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한 밤, 무심한 이야기

동생을 공항에 데려다 주러 가는데, 아침부터 길이 막힌다. 막힐 이유가 없어 살펴보니 사고가 났다. 사람은 무사한 듯 한데, 차는 많이 망가졌다. 1월 1일부터 안 좋은 것을 본다고 툴툴댄다. 동생을 바래다주고 돌아오는데, 후배에게 문자가 왔다. 새해 인사인가 싶어 무심히 넘겼는데, 다시 보니 오랜만에 보는 선배의 이름이 적혀있다.

…J형이, 세상을 떠났다.

어젯밤 한미 FTA 반대 집회에 다녀오던 길, 타고 있던 승합차가 다른 차와 부딪혔다고 한다. 다른 사람은 모두 무사했는데, 그 형만 튕겨져 나와 보도 블럭에 머리를 부딪혔다. 그렇게 J형이 세상을 떠났다.

인연이었다면 인연이었겠지만, 굳이 따지자면 나와는 악연인 사람이었다. 좋게 말하면 심지가 곧은 사람이었고, 나쁘게 말하자면 결론을 정해놓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대화하기가 힘들었던 사람. 대화만 힘들었다면 다행이었을까. 우린 사사건건 부딪혔고, 결국 그 형은 함께 있던 모임에서 대표였던 나를 쫓아내도록 선동했다. … 말로 옮기기 힘들 만큼, 넌덜머리났던 시간들.

거기서 끝날 인연이었으면 다행이었을 텐데, 오지랍이 넓은 탓에 그 형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 지를 숱하게 들어야만 했고, 본의 아니게 뒷자리에서 변명을 해줘야만 했다. 나와 함께 있었던 사람, 내 선배였다는 이유로. 참, 이런 고약한 인연도 다 있구나-하고 생각하게 만들어 줬던 사람. 그런데 그 사람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보이지 않게 계속 마주쳤던 우리 인연도 끝났다.

지금 저 곳에는, 내 고등학교 선배와 대학교 선배가 함께 누워있다. 한 사람은 갑작스레 영웅이 되어 버린 느낌이고, 비슷하지만 정 반대편에 있었던 한 사람은 이름없이 조용히 세상을 등졌다. 그릇의 크기가 같지는 않겠지만, 나는 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운이 좋아 바르게 오래 살았을 뿐이고, 누군가는 재수 없어 이르게 세상을 떴을 뿐이다. 야박한 세상이지만, 숱하게 사그러진 이름이 어디 그 하나만은 아닐게다. 수많은 감자바위들의 눈물이 모여 오늘이 됐을게고, 그 눈물속에 피었던 꽃들이 있었을 뿐이다. 세상이 꽃만 기억한다고 한들, 그 감자바위들의 눈물이 어디로 사라질까.

화요일, 같은 날에 선배와 선배는 작별 인사를 마치고 먼 곳으로 떠난다. 언젠간 나도 그곳으로 떠나간다. 그날이 먼 훗날이 될 지, 내일이 될 지도 모르면서 우리는 살아간다. 두 해전 만남이 마지막인줄 알았다면, 그리 야박하게 당신에게 말하진 말 것을 그랬다. 어쩌겠는가. 이승에 있는 동안 끌어안고 살아야할 내 짐이다.

다시 만난다면, 그때 미안하다 말하겠다. 당신도 내게, 미안하다 한 마디 해주면 고맙겠지만, 바라진 않는다. 아니 어쩌면 다시 볼 수 없을 지도 모르겠다. 이대로 영 이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이 말만은 해야겠다. 당신이 떠나가서 쓸쓸하다. 별로 곱지 않은 사람이었건만, 그렇게 갑작스럽게 가서, 더 쓸쓸하다.

참,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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