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승리‘라는 작품이 있다. 16세기 피터르 브뤼헐이 그린 그림으로, 인간 세상이 끝장날 때는 마치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되는 풍경을 그렸다. 중세 아포칼립스라고 해야할까. 시장에서 물건을 팔던 사람, 친구들과 식사를 하던 사람, 싸우는 군인, 화려하게 차려입은 귀족, 사랑을 노래하는 연인, 그저 길을 걷던 사람 모두 죽었거나, 죽음을 앞두고 있다.
살아있는 것에 예외는 없다. 직업도 성별도 피부색도 차별하지 않는다. 나무는 베이고, 물고기는 뭍에 끌어 올려진다. 그들을 마지막으로 이끄는 이는 수많은 백골이다. 죽어 사라진 자에 의해 살아있는 모두가 종말을 맞이한다. 이 그림을 둘러싼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모두 동의하는 의미는 하나다. 메멘토 모리. 기억하렴,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 나도, 당신도 그리고 디지털 네트워크도.
한때는 영원할 줄 알았다.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스미스 요원처럼, 디지털이 영구불멸의 상징이었던 때가 있다. 디지털 콘텐츠는 어차피 실체가 없는 비트 덩어리. 그러니 무한 복제가 가능하고, 시작과 끝이 있는 아날로그 매체와는 달리 영원히 남을 수 있다는 믿음이다.
우리는 디지털이 어떤 ‘물적인’ 기반 위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적 기반과 디지털 정보는 서로 다른 것이라, 그저 잠시 거쳐 가는 장소 정도로만 여겼다. 인터넷이 등장한 이후 그 믿음은 더욱 깊어졌다. ‘Know What’이 아니라 ‘Know Where’을 알아야 한다고 목놓아 외치던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2018년 11월에 일어난 KT 아현 화재 사고는 그런 생각이 얼마나 안이했는지 말해준다. 기껏해야 0과 1로 표현되는 신호에 불과한 비트는, 생각보다 훨씬 깊이, 현실 세계에 기반하고 있었다. 개별 콘텐츠야 다르다고 해도, 비트 자체는 물적 기반 없인 단 한 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몰랐다고 이야기하긴 어렵다. 대부분 기록 매체 손상으로 인해 소중한/소중하지 않은 자료를 잃어버린 경험이 있다. 네트워크는 다를 거라 가볍게 믿었을 뿐이다. 그걸 누가 상상할 수 있었을까. 다행이지만, 우리나라는 한국 전쟁 이후 사회 기반 시설이 무너질 만큼 큰 변화를 겪은 적이 없다. 통신 시설에 이상이 발생해도 곧 복구됐다. 그런 믿음을 가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믿음은 단번에 무너졌다. 화재 사고는 서울 마포/ 은평/ 서대문/ 중구/ 용산 일대에 사는 사람을 순식간에 둘로 나눠 버렸다. 인터넷을 쓸 수 있는 사람과 쓸 수 없는 사람으로. 결합상품을 이용해 KT 인터넷과 스마트폰, IPTV, 인터넷전화를 쓰는 사용자들은 사실상 인터넷에 아예 접속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신용카드 결제 등에 이용되는 부가가치망과 PC방 등에 들어가는 인터넷 전용회선, 유선전화망까지 함께 끊기는 바람에 KT 이용자가 아닌 사람들도 어려움을 겪었다. 마치 전쟁이라도 난 듯, 주말을 맞아 놀러나온 사람들은 정보를 얻지 못해 헤매고, 사람과 연락이 끊기고, 결제를 할 수 없어 돈을 쓸 수 없었다. 우리는 생각 이상으로, 네트워크에 크게 의지하고 있었다.
… 누군가의 말대로, 이제 디지털 네트워크와 스마트 기기는 형태만 다른 신체다. 우리는 뇌를 쓰듯 스마트 기기에서 정보를 찾고, 정보를 저장한다. 잠깐 기억하면 그만인 것은 이제 스마트 기기에 맡겨 버린다.
수많은 스마트 비지니스도 네트워크에 기반하고 있다. 캐시리스 매장을 만들 수 있는 것도, 자동화 기기에 음식 주문을 맡기는 일도, 택시를 부르고/ 집을 빌리고/ 게임을 즐기고/ 뉴스와 웹툰을 읽고/ 음악을 듣고/ 전자상거래까지 모두 네트워크를 쓴다. 그저 통신구에 불이 났을 뿐인데, 세상이 망가진 느낌을 받았던 이유다. 옛날과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메멘토 모리. 디지털의 죽음은 생각보다 훨씬 더 쉽다. 비트 자체가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수많은 SF 영화에서 디지털 자아가 자신을 보관할 현실 개체를 찾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하는 이유도, 죽음에서 도망치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겪지 않은 이들은 곧 잊겠지만, 그 자리에 있던 이는 앞으로도 신경을 쓰게 된다.
어쩌면 좋을까. 현금이라도 들고 다닐까? 그래야 한다. 일본이 캐시리스 사회로 가지 않는 이유다. 그들은 항상 지진과 화재를 대비한다. 비상시엔 라디오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2018년 출시된 스마트폰은 라디오 수신 기능을 (드디어) 풀어놓은 경우가 많으니, 한번 확인해 봐도 좋겠다. 비상시 연락할 수 있는 전화 번호 한 두 개는 외워두자. 꼭 필요한 자료는 폰이나 PC에 저장해 두는게 좋다. 해외 여행 할 때처럼 화면 캡처를 해두거나 에버노트 같은 메모앱을 활용하면 된다.
맞다. 디지털 기술을 통해 점점 편해질수록, 여행자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보다 편리한 세상은, 보다 불안한 세상이란 말과 그리 다르지 않으니까. 메멘토 모리. 그리고 카르페 디엠(응?).
* 2018년 KT 아현 화재 사고를 보고 썼던 글입니다. 백업 차원에서 옮겨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