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전, 내가 꿈꿨던 내 미래는-

1. 예전에 소년경향이란 잡지가 있었습니다. 그때 창간 몇주년 기념호-였던가요, 특집 기념으로 독자들의 엽서를 받는 코너가 있었습니다. 주제는 ’30년후 미래의 내 모습은?’이었는데, 그때 제가 보낸 엽서가 뽑힌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그린 내 모습은, 아마, 이랬던 것 같아요.

유전자공학 박사로, 코끼리만한 돼지를 만들어, 노벨상을 받고, 백두산 밑의 연구소에서, 인류의 미래를 구할 새로운 품종의 개발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금은 읽기만해도 얼굴이 화끈-_-하지만, 저때는 정말 저런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어요. 남자 아이들의 꿈을 물으면 열 명중 절반은 과학자였고, 다들 우리 힘으로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믿었지요. 마치, 20세기 소년들처럼.

하지만 현실은 결코 녹록하지 않는 법. 어려웠던 수학은 제 진로를 자연계에서 인문계로 바꿔버리게 만들었고, 중학교때 공고 갈거라고 해서 엉덩이를 두들겨 맞았던 소년은…(대체 왜 선생님이 30분동안 공고 가겠다고 했다고 저를 때렸는 지는, 지금도 의문입니다. -_-;) 모 대학 철학과…-_-; 로 진학하고 말았답니다.

노벨상이요? 그건 뭔가요? 먹는 건가요? 유전자 공학이요? 그게 얼마나 위험할 수도 있는지 아세요? 아니 그것보다, 그 유전자 조작 식물을 둘러싸고 얼마나 많은 회사들이 기득권을 노리며 정치공작을 벌이고 있는지, 음모와 로비와 계략이 난무하는 암흑가와 다르지 않은 그 세계의 뒷모습에 대해 상상해 보신 적 없나요? 코끼리만한 돼지요? 과연 상품성이 있을까요? 그로 인해 돼지값이 폭락하고 전세계 양돈 농민들이 피해보진 않을까요? 백두산이요? … 요즘 세상엔 맘 놓고 금강산 관광만 할 수 있어도 정말 좋겠네요.

2. 어제는 이명원 아저씨의 ‘스마트 플래너 사용법’ 특강에 다녀왔습니다. 강의를 듣는데, 대뜸 그러시더군요. 여러분들, 앞으로 사흘만 살 수 있다면 뭘하고 싶은냐? 라고- 그리곤 적어보라고 합니다. 남은 사흘동안 해야할 일을. 제가 적은 것들은, 이런 것들이네요.

  • 가족들과 여행할 것
  • 좋아하고, 맛있는 것들 찾아 먹기. 라멘이라던가, 빙수라던가, 딤섬이라던가-
  • 친구들에게 전화 연락
  • 친구들 불러모아서 신나게 파티할 것
  • 하루 정도는 그냥 늘어지게 보낼 것

한참 신나게 쓰고 났더니, 지난 한달동안 지금 적은 일들 몇 개나 했는지 세어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적은 일 가운데, 요 몇 달간 한 일이 있는 사람 손들라고 합니다. 어쩌다보니, 다 했어요~에 손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명원 아저씨께서, 저보고,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사람이라고 합니다.

에에, 그런건가요? 하고.. 놀라다가- 다죽어가는 목소리로 몇마디 덧붙입니다.

실은, 연말이라서요…(수줍)

연말이니까 친구들에게 연락도 돌리고, 가족들과 여행도 다녀왔고, 여행하다 보니 맛있는 것도 먹었고, 연말이라 친구들이랑 파티도 했네요. 아, 딱 하나 못했습니다. 하루종일 늘어지게 보내기…

3. 그러고보니 예전에, 열일곱부터 스물다섯까지-란 책에서, 자기 인생 설계도 그리라고 했을 때는, 이렇게 적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 대학 1학년때 읽었던 책 같은데요- 대학 들어가서, 군대 다녀와서, 광고회사 취직해서, 서른 조금 넘어서 독립한 다음에, 조그만 카페 하나 차려서, 죽을 때까지 그냥 저냥 글만 쓰면서 살아가고 싶다고.

뭐, 대학도 늦게 졸업하고 광고 회사는 들어간 본 적도 없고, 카페 차릴 일이야 요원하지만.. 딱 하나는 이뤘내요. 글로 먹고 사는 사람이 되어 있는 것. 그리 느긋한 인생도 아니고, 근사한 커피 향기도 맡을 일이 없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잘 살고는 있습니다. 후회하지 않으면서, 화내지 않으면서, 눈물짓지 않으면서.

4. 스무살까지만 살고싶어요-란 책이 있었어요. 예전에, 그러니까, 꽤 예전에. 민초희란 아이가 살고 있었답니다. 지금 살아있다면 나보다 몇살 더 많을 누나였겠지만, 열일곱에 세상을 떠난 사람은, 언제나 그 나이 그대로. 김창완 아저씨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꾸준히 편지를 보내오다, 다들 그 사연을 알게되고, 그래서 편지가 책으로도 묶여서 나왔던… 이야기지요.

그리고 저는, 스물을 훌쩍 넘어, 이제 언제가 스물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나이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괜히, 참, 살아있기를 잘했구나-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좋아하는 친구가 있고, 즐길 수 있는 일과 놀이가 있습니다. 외로울 때 전화하면 받아주는 친구도 있고, 이렇게, 제가 글을 쓸 블로그도 있네요.

쉬고 싶을 때 편하게 찾아가는 단골 카페도 있고, 읽고 싶어서 쌓아놓은 산더미 같은 책들도 있고, 듀얼 모니터 -_-v 컴퓨터 시스템도 있고,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도 산더미 같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살고 싶어도 더 못살았던 그 삶을, 나는 참 재미나게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살면서 이 정도면 충분하지요. 뭘 더 바랄까요. 비록 유명한 과학자는 되지 못했지만, 오히려 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니야 얼릉 결혼해서 애도 나아야 한다고 보채시지만, 그거야 사람 뜻대로 되지 않는 일 -_-; 배 곪을 일 없고, 따뜻한 방이 있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정도면 충분해요. 행복해지기에는-

…그래서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제 글을 읽어주시고, 댓글 달아주시고, 씹어주셔서(응?). 어차피 제 글의 반은 떡밥..이니;; 그 떡밥을 던져주시는 분들에게도, 무한한 감사를. 행복하지 않은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제가 고마워하고 있음은, 꼭 알아주시기를. … 몽몽이나 무명인, 수무카작바- 라고 해도 말입니다.

5. 마지막으로 오랫만에, 희야의 글을 하나 올리고 글 마치려고 합니다. 아, 희야는, 스무살까지만 살고 싶어요-의 편지 쓴 이-에요.

전부터 꿈과 음악 사이에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요.
난 아저씨나 친구들 앞에 나타나기가 겁나요.
나는 착하지 않은데 모두 날 착한 줄 아니 미안하기도 하고 남을 속이는 기분도 들고 그래요.
언니가 별이 빛나는 밤에 공개 방송을 갔다 와서 내가 그린 그림이 엉터리라고 놀린 적이 있어요.

아저씨. 내가 그린 그림이 아저씨랑 닮지는 않았지만 내 속에 있는 아저씨는 그래요.
그리고 난 내 속에 있는 아저씨가 깨질까봐 아저씨 사진 보기가 무서워요.

똑같아요.
아저씨 머릿속에 있는 희야나 친구들 마음속에 있는 희야는 참으로 이쁜 소녀일거예요.
화낼 줄 모르고 착하기만 한 아일거에요.
나는 내 속의 아저씨를 깨뜨리고 싶지 않듯 아저씨나 친구들 속의 나를 깨뜨리고 싶지 않아요.
아저씨, 이런 내 맘 이해하시죠?
아저씨, 안녕.

ps. 글씨가 낯설지요. 전 희야가 아니예요. 희야의 막내언니입니다. 희야가 힘들어 하길래 제가 대신 받아 썼습니다. 편지를 받아 쓰면서 울뻔했습니다. 막내가 많이 큰 것 같아 대견하기도 하고, 안스러워서 울뻔 했습니다. 희야에게서 라디오를 뺏은지도 여러날이 지났습니다. 돌려달라고 하지만 희야를 재워야 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제가 꿈.음을 녹음해서 낯에 듣게 합니다. 희야의 친구들을 빼앗을 권리가 제겐 없으니까요.

12月초에 희야가 엄청난 짓을 저질렀습니다.
계단에서 휠체어와 함께 굴러 떨어진 것입니다. 이유를 알고 더 놀랐습니다. 죽고 싶었답니다. 더 이상 아픔을 참을 수가 없었답니다. 얼마나 아팠으면,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그 여린 아이가 죽을려고 했을까 우리는 모두 울었습니다.

식구 걱정한다고 이빨을 꼭 물고 신음소리를 안내는 그 아인,
가끔씩 이렇게 식구들 맘을 조이게 합니다.

의사 선생님께 얼마 못산다는 얘기를 듣고는 옆 사람에게 ‘아줌마 나 죽는 데…’ 하며 희야는 웃었습니다.
그 웃음이 통곡 소리보다 더 아프게 저에게는 들렸습니다. 그때부터 아아가 커갔습니다.
생각도, 말하는 것도, 하루가 다르게 커갔습니다.

사진을 태우고, 거울을 깨고, 약을 버리고, 주사를 빼던지고 속도 많이 썩혔습니다. 하지만 희야를 미워할수도 야단칠수도 없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 들일수 없어 그러는 것을 어떻게 미워하고 야단칠 수가 있겠습니까. 울면 안된다고 하루에 열두번도 더 마음을 먹지만 저는 곧잘 어린 동생을 껴안고 소리내어 웁니다. 희야에겐 더이상 빠질 손톱도, 머리카락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김창완씨.
시간을 꺼꾸로 돌리고 싶습니다.
그 옛날 처음 희야가 다리를 절며 들어왔을때로 가고 싶습니다.
처음 병원 가던 날로 가고 싶습니다.
돈 없어서 아파 우는 아일 다시 엎고 나오던 그때라도 가고 싶습니다.
식구 모두 가슴에 옹이가 맿혔습니다.

희야는 저에게 미안하는 말을 자주합니다.
제가 고3때 희야는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저는 망설임 없이 대학을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게 희야 가슴에 생채기를 만들었나 봅니다.

희야는 그림을 잘 그립니다.
어렸을때 희야는 화가, 저는 시인이 되자고 약속했었습니다.
이젠 정말 꿈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 길어야 3개월 남았답니다.

그동안 어찌해야 작은 동생이 편안할 수 있을지
내가 어떻게 말을 해야 그 아이가 웃을 수 있을지
누군가 내게 가르쳐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약해져 있어 하루하루가 불안합니다.
그래서 큰언니 내외는 아예 집에 와 있습니다.
부산의 작은 언니와 형부는 번갈아 전화를 해서 희야를 웃게 만들어 줍니다.

김창완씨
벌서 밤이 깊었습니다.
이 편지가 나오는 날 방송은 희야에게 들려주지 않으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살아있어서 슬프고, 슬퍼서 기쁨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다들 고맙습니다. 내년에도 행복한 한 해 만들어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 2009년 마지막 날에, 자그니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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