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있습니다
“No True Hero Is Born From Lies.”
딸기잼의 법칙이란 것이 있다. ‘컨설팅의 비밀’의 저자 제럴드 와인버그가 농담처럼 주장하는 법칙으로, 내용은 아주 간단하다. (잼을 빵 위에) 넓게 바르면 바를수록 더 얇게 발라진다(The wider you spread it, the thinner it gets). ‘여러 업무를 경험해본 신입사원’이나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디자인’ 같은 건 없다는 말이다.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사람은 자주 이런 모순된 욕망을 품는다. 얼핏 보면 철없는 욕망 같지만, 그 안에는 선택은 해도 결과는 책임지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이 숨어있다.
영화 원더우먼 1984 오프닝에서, 어린 다이애나(릴리 아스펠 분)가 편법을 써서라도 이기고 싶었던 마음도 비슷하다. 실수하긴 했지만, 아마존 최고의 전사로 인정받고 싶다는. 그 마음은 엄격한 스승이었던 안티오페(로빈 라이트 분)에게 걸렸다.
억울해하는 어린 다이애나에게, 그녀가 일갈을 날린다. 진짜 영웅은 거짓에서 탄생하지 않는다고. 속임수를 쓰는 사람이 진정한 전사가 될 수 있을 리 없다. 영화 원더우먼 1984는, 그렇게 핵심 주제를 처음부터 내리꽂으며 시작한다.
1984년, 워크맨이 유행하던 시절
그리고 시간이 흘러, 1984년이 됐다. 그사이 원더우먼은 인간 세상에 나왔고, 제1차 세계 대전을 겪었으며,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아픔도 겪었다. 모진 세상사를 뒤로 하고 오래 잘 버텨왔다. 보이는 곳에선 박물관 직원으로 일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선 시민의 영웅으로 활약한다. 위기에 빠진 시민을 돕고, 나쁜 일을 하려는 악당을 퇴치한다. 평소에 슈퍼 히어로가 하는 일은 항상 비슷하다. 친절한 자경단, 친절한 민간 경비다.
하는 일은 2021년과 다르지 않은데, 배경은 달라 보인다. 당연히 1984년엔 누구도 스마트폰을 들고 있지 않다. 걸으면서 전화하는 사람도 없다. 뉴스를 알기 위해선 TV나 신문을 봐야만 하고, 마스크를 쓴 사람도 없다. 원더우먼이 처음에 구한, 조깅을 하는 여성은 귀에 유선 헤드폰을 끼고 있다.
사용하는 기기는 당시 큰 인기를 끌고 있던, 최초의 휴대용 오디오 플레이어 워크맨이다. 1979년에 처음 출시된 이 제품은, 우리 삶에 3가지 영향을 끼쳤다. 하나, 걸으면서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됐다. 둘, 혼자서 조용히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됐다. 셋, 녹음 매체로 주로 쓰이던 카세트테이프를 음악 감상 매체로 쓰게 됐다.
… 교통사고 위험도 조금 커졌지만.
간단히 말해, 워크맨은 개인주의를 처음 실현한 전자기기다. 물론 그전에, 디지털 레코딩 기술과 반도체 기술 발달로 작은 휴대용 기기를 만들 수 있게 되었기에 생긴 변화다.
기술로 가능해지면, 발상의 전환도 가능해진다. 오늘날엔 노래를 디지털 파일로 변환시키는 작업에 그치지 않고, 그걸 압축하고, 압축한 내용을 온라인으로 스트리밍 해서 듣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시대까지 왔다. 카세트 같은 물리적 재생 매체도 필요 없다. 반도체 계열 저장 매체(SSD 등)는 테라바이트 단위로 살 수도 있다.
1984년에도 컴퓨터가 있었다(?).
1984년을 보여주는 기기가 워크맨만 있는 건 아니다. 80년대는 디지털 게임과 개인용 컴퓨터, 카세트테이프와 비디오테이프 같은 자기 매체, 컬러 TV(+롤러스케이트!)가 세상을 사로잡았던 시대다. 예를 들어 원더우먼이 도둑질하려던 악당을 잡은 쇼핑몰 안에는 오락실이 있었다. 1984년은 전자오락이 붐을 이뤘다가 꺼져가던 시기로, 오락실은 지금으로 따지면 피시방 같은 존재였다.
1985년에 개봉한 영화 ‘구니스’ 오프닝에서도 나오고, 넷플릭스의 게임 프로그래머 드라마(?) ‘블랙 미러:밴더 스내치’ 배경도 1984년이다. 당시엔 게임 소프트웨어 하나가 기판 하나였다. 주로 쓰인 CPU는 속도가 3.54 MHz인 Z80. 성능은 보잘것없지만, 그 시절 오락기는 하나하나 그 게임을 위해 만든 전용 컴퓨터였던 셈이다.
… 참고로 테트리스도 1984년에 만들어졌다.
범용 컴퓨터는 없었을까? 세 장소에서는 확실하게 컴퓨터가 놓여있다.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회사 사무실과 나중에 치타라는 적이 되는 박물관 동료, 바바라 미네르바(크리스틴 위그 분)와 알고 보면 빌런인 사이먼 스태그의 사무실이다.
바바라의 사무실에 놓인 컴퓨터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 듯하다. 코모도어 PET이라는 기종으로, 8032SK 또는 8096SK 모델로 보인다. 1980년에 출시된 컴퓨터로, CPU는 1 MHz 속도를 가진 MOS 6502를 사용한다. 메모리는 32KB다. 화면에 보이는 건 당시 쓰이던 PC 통신 게시판(BBS)으로 짐작된다.
소원을 이뤄주는 돌(드림스톤)을 찾는 바람에 세계를 핵전쟁 위기에 빠트리게 되는 맥스웰 로드(페드로 파스칼 분)의 사업 투자자, 사이먼 스태그(올리버 코튼 분)의 사무실에도 잠깐 등장한다. 같은 PET 시리즈이긴 하지만, 1977년에 출시된 코모도어 PET 2001이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최초의 PC라고 볼 수 있다.
옆에 놓인 휴대용 컴퓨터는 TRS-80 모델 100이란 제품으로, 1983년에 출시된 신상(?)이다. 계산기처럼 보이지만, 당시 출시가가 1,099달러, 현재 가치로 2,821달러(약 312만 원) 정도 한다. Oki 80C85 CPU를 써서, 속도가 2.46 MHz 정도로 빨랐다.
… 참고로 2017년에 출시된 카카오 미니 AI 스피커에 들어간 램이 1GB(=1,048,576KB)이고, 프로세서 속도는 1.4 GHz(=1,434 MHz)다. 당근 마켓에서 중고로 25,000원 정도에 거래된다. 지난 40년간 반도체 가격은 정말 미친 듯이 싸졌다.
중간중간 보이는 사무실에 놓인 PC와 드림스톤에 소원을 빌어 성공한 맥스웰 로드 사무실에 놓인 PC는 1981년 IBM에서 출시한 개인용 컴퓨터(이름이 정말 IBM Personal Computer다), 또는 83년에 출시된 개선판 IBM PC XT다. 사무용 컴퓨터 시장을 쓸어 담았던 제품으로, 1983년에만 75만 대 이상을 판매했다. CPU는 4.77 MHz 속도를 가진 인텔 8080이며, 2개의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버가 장착됐다.
아, 영화에선 주로 화이트 화면이 나오고, 맥스웰 로드가 전 세계 방송을 해킹한 다음엔 컬러 화면이 나오기도 하지만, 영화적 허용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당시에 주로 쓰이던 모니터는 그린 컬러 단색 모니터였고, 당연히 컬러 화면을 절대 표현할 수 없다.
못난이 컴퓨터처럼 보이지만, 저 컴퓨터로도 할 건 다 했다. PC 통신을 즐겼고, 채팅도 했고, 게임도 하고, 엑셀 같은 계산 프로그램으로도 많이 썼다. 데이터베이스 작업을 하기도 하고, 당연히 프로그래밍도 했다. 그림을 그리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추가 부품을 장착하면 음악 작업을 하거나 컬러 그래픽도 볼 수 있었다.
잘 쓰고 못 쓰는 차이가 있었지, 컴퓨터의 쓰임새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당시에는 저런 못난 컴퓨터마저, 마법사처럼 여겼다. 음,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흔하게 볼 수 있는 제품은 아니었지만.
기술은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가
맥스웰 로드는 자신이 가진 능력이 남의 소원을 이뤄주면서, 대신 그 사람에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져올 수 있는 능력이란 걸 깨닫게 된다. 그걸 알게 되자, 미 대통령을 만나 그가 원하는 핵무기를 주고, 대신 그가 가진 영향력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 거기서 끝나면 좋았을 텐데, 미국이 비밀리에 추진하던 인공위성을 이용한 전 세계 방송 해킹 시스템을 보게 되고, 그 시스템을 이용해 자신의 능력을 세계 상대로 써먹겠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이런 시스템은 없다. 지구 위 모든 TV 주파수를 해킹해 방송을 보낼 수도 없고, 전파 수신도 네트워크 연결도 안 되는 모니터에까지 영상을 내보낼 수는 더더욱 없다. 다만 에셜론 프로젝트라고 해서, 이론적으로 세계의 모든 통신을 감청할 수 있는 시스템은 존재한다.
‘21세기에는 우주여행을 할 줄 알았는데 현실은 트위터에서 덕질중’이라는 친구의 말처럼, 기술은 크고 대단한 걸 약속하지만 현실은 별 볼 일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럼 기술은 아무것도 아닐까. 꼭 그렇지는 않다.
원더우먼 1984를 보면 쇼핑몰 오프닝 씬에서 에어로빅 시연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982년에 발매된 ‘제인 폰다의 워크아웃’ 이란 에어로빅 비디오가 크게 인기를 끌면서, 미국 사회에 에어로빅 붐이 불었기 때문이다. 적으로 나오는 치타가, 쫄쫄이 옷을 입고 헬스장에 가서 운동하는 모습도 나온다.
… 왜 저럴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건 나름, 그 시대에선 혁명적인 거였다.
여자는 ‘운동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시절(80년대 초 미국), 미국 배우 제인 폰다는 촬영을 하다가 다친다. 나중에 재활훈련 겸해서 에어로빅을 배웠는데, 그게 너무 좋았다. 너무 좋아서 유명 여배우가 에어로빅 강사로 직접 활동했다.
그 얘기를 듣고 에어로빅 루틴을 가르치는 비디오를 찍자는 제안이 들어온다. 수많은 사람이 매일 아침 자기가 쫄쫄이(…) 옷을 입고 운동하는 모습을 보는 게 싫었지만, 더 많은 사람이 에어로빅을 하길 원했던 제인 폰다는 비디오를 찍었고(원래는 내레이션만 할 생각이었다고), 그게 미국 비디오 시장 최초의 킬러 콘텐츠가 됐다. 전미에 에어로빅 바람이 불었다.
제인 폰다, 에어로빅, 비디오테이프는, 그렇게 80년대 미국을 조금 바꿨다.
워크맨과 마찬가지로, 제인 폰다의 에어로빅 비디오는 세 가지 영향을 끼쳤다.
하나, 비디오 콘텐츠 시장을 만들었다. 당시 비디오카세트 레코더(VCR)는 일부 사람들이 TV를 녹화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영화 속 원더우먼도 그런 용도로 썼고. 제인 폰다의 워크아웃은 그 시장에 등장한 킬러 콘텐츠였다. 비디오테이프 플레이어가 더 많이 팔린 건 당연하고.
둘, 여성은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을 뒤집었다(이때까지 헬스장은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셋, 우리가 지금 홈트레이닝이라고 부르는 걸 처음 확립했다.
기술이 세상을 바꾸지는 않는다. 다만 기술이 발전하면 발상의 전환이 가능해지고, 생각을 바꾸면 세상에 영향을 끼칠 무언가가 태어난다.
중요한 것은 진실이다. 처음 만들어진 워크맨은 녹음 기능이 삭제된 녹음기였다(진짜입니다). 제인 폰다는 자신이 레오타드를 입고 운동하는 모습을 불특정 다수가 매일 아침 보길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걸으면서 음악을 듣고 싶었고, 더 많은 여성이 운동하길 원했다.
누가 그런 걸 쓰겠어? 누가 이런 걸 보겠어?라고 생각했지만, 수많은 사람이 워크맨을 쓰고, 미국에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운동 열풍이 불었다.
원더우먼의 최종 전투에서, 맥스웰 로드는 TV를 통해 세상을 속이려고 한다. 왕이 되고 싶어? 만들어줄게. 저 나라가 망했으면 좋겠어? 망하게 해 줄게. 책임질 수 없는 가짜 욕망이 낳은 결과는 대혼란이다. 정말 세계 멸망 직전까지 다가갔다.
이에 맞서 원더우먼은, 당신은 오직 진실만 가질 수 있으며, 그거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진실이란 사람이 정말로 원하는 건 무엇인지, 아니 우리 자신이 정말 원하는 건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면 좋겠다는 무책임한 욕망이 아니라, 가능한 기술적 영역 안에서, 정말 원하는 것 하나를 찾는 힘.
진짜, 그거 하나면 세상을 바꾸기에 충분하다(라고 소심하게 주장해 본다.). 편하게 전화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휴대폰을 만들어냈고, 아무 데서나 인터넷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스마트폰을 만들어 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