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런 말을 자주 들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던 사람도 “응? 뭔가 그런 점이 있긴 있나?”하고 생각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평범한 사람이라, 우리 주변의 모든 것에 대해 확인하고 정의 내리며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면 피곤해서 어찌 살겠어요. 우리는 우리 주변 사람들이 “그렇다”라고 믿는 것을 대충 “그러려니”하고 믿으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것들도, 여러 번 자주 듣다 보면 헷갈리기 쉽습니다. 때론 “뭔가 이유가 있겠지?”하고 생각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사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노리는 것도 그런 것입니다. 사람들이 상식으로 믿고 있는 것을 흔들어,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판을 바꾸는 것. 농담이 아닙니다. 독일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유태인 대량 학살은 없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직까지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런데 진짜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의 인식을 뒤집으려는 시도는 생각보다 많이, 숱하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라면 차라리 낫겠지만, 실은 사건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따라 각자의 이익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럴 땐 말하는 사람이 만들어 놓은 ‘생각의 틀’ 바깥에서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베 총리의 주장에 대해 정말 침략에 대한 정의는 정해져 있느냐 아니냐, 이런 쪽으로 논쟁이 빠지면 상대방이 미리 짜놓은 ‘생각의 틀거리’에 갇힐 뿐입니다. 이번엔 이런 말장난에 쇄기를 박은 사람이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일본 총리였습니다. “무력으로 적국에 들어가면 그것이 침략이다”라는 상식적인 말에, 아베 총리가 짜놓은 프레임은 무력하게 부서지게 됩니다.
… 정말로 세상엔, 이런 상식적인 한 마디가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말장난을 좋아하는 사람들, 그래서 자신의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거든요.
2. 최근 SNL코리아는 높아진 인기 만큼이나 여러가지 홍역을 치루고 있는 중입니다. 유명세라면 기분좋게 치루면 그만이지만, 가끔 너무 엉뚱한 트집잡기나 딴지가 이어질 때는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 이번에 방통위가 ‘유사 보도’에 대해 실태 조사를 하겠다는 것을 보면서 그런 단어를 처음 알게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것이 문제가 된 것을 그동안 거의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냐구요? 여기서 SNL코리아를 보면서 이게 ‘뉴스’나 ‘보도’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하신 분, 계신가요? 누구나 알고 있듯, SNL코리아는 코미디 프로그램입니다. SNL코리아가 그 바깥으로 나가본 적도 없고, 나간다고 한들 사람들이 그렇게 여겨주지도 않을 겁니다. 예를 들어 SNL코리아가 갑자기 미쳐서 김슬기나 안영미를 국회에 취재하라고 보낸다고 한들, 사람들이 그걸 코미디라고 볼까요, 뉴스 취재라고 여길까요?
물론 여기서 나올 반박은 대충 짐작이 갑니다.
- 나라마다 방송법은 다르고, 보도를 할 수 있는 채널을 제한한 것은 이유가 있다
- 보도를 잘못하면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보도 채널은 별도 통제가 필요하다.
- 일반 프로그램 제작사들은 그런 통제도 받지 않으면서 보도를 하려고 한다
- 이제까지 그에 대해 명확한 결정을 내릴 수 없으니 이번에 세부 기준을 만들어 통제하려고 하는 것이 뭐가 나쁘냐
그리고 예전 같았으면 이런 주장에 대해
- 보도에 대한 법적 규정을 확인하고
- 그런 규정들이 지금까지 어떻게 적용되어 왔는지를 따지며
- SNL코리아가 보도 프로그램인지 아닌지 고민해 보고
- SNL코리아에 그런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맞는지 아닌지 주장
했을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 엉뚱해요. SNL코리아보다 더 웃깁니다. 누가봐도 코미디 프로그램인 것을 가지고 정치적인 소재를 다뤘다고 유사보도니 아니니 따지는 것은, 지상파와 종편을 제외하면 아예 정치적 소재를 다루지 말란 말과 같아집니다. 그래서 그냥 이렇게 말합니다. SNL코리아는 그냥 코미디 프로그램입니다. 끝. 자꾸 보도 프로그램인양 말하지 말아주세요.
3. 어쩌면 이런 논란은 SNL코리아가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미 예정되어 있었는 지도 모릅니다. SNL코리아는 그동한 한국사회에 금기시 되어 있던 “정치”와 “성”이란 문제를 가장 돌직구로 다루고 있는 코미디 프로그램이기 때문입니다. SNL코리아의 힘은 가장 힘이 쎄고 금기시하는 것들을 겨냥한 풍자와 해학에 있습니다. 풍자를 통한 웃음은 금기시 되어 있는 것들을 비틀고 배반할 때 생깁니다. 예를 들어 이번에 경질된 윤창중 전 대변인을 연상시키는 에피소드가 이미 미국 SNL에서는 다뤄졌습니다(그것도 한글자막까지 입혀서!).
하지만 영화 <왕의 남자>에서도 나오듯, 권력은 언제나 이런 풍자와 조롱을 싫어합니다. 자신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진실은 … 이런 풍자를 통해 평판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떨어진 평판이 풍자를 통해 드러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조사를 하는 입장에서야 프로그램을 통제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법이 적용되지 않았던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바로 잡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하겠지만요.
성숙한 민주사회라면 이런 풍자는 당연하고 자연스럽습니다. 심지어 보호받기까지 합니다. 이런 표현의 자유를 통해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민주적 과정을 증진하고 정부를 견제할 수 있으며, 그 속에서 더 좋은 사회가 될 수 있다는 사회적 합의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사족이지만,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헤이트 스피치 유형의 표현은 보호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범죄로 취급되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 이젠 옛날에 만든 잣대로 규제하기엔 시장과 시대의 흐름이 완전히 변해버린 상태입니다.
여기서 이 사건의 뒷 이야기는 굳이 추측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것이 아닌 바에야, 갑작스럽게 실태조사를 나선다라는 것은 한참 성장하고 있는 창작자들의 창작 의지를 꺽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건 앞으로, 창작자들에게 실질적인 내적 검열 장치로 작동하게 될 것입니다. 80년대와 하나 다를 바 없는, 그렇게 알아서 기어야 하는 고통속으로. 만약 지금 현실과 법이 동떨어져 있다면, 법을 현실에 맞게 고치거나 아니면 세부적인 기준안을 먼저 마련한 다음 앞으론 이 법을 지키라고 하거나, 그것이 맞는 것이 아닐까요?
다시 한 번 말합니다. SNL코리아는 코미디 프로그램입니다. ‘막돼먹은 영애씨’가 다큐 형식으로 찍었다고 해서 다큐멘터리가 아닌 것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