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5월, 광주를 바라봤던 두 가지 시선

“광주는 죽음의 도시 공포의 도시가 되어 있다. 포화가 잠시 멎은 전쟁속의 고요 같은 것이 온 시가를 짓누르고 있다. 24일 하오 3시, 광주시 화정동 광주 육군 통합병원 입구에서 시가를 향해 8백미터 거리를 두고 계엄군과 과격파 난동자들이 맞서고 있는 현장을 목격했다

… 광주는 현재 외곽 사방이 계엄군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시가지는 공권력이 전혀 미치지 않는 무법지대

… 군인을 잡아 낫으로 찔러 죽이고 껍질을 벗기는 만행을 저질렀는가 하면 한국 방송은 못 믿으니 이북 방송을 들으라 권유하는 사례 그리고 사상범 등 중범이 가득한 광주교도소를 7차례나 습격하고 그 때마다 어린이, 중학생을 앞장 세운 행태등은 도저히 데모나 소요의 개념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당국의 설명이다.”

– 서울신문, 1980년 5월 25일자

“광주시를 서쪽에서 들어가는 폭 40미터짜리 도로에 화정동이라는 이름의 고개가 있다. 그 고개의 내리막 길에 바리케이트가 쳐져 있고 그 동쪽 너머에 무정부 상태의 광주가 있다. 쓰러진 전주 각목 벽돌등으로 쳐진 바리케이트 뒤에는 총을 든 난동자들이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

… 그 바리케이트를 마주보면서 6백미터쯤 떨어진 이쪽, 도로 중앙에 철조망과 함께 ‘무기회수반’이라는 글자가 쓰인 5개의 입간판이 길을 막고 있다. 바로 이곳이 총기의 반납을 기다리고 있는 당국의 전초선이다. ”

– 조선일보, 1980년 5월 25일자

예전에 한 신문 기자가 써낸 자서전 비슷한 책을 읽다가, 광주항쟁 부분에서 적힌 이야기를 보고 황당했던 적이 있다. 당시 대부분의 기자는 광주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군부의 안내를 받아, 계엄군이 머물고 있는 곳에서, 군부의 해설을 들으며 받아적었던 것이 전부였다.

…그런 사람들이 저런 기사를 써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비슷한 시간에, 광주에 머물고 있던 독일 기자가 있었다.

21일 계엄군이 광주에서 퇴각한 이후 독일 본사와 한국취재를 의논했고, 5월 25일(일요일) 일본에서 부산을 거쳐 화순으로 가서 자전거를 빌려타고, 광주에는 26일 도착했다.

…도청 앞에는 아마 군인들에게서 빼앗은 것으로 추정되는 많은 군차량이 있었다. 도청주변은 전혀 혼란스럽지 않았다. 질서정연했고, 조용했다. 도청 안으로 들어갈 때 1차 계엄군 진입시도 때 죽은 신원미확인의 주검을 담은 13개의 나무관이 있었다. 도청 맞은편의 상무관에 는 60개 관이 흰색천이나 태극기에 뒤덮여 있었다.

상무관에서 본 광경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한 젊은이가 관 앞에 주저앉아 “여기 내 동생이 죽어 있다. 어떻게 한국 군인이 같은 한국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라고 비통하게 절규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가족 전체가 죽임을 당한 3개의 관(부모와 7살 소년)이 있었다. 가족이 몰살당했기에 울어줄 사람도 없었지만, 누군가가 갖다 놓은 하얀 국화꽃만 조용히 놓여 있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날 그곳에서 본 장면은 내 평생 잊지 못하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내가 9살 때 2차대전 막바지를 경험했는데, 그때 독일 한 도시의 기차역에 죽어 널브러져 어린이를 포함한 주검들을 보았을 때 받았던 충격과 함께 광주에서 그 장면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다.

한겨레_“동족을 총칼로… 충격적이었다”

우리가 우리를 죽였다. 우리가 우리를 죽이도록 명령한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가 우리를 죽이는 것을 방관한 사람들이 있었다. 지독하게도, 뭐가 어떻게 되었던 것인지는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잊자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일이 있었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모습을 가진 사람들이 눈이 멀었을 때, 우리가 아닌 타인이 우리를 기록하고 있었다. 위에 나온 독일 기자만이 아니라, 많은 타인들이 기록하고 있었다. 그 기록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우리를 제대로 마주보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도 우리를 들여다보지 못하고, 남의 눈을 빌려야만 한다.
뭔가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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