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지선 아나운서의 자살과 SNS 리스크

1. 작년 12월 태국에서 한 여성이 자신의 자살 모습을 웹캠으로 중계해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이와는 조금 다르지만, 미국에선 자신의 룸메이트의 동성애 현장을 트위터에 올려 결국 룸메이트가 자살에 이르게 만든 일도 일어났다. 영국의 한 축구 선수는 자신의 사생활과 관련된 기사가 언론에 실리지 못하도록하는 법원의 판결을 받아냈으나, 이에 항의하는 트위터 이용자들이 그의 실명을 공개해 버리자, 아예 자신에 대한 글을 쓴 이용자들의 이름과 이메일 주소, IP를 공개해 달라는 소송을 다시 제기하기도 했다.

이런 일들은 이제 낯설지 않다. 많을 경우 한 개인이 10여개의 SNS 서비스를 이용하는 세상에서, 이제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어떤 비밀이 폭로되는 것은 이제 일상적인 일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 폭로로 인해 다시 어떤 사건이 일어난다. 폭로는 사건을 낳고 사건은 다시 폭로를 불러일으킨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을만큼, 이제 SNS 안에서는 정신없는(또는 정신나간) 일들로 가득하다.

그게 나쁜가? 모르겠다. 그건 쉽게 말하기 어렵다. 항상 그렇듯, 모든 변화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을 함께 가지고 온다. 때론 누군가의 자살을 막기도 하고, 때론 누군가에게 진심어린 위로가 되어주기도 한다. 정말 화내고 싶은 일들을 이슈화시켜서 해결할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한다. 다만 지금까진 그 양면이 함께 조명되지 못했다. 과장되게 좋은 점만이 부각됐던 것은 사실이다.

2. 송지선 아나운서가 자살했다. 어찌 그래는 지는 알 수 없는 문제이니 말하지 않기로 하자. 다만 예전에 올린 글을 보면서 한 친구가 트위터에 그리 적었었다. 이 사람 참 힘들고 외로울 것 같다고. 많이 위험한 상태라고. 누가 보살펴줘야 한다고. 아니, 애시당초 송지선 아나운서가 트위터나 미니 홈피에 그런 글들을 적어올린 것이 그런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음 둘 곳이 없어서. 마음을 맡길만한 곳, 들어줄 사람 하나가 없어서.

하지만 세상이 그리 만만할까. 오히려 그녀는 자기가 사랑했던 일을 잃었고, 연애하고 있다고 고백했던 상대에게 그런 적 없다는 대답을 남의 입을 통해 들었다. 그리고 서른살 생일을 닷새 남겨두고,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물론 이번 일을 SNS의 문제로 몰고가는 것에는 반대한다. 이번 일은 위에서 예로 들었던 사건들과는 조금 다르다. 태국 여성이야 복수할 마음으로 자살을 생중계 했다지만, 다른 사람들은 스스로의 의지에 반하는 정보들이 SNS를 통해 유출되었다. 그것이 그들을 곤경으로 몰고 갔다. 반면 송지선 아나운서는 스스로 문제가 된 글들을 올렸다.

하지만 결국, 스스로 올렸건 그렇지 않았건, 본인들이 원하지 않는 형태로 답장이 돌아온 것만큼은 분명하다.

3. 우리가 SNS를 이용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반응을 얻고 싶어서다. 내가 아-라고 하면 누군가가 어-라고 대답해 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악플보다 무서운 것이 무플이란 말이 괜히 나왔겠는가. 그리고 기왕이면, 그 반응에서 얻고 싶어하는 것은 동감과 칭찬이다. 어느 누구인들 싫은 소리를 듣고 싶어할까.

많은 연예인들이 SNS- 다시 말해 트위터나 페이스북,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이용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이런 서비스들은 그들에게 있어선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채널이다. 엄청난 유명인이야 팬카페나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서 소통해도 그만이지만, 아직 슈퍼스타가 되지 못한 연예인들에겐, 이렇게 사람들과 만나서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채널 하나하나가 매우 소중하다.

16년이나 음악을 해왔다지만, 김연우가 ‘나가수’에 나오지 않았다면 그를 못 알아볼 사람이 99%쯤 되는 이 세상에서(임재범이나 김범수라고 다르지 않다. 심지어 진중권 선생님조차 시사 문제에 관심없는 사람들에겐 듣보잡이다.), 자신을 알리고 자신에게 들어올 일이 끊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채널을 통해 자기자신을 발신해가며,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감을 증명해야만 한다.

하지만 채널은 언제나 들어주는 ‘타인’을 상정하는 법. 그리고… 사람은, 생각보다 훨씬 잔인하다. 그 사람들이 어떤 익명 속에 존재하고 있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자신이 그렇게 한풀이하듯 써내려 간(혹은 다른 사람이 송지선 아나운서인척-하고 써내려 간), 글이 그렇게 순식간에 퍼날리지며 사람들의 노리개감이 될 줄, 그녀는 차마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 드러난 진실에 마주친 세상이, 그리 쉽게 그녀를 내쳐버릴 것이라고도.

4.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는, 그래서 한편으론 굉장히 무서운 존재이기도 하다. 이니스의 구분대로라면 지나칠 정도로 공간 편향(Space bias media)적인 이 매체는, 재미를 느낀다면 순식간에 정보를 수많은 곳에 퍼트려버린다. 그런 면에서 단순히 ‘사생활 침해 문제’ 정도로만 생각했던 소셜 네트워크 리스크는, 다시 한번 곰곰히 되새겨봐야할 더 큰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해, 당신이라고, 또는 나라고 송지선 아나운서가 겪었던 것과 같은 일을 겪지 말란 법은 없다.

익명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양심이나 죄의식 같은 것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소셜 네트워크에 올린 어떤 이야기가, 순식간에 당신을 ‘비웃음거리’로 전락시키게 될 지도 모른다. 의외로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예전엔 연예인들이나 겪어야 했을 압박감을 겪어야만 하고, 지금도 겪고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제는 누가 ‘내 사생할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아니다. 정확한 문제는 ‘우리가 알려지길 원하지 않는 것들이 퍼진다’는 것이 문제고, 실질적으로 그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알 권리’ 또는 ‘표현의 자유’와도 분명히 부딪히는 면이 있다.

어찌할 것인가? 법으로 규제할 것인가? 그것으로 과연 해결이 될까? 유감이지만 법적 규제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그게 그리 쉬운 일이었으면 지금쯤 고소고발..이 남발(하고 있긴 하다)하는 아름다운 세상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 수록 정보는 더 퍼져나간다. 그게 사람 마음이다.

그렇다면, 현재로서 생각나는 방법은 딱 두 가지다. 하나는 ‘쓸데없는 정보를 인터넷에 올리지 말라’라는 것. 강의 때도 가끔 하는 이야기지만, 애인 사진을 인터넷에 올리는 것은 바보짓이다-라는 것과 같은 이야기. 그리고 다른 하나는, ‘비난하라’는 것이다. 그런 메세지와, 그런 정보를 퍼다나르는 사람들을.

…그런 정보를 퍼다나르는 사람조차 ‘관심받고, 칭찬받고’ 싶어서 그런 일을 하기 때문이다.

* 하나 더 덧붙이자면, ‘조심하라’가 있습니다. 인터넷은 아직 충분한 인간의 얼굴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 故 송지선 아나운서의 명복을 빕니다.

* 몇몇 분들 블로그에서, 예전 송지선 아나운서의 글을 캡춰 형태로 공개하고 계신데요.. 이 마당에, 굳이 계속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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