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이 스마트폰에 들어오기까지 – 다사다난했던 한글 기계화의 역사

알파벳의 역사에서 아마 가장 주목해야 할 유례 없는 성과는, 한국에서 1443년 조선의 왕 세종이 한국인을 위해서 알파벳을 고안하라는 칙령을 내렸을 때 이룩되었다……. 어떤 언어에 알파벳을 적용하는 데에는 일반적으로 몇 년이나 몇 세대가 걸린다. 세종이 모아들인 학자들은 앞서 준비 기간을 거치기는 했지만, 한국식 알파벳을 3년 만에 완성했다. 그 성과는 매우 훌륭한 것이어서 조선어의 음운체계에 거의 완전하게 적합하였고, 한자로 쓰인 텍스트의 외양과 유사하게 알파벳의 스크립트를 쓸 수 있도록 아름답게 도안 되었다.

– 월터 J 옹, 구술 문화와 문자 문화, p143

한글은 세계 문자 역사에서 굉장히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누가 만들었고 언제 만들었는 지가 알려져 있으며, 어떤 원리로 만들었는지도 안다. 인류가 사용하는 언어 가운데 이런 내용이 명확히 밝혀져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게다가 한글은 일반 국민에게 글을 알려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인류 역사에서 이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문자는 찾기 어렵다.

이렇듯 매우 뛰어난 문자지만, 컴퓨터 시대에 적용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언어의 기계화가 대부분 로마자 알파벳을 사용하는 나라에서 시작한 탓에, 그들이 만든 기계에서 한글을 쓰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한글이 풀어 쓰는 문자가 아니라 모아 쓰는 문자라서 그렇다. 로마자 알파벳 문화에서는 한 위치에 한 글자만 쓰면 된다. 한글은 초성+중성+종성이 모여야 한 글자가 된다. 게다가 모아 쓰는 과정에서 글자 모양이 조금씩 계속 바뀐다. 이런 차이 때문에 요즘 스마트폰 해외 직구를 하는 것처럼, 해외에서 만들어진 기계를 가져다 한글화해서 쓸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지만, 옛날에는 그냥 한글을 버리고 로마자를 가져다 표기 하자거나, 한글을 풀어 쓰자는 주장을 진지하게 하기도 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한글 기계화의 역사를 지금부터 간략하게 살펴보자.

 

▲ 한글 네벌식 타자기

 

 

타자기와 한글 기계화

 

아이러니하지만, 한글을 깊게 연구하기 시작한 때는 일제 강점기다. 일제에 맞서 민족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일이었다. 이로 인해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나는 등 많은 탄압을 받았지만, 해방 이후 우리말에 관한 관심이 더 높아질 수 있었다.

한글 기계화가 처음 연구된 것도 백여 년 전 이때다. 첫 번째 한글 타자기는 1914년 재미 교포 이원익이 개발했다. 해외에서 널리 쓰이는 타자기를 고쳐 만든 것으로, 글씨를 옆으로 돌려 찍은 다음 꺼내보면 세로쓰기로 쓰인 한글을 볼 수 있다.

지금도 가끔 볼 수 있는 ‘두벌식’, ‘세벌식’ 같은 ‘벌식’의 개념이 생긴 것도 이때다. 이원익 타자기는 자음과 모음을 쓰임새에 따라 다섯 종류로 나눠, 다섯벌식 타자기를 만들었다. 1929년 송기주가 만든 한글 타자기는 네벌식이다.

 

▲ 이원익 타자기로 쓴 글

 

상용화된 한글 타자기는 1948년 공병우가 만든 세벌식 한글 타자기부터다. 초중종성을 나눠 찍었기에 글자가 네모반듯하진 않았지만, 빠르게 한글을 입력할 수 있어서 한국 전쟁 당시 군대에서부터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다만 형식을 중시하는 공무원 사회나 한자를 많이 썼던 민간 업무에선 잘 쓰이지 않았다. 이때만 해도 배우기는 힘들지만, 글자가 좀 더 깨끗하게 나왔던 김동훈의 다섯 벌씩 타자기와 세벌식 타자기가 경쟁 관계였다.

반전은 1969년 일어난다(1968년 10월부터 한글전용 촉진 정책을 시행했기에 한자는 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시 과학기술처에서 일방적으로 새로운 네벌식 자판을 타자기 표준 자판으로 정하면서, 타자기의 주요 구매처였던 공공 기관이 모두 네벌식 타자기만 쓰기 시작했다. 결국, 공병우식 타자기를 제외하면 70년대에는 네벌식 타자기만 남았다.

 

▲ 공병우 세벌식 타자기로 쓴 글

 

두벌식과 세벌식, 조합형과 완성형

 

네벌식 타자기의 세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1983년 정부에서 표준 자판을 지금까지 쓰는 한글 키보드 자판과 비슷한 두벌식 자판으로 바꿨기 때문이다. 컴퓨터 보급과 더불어 여러 기기에서 사용되던 입력 장치의 자판을 통일하려는 조치였다.

이 방식은 컴퓨터에선 큰 문제가 없지만, 기계식 타자기에선 손에 무리를 주는 일이 많아, 기계식 타자기가 빨리 사장 되는데 일조하게 된다. 세벌식은 컴퓨터 시대에도 살아남았지만, 일단 시장은 대부분 두벌식 자판으로 정리됐다.

 

▲ 타자 학원의 타자 수강생 모습 / 국가기록원

 

컴퓨터 도입으로 인해 자판 문제는 어느 정도 정리됐지만, 한글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세상은 쉽게 오지 않았다. PC 역시 서양 알파벳 문화에서 만들어진 기기이기에 한글을 쓰기 어려웠다. 한글을 처리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가 부족했던 탓이다. 삼보 보석글 같은 초기 한글 워드프로세서나 한글 도깨비 같은 램상주 프로그램에 의존해야 겨우 한글을 쓸 수 있었다.

 

▲ 보석글 실행화면

 

한글을 쓸 수 있게 된 다음에는 그걸 어떤 원리로 표현해야 하는가를 두고 ‘조합형’과 ‘완성형’ 논쟁이 일어나게 된다. 당시 정부는 1987년에 완성형을 국가 표준으로 정했지만, 이는 한글 구성 원리와는 다른, 미리 모든 글자를 만들어 놓고 불러오는 활판 인쇄와 다를 바 없는 방식이라 꽤 많은 이의 반발을 불러왔다. 게다가 ‘쓩’이나 ‘똠방각하’, ‘펲시맨’ 같은 몇몇 글자는 아예 쓸 수가 없었다.

당시 크게 인기를 얻은 ‘아래아한글’ 같은 워드프로세서는 이런 이유로 내부 한글을 조합형으로 처리했다. 초중종성을 조합해 한글을 표기하는 방식으로, 표기할 수 없는 글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윈도 이전 DOS를 사용하던 시절에는 대부분 조합형으로 한글을 표현했다고 봐도 좋다. 덕분에 1992년에는 조합형 한글 코드 역시 국가 표준이 되었다.

 

▲ 아래아한글 워드 실행 화면

 

MS, 조합형과 완성형 논쟁을 종결하다.

당시 실질적인 표준처럼 여겨진 조합형 한글이었지만, 몇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가장 큰 것은 국제 호환성 문제로, 완성형은 ISO 2022 규격을 따르고 있었지만, 조합형 한글은 그렇지 못했다.

홀로 쓰이던 PC에서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네트워크와 연결되고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진 사람이 소통하기 시작하면 이런 부분은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게다가 국가 행정 전산망에서는 완성형 표준 한글밖에 쓸 수 없었다.

 

 

결국 마이크로소프트는 기존 프로그램 및 데이터와의 호환성을 유지하면서 완성형에서 쓸 수 없는 한글 표현을 지원하기 위해, 윈도 95와 함께 확장 완성형이라 불리는 한글 코드를 선보이게 된다.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이때부터 컴퓨터 프로그램들은 자체적으로 한글을 탑재하지 않고 한글 처리는 운영체제에 맡기게 됐으므로, 확장 완성형은 사실상 표준이 됐다. 이후 표준 문자 전산 처리 방식이면서 완성형과 조합형을 모두 포함한 유니코드가 윈도 XP부터 기본 문자 처리 방식으로 채택되면서 조합형-완성형 논쟁은 사라지게 됐다.

휴대폰 한글 삼국지

 

윈도로 인해 사라진 것처럼 보인 완성형 한글 표준이었지만, 당시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곳에서 살아남았다. 90년대 말부터 휴대폰이 보급되기 시작하고, 98년부터 한글 문자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휴대전화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휴대전화들은 사양이 낮았기에 완성형 한글을 탑재했다.

한글로 문자 메시지를 보낼 수 있게 되면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PC와는 달리 휴대전화는 숫자 자판 중심인데, 숫자 자판을 이용한 한글 입력을 고민한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이 때문에 초기 휴대전화에 달린 한글 자판은 영어권에서 쓰던 자판 입력 방식을 단순히 한글로 바꿔놓은 것과 다르지 않았다.

 

초기 모토로라 휴대폰 한글자판

 

당연히 많은 사람이 불편해 했고, 새로운 입력 방식에 관한 연구가 다양하게 이뤄졌다. 예전과는 다르게 휴대전화 한글 자판은 일방적인 승자가 없다. 입력 방식이 어떤 휴대전화를 샀는가에 묶여있기 때문이다. 가장 많이 쓰이는 방식은 가장 많이 팔린 휴대폰과 같다. 게다가 장단점이 뚜렷하다.

 

삼성 휴대전화에 채택된 ▲ 천지인 방식은 한글 창제 원리를 모음에 응용했다. 키가 적고 바로 이해할 수 있어 배우기가 쉽지만, 긴 문장을 치려면 입력을 여러 번 반복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LG전자 스마트폰에서 많이 쓰던 ▲ KT 나랏글(EZ 한글) 방식은 다른 방식에 비교해 적은 입력으로 글을 쓸 수 있지만, 처음 접하는 사람은 배우기가 다른 방식에 비교해 조금 어렵다.

 

 

 

▲ 스카이 방식은 빠르게 입력할 수 있고 배우기가 어렵지 않다. 다만 손가락을 많이 움직여야 해서 상대적으로 피곤하다.

 

 

스마트폰이 연 한글 춘추전국시대

 

휴대폰에서 끝날 줄 알았던 한글 입력은 스마트폰 시대를 맞아 다시 변했다. 먼저 컴퓨터 자판을 닮은 쿼티(qwerty) 자판이 일반적인 입력 형태가 됐다. 원래 영문 입력에는 쿼티 자판이 훨씬 편하고 빠르다. 다만 한글 입력은 예전 휴대전화 방식이 빠르고, 쉽고, 정확하다. 쿼티 키보드만 지원하던 아이폰을 한글 입력이 불편하다고 쓰지 않는 사람도 꽤 있었다(이 문제는 iOS8 버전부터 해결됐다.).

그래서일까? 2011년, 정부에서 스마트폰 한글 입력 방식을 표준화하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천지인/나랏글/스카이 모두 복수 표준이 됐다(이때 일반 휴대폰 표준 입력 방식은 천지인으로 정해졌다.).

 

 

특허권이 무료화되고 복수 표준이 정해졌지만, 지금 스마트폰 한글 입력 방식은 한둘이 아니다. 스마트폰 키보드는 소프트웨어 방식이라, 개발자가 생각했던 다양한 방식을 쉽게 구현하고, 이용자도 쉽게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두벌식을 간략하게 만든 구글 단모음 한글 키보드, 자판을 드래그하는 방식으로 쓰는 딩굴 키보드 등도 많이 쓰이는 대안 한글 입력 방식이다. 글자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그어서 글자를 만든 스와이프 방식도 있지만, 한글 입력 시에는 잘 쓰이지 않는다. 많이 쓰이진 않지만, 세벌식 자판을 구현한 앱도 있다.

 

 

앞서 말했듯이 컴퓨터는 로마자 알파벳 문화권에서 만들어진 하드웨어다, 이 때문에 비 로마자 알파벳 문화권에선 자국 글자를 이용하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도 자국어를 변환 없이 그대로 입력하는 나라는 그리 많지 않다. 일본과 중국은 알파벳으로 발음을 입력하고 다시 일본어나 중국어로 바꾸는 방법을 많이 쓴다.

굳이 다른 나라와 비교해 우리글이 좋다는 얘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언어에 효율성을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문화에 맞게 기술은 진화한다. 다만 우리글을 지키려는 노력과 그에 기반을 둔 논쟁이 예전보다 훨씬 편하게 한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앞으로 VR 환경과 음성 인식이 중요해질 환경에서도 이런 노력은 계속 이어지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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