찾을 수 없나 컴퓨터를 두드리다 얼굴을 찡그리고, 친구 아기의 탄생을 축하하며 웃고, 하루 일과를 마치고 노곤한 얼굴로 연인의 차 안에서 잠들어 있겠지. 그러다가 씩씩한 얼굴로, 커피 한잔 마시며 다시 하루를 시작하고 있겠지….
하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자존심이 상해서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그의 슬픔이 무서워서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나는 그를 떠날 수 없는데,
내 사랑이 그렇게 약해 보이는 건
너무나 싫기 때문입니다.
그가 나 때문에 절망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 영화 <국화꽃 향기>, 1999. 11. 9 희재의 일기장 中에서
* 배우 장진영(1971~2009)씨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