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 ‘천황’ 호칭 사용에 대한 간단한 입장 정리

1. 최근 있었던 이명박 대통령의 인터뷰에서, 일본왕을 ‘천황’이라 부른 것에 대해 트위터에서 조금 논란이 있었다. 기왕 생각난 김에 이에 대한 입장을 한번 정리해본다. 우선 일본왕에 대한 외교적 공식 호칭은 ‘천황’이 맞다. “천황이란 호칭은 일본의 고유 명사이므로 그대로 불러준다“는 현 정부의 입장은 별다르게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법적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_-;

그렇지만 여전히 찜찜함은 남는다. 분명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도 다들 ‘천황’이라 불렀던 것이 맞다. 하지만 그들이 한국땅에서 ‘천황’이라고 말한적이 있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다. 이는 다른 우익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DJ가 1989년, 히로히토 전 일왕이 죽었을 때 조문을 간 것을 보고 두고두고 깠던 그들이 아닌가.

2. 천황은 하늘이 내린 황제라는 뜻이다. 일본이 제2차세계대전 패전이후, 천황 스스로 자신의 신격을 부정한 지금에야 별다른 의미가 없긴 하지만… 일본 우익들에게 있어선 아직도, 천황은 신이다. 그들은 여전히 “일본은 천조(天祖)이래 신에 의해 통치되고 그 황은(皇恩)을 입은 뛰어난 민족“이라는 신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신화가 구현된 것이 1889년에 만들어졌다가 1947년에 사라진 “대일본제국헌법”이다. 이 법의 내용을 조금 옮겨보자면 다음과 같다.

  • 제1장 제1조 –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한다.
  • 제1장 제3조 – 천황은 신성(神聖)하며 그 권위를 침범해서는 안된다.
  • 제1장 제4조 – 천황은 나라의 원수로서 통치권을 총람한다.
그리고 이 “대일본제국헌법”의 내용은, 일본의 근대적 기본 권력체계를 완성하고, ‘교육에 관한 칙어’등을 통해 일본인들에게 교육되어, 지금까지 그들의 내면에 어느 정도 내재화되어 있는 것으로 여기는 학자들이 많다.

3. 천황과 그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천황제가 지금의 일본, 그중에서도 일본의 악덕을 구성하는 기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중 대표적인 사람이 최근 나온 <천황제 코드>를 쓴 한국일본학회의 조용래 선생이다. <교착된 사상의 현대사>를 펴낸 일본 가나가와 대학의 윤건차 교수도 마찬가지고, 보수적으로 분류되는 세명대 김필동 교수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보기에 천황제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우선 국가주의의 확립과 국가에 대한 비판자들의 폭력적 거세. 다시말해 일본만의 우월성에 대한 배타적 주장. 둘째, 천황제 국가 성립으로 인한 이단에 대한 탄압. 다시 말해 조선족, 아이누족등 다른 민족에 대한 배타적 억압과 멸시. 셋째, 이로 인한 타국에 대한 공격과 지배의 정당화.

… 여기에 전후 미군정이 천황을 무죄방면(?)하면서, 일본은 결국 무책임 국가나 다를바 없는 나라가 되었다.

4. 일본이 조선을 강제병합하는 이론적 배경을 제공해준 ‘정한론’도, 실은 이 천황 호칭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실제로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 조선에 파견한 사신이 거부당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 거부 사유가 외교 문서에 ‘천황’이나 ‘봉칙’같은 무례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성환, 전쟁국가 일본, p14)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용어’는 곧 ‘관계’를 의미한다. 북한이 2005년 6자회담에서 미국 힐 차관보의 김정일에 대한 ‘Chairman’ 호칭에 마음이 움직였던 것도, 바로 공식적인 상대로 인정함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조선은 일본이 요구하는 관계변화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이에 대해 분개한 사이고 다카모리등이 조선 정벌(정한론)을 주장했던 것이다. … 결국 그들이 반란자로 몰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5. 결국 이 천황이란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서 입장은 갈린다. 역사적 사실, 그리고 천황제란 제도와 맞물려보는 사람들에게 천황은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주게 하는 말이다. 이를 단순히 의례적 호칭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상대에 대해 예의상 하는 표현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서승 교토자유대학 부학장이 이명박의 “일본왕을 초청하고 싶다”라는 발언에 “과거를 모두 잊어버리자는 얘기냐“라며 분개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그가 보기에 일왕의 방한은, 사과와 반성이 없는 상태에서 사과와 반성을 할 이유마저 지워버리는 행동이다.

반면 좀더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만들어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제와서 애써 그때와 연결지어 천황이란 호칭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은 무리다. 어차피 일본은 한국에게 있어서 수출 3위, 수입 2위의 국가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과거를 빨리 매듭짓고,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같이 움직이는 일이다.

6.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에게는 항상 신중한 처신이 요구된다. 공식적으로야 어떻게 부르든, 한국땅에서 한국말로 하는 인터뷰였다면 그저 일본왕-이라고만 칭해도 좋았을 것이다. 어차피 교도 통신의 기자나 통역은 알아서 천황으로 번역할 것을. 그 이름으로 부르는 것에 분개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천황이란 호칭을 사용했다는 것은, 또 다른 메세지를 지닌다.

그러니까, 천황이라고 굳이 계속 부르는 것에대는 다른 속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

과거에 대한 정리도 중요하겠지만(?), 어서 빨리 과거를 마무리하고, 경제적 유대 관계를 돈독히 하자는. MB의 머릿속엔 이미 한-일 FTA를 통한 시장 통합까지 들어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미적미적 거리는 일본왕의 메세지도 분명하다. 그러니까 내가 방한하기를 원하면, 허리를 구부리지 않아도 되는 모양새를 만들어달라는.

…그러니까 양쪽 모두, 일왕의 방한이 곧 한 시대(?)가 끝났음을 의미하는 이벤트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는 훌훌~ 털어버리고 함께 만들어가는 밝은 미래만 보라고 강요할. … 그렇게까지 해서 뭐를 받고 싶은지는 아직 이야기하긴 섵부르지만, 과연 그러는 것이 정말 우리를 위한 길일까?

이 대통령 연합뉴스.교도통신 공동 인터뷰
(서울=연합뉴스) 조보희 기자 = 이명박 대통령이 15일 청와대에서 연합뉴스, 일본 교도통신과 공동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09.9.15

7. 뭐가 정답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어차피 미래는 점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분명, 주의해야 할 것은 주의하고 넘어가야한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대통령 개인의 ‘성과’ 차원에서 다뤄질 문제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수 학자인 김필중 교수의 글을 인용하며 마치려고 한다.

우리는 일본인들의 생각이 우리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않으면 우리는 엄청난 고통을 치르며 경험한 역사의 교훈을 또다시 허무하게 날려버릴지도 모른다.

(일본왕을 한국으로 초청하여) 아시아에서 유일한 미방문지인 한국방문을 실현시킴으로써 역사의 아픔을 청산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과연 불행했던 한때를 깨끗이 청산하고 진정한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구축을 위한 대승적 차원의 발로인지, 아니면 (한국 대통령) 개인의 치적을 역사에 기록하기 위한 사랑방 차원의 발로인지는 머지않아 역사가 엄정하게 평가할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천황 방한의 문제를 향후에도 국민적 합의 없이 치적에 급급하는 정권적 차원에서 접근하여 실현시키는 우를 범한다면, 무모한 ‘햇볕정책’이 초래한 후유증과 같은 것을 우리 사회는 또 다시 경험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의 구축에도 결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 김필중, <일본의 정체성>, 살림, p60~61

* 사실 이 문제, 보수 진영에서 먼저 문제제기 할 줄 알았다. 아니, 최소한 국가 주의자들이라도 당연히 문제제기 할 줄 알았다. 1945년 이후에 만들어진 대한민국만 ‘우리나라’가 아니라면, 한반도에서 살아왔던 민족의 역사가 바로 ‘우리의 역사’라면, (그들의 입장에서) 이 땅이 유린 당한 때가 ‘한국 전쟁’만이 아니라 ‘강제병합’ 시절이 훨씬 더 길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런데 일명 ‘보수 매체’에서는 대통령의 천황 호명을 옹호하는 칼럼만 내뱉는다. 미래지향적 관계를 만들기 위해선, 일본왕은 적절한 표현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번 깨닫는다. 이 나라에선 민족주의마저도 좌파나 중도로 분류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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