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조] 리영희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1. 리영희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뵌 것은 작년 12월이었다. 김진애 의원의 출판 기념회에 참석했는데, 리영희 선생님이 오셨다. 나도 모르게 일어나 선생님께 인사를 드렸다. 그 분이 날 알아보실 일도 없건만, 내겐 언제나 선생님이신 탓이다. … 사실 너무 오랫만에, 그것도 갑작스레 뵙는 거라 놀란 탓도 있었다.

▲ 김진애 의원 출판 기념회에서, 리영희 선생님

2. 선생님의 강의를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십 몇 년 전이었던 것 같다. 정년퇴임이셨던가, 아니면 다른 이유였던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아무튼 당분간 강의를 하지 않는다고 하셨고, 그 때문에 학생들이 마지막(?) 강의를 듣겠다고 선생님을 모셨다. 그 넓은 강당에서, 선생님은, 멋적은듯 웃으시며… 자신이 살아왔던 삶에 대해, 조근조근 얘기해주셨다.

…사실, 강의가 재밌었다고는 말 못하겠다. 그닥 재미있게 강의를 하시거나, 그런 분은 아니셨다. 마치 할아버지에게, 할아버지가 살아왔던 옛날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달까. 그래도 기억나는 것은 하나 있다. 자신은 이북 출신이라서 박정희 정권 시절, 그나마 좀 자유로웠다고. 정권에 반대하던 사람들은 다 빨갱이로 몰아가던 시절, 자신은 이북에서 넘어온 사람이라서 그런 혐의를 씌우기 어려웠다고.

…물론 알고 있다. 당시 북한에 친척이라도 있는 사람들이었다면, 얼마나 마음 졸이고 살아야 하는 시대였는지.

3. 그런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1929년생이시니 호상이라고 부를 법도 하건만, 아쉽다. 평안북도에서 월남, 6.25 전쟁 당시 국군 장교, 합동통신, 조선일보 기자. 반공법에 의해 세차례 옥살이. 1999년까지 한양대학교 교수. 일제시대-한국전쟁-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까지, 선생님의 인생은 한국 현대사와 그대로 겹쳐, 본의 아니게 행적만 거론해도 드라마틱해진다.

4. 선생님의 글은 어렵지는 않지만, 읽기 편한 글은 아니다. 선동가도, 달변가도 아닌 탓이다. 전반적으로 문체는 건조한 편에 가깝고, 수많은 자료를 들이미는 글이 많았다. 딱 옛날 문체라고 해야하나. 그리고 그것이 선생님의 강점이자 약점이었다. 근거로 설득하는 일은 감정으로 우리 편을 만드는 일에 비해 수십배는 더 어렵다.

…그런 탓에, 솔직히 우리 세대, 선생님에게 손자뻘이나 되는 우리세대중에는, 선생님의 글을 읽어본 친구를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들이밀어진 진실은, 감정적인 호소보다 강하다. 이제까지 알고 있던 세계가, 다른 증거에 의해 무너지게 되면, 한 사람의 생각은 그 전과는 달라지게 된다.

어쩌면 7-80년대 선생님의 글이 가진 힘은 그런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다른 세계의 문을 열어젖혀준 사람.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준 사람. 그 힘이 어떤 것이었는지, 솔직히 나는 잘 모른다. 어찌 알 수 있을까.

5. 안녕히 가세요. 리영희 선생님. 요 2년간 너무 많은 작별 인사를 합니다. 그래도 가시는 길을 모른 척 할 수는 없어 이렇게 인사드립니다. 참 험난한 세월을, 사람답게 살아오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괜히 제가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았습니다.

… 이제 편히 쉬세요,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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