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일입니다. 꽤 추운 날이었습니다. 연말이라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와 밤새워 놀다, 그 친구를 바래다주려고 터미널에서 밤을 새운 적이 있습니다.
딱히 그 친구와 밤새워 놀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살사바에서 춤을 추다 나가려는 저를, 그때 마침 느지막이 들어왔던 친구가 붙잡았을 뿐이죠. 자기 이제 서울 왔다고, 놀아달라고.
그렇게 춤을 추고, 밥을 먹고, 택시를 타고 터미널에 도착해 첫 차를 기다리며 이런저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다 푸념인 듯, 툭, 그렇게 말했어요.
“이런 나를 누가 이해해 주겠어?”
사는 게 그다지 재미없었던 시절. 안 좋은 일과 안 좋은 일이 계속 겹쳐서, 세상이 나 보고 더 살지 말라고 하나보다- 생각하던 그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친구가 대답합니다.
“내가”
예상치 못한 대답에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던 나는, 어이없게도 그 새벽, 내 인생을 용서받은 기분이었습니다. 당신의 그 짧은 대답에, 내 안에 있던 어떤 것이 녹아 버렸습니다.
… 그런 당신과 나는, 왜 이어지지 못했을까요.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봤습니다. 오래전 극장에서 봤던 영화입니다. 2005년 12월이네요. 눈이 오는 날에 봤어요. 식사하고 영화를 보고 나서, 신이 나서 같이 사진을 찍으며 돌아다녔던 기억. 당신은 나를, 나는 당신을. 그 영화를 오랜만에, 다시 봅니다.
… 못 보겠네요.
다시 보기가 이렇게 힘든 영화는 처음입니다. 자꾸 다른 감정이 살아나서, 영화를 보다가 멈추고, 영화를 보다가 멈추게 됩니다. 하, 정말 힘들었어요. 분명히 같은 영화인데, 같은 영화가 아닙니다.
2005년 12월의 그 영화와 2022년 12월에 넷플릭스로 보는 ‘이터널 선샤인’은, 그냥 다른 영화 같습니다. 아아 이래서, 영화 속 주인공들도 서로를 지우고 싶었던 건가 보네요. 예, 아시겠지만, 이 영화는 ‘특정 인물’ 기억 삭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서로 이유는 다르겠지만, 보통 잊고 싶은 사람, 그러니까 구 남친이나 구 여친이 되겠죠. 방법은 간단합니다. 추억이 담긴 물건을 가지고 오면, 뇌 스캔을 통해 그 물건을 볼 때 느끼는 감정이 뇌 어디에 있는지를 찾습니다.
나중에 집에서 잘 때, 기억 삭제 기업의 직원들이 방문해, 미리 작성된 뇌 지도에 따라 기억을 삭제합니다. 당신이 아침에 잠에서 깰 때,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을 잊은 상태로 자연스럽게 새 출발 할 수 있게 말이죠.
공드리 감독이 나중에 실토한 바에 따르면, 이렇게 ‘추억이 담긴 물건을 내다 버리는 것’이 되게 전형적인 표현인 것 같아서 맘에 들진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영화 편집 기간에 자기도 여친과 헤어지게 되고, 그 여친 물건을 포장해 보내면서 주인공 마음을 ‘나중에’ 이해할 수 있었다고.
간단한 내용인데 왜 다른 영화 같았냐고요? 먼저 제가 기억하는 스토리가 아니었습니다. 전 영화를 완전 시간 순서대로 기억하고 있었거든요. 둘이 만났다가 (연애 과정 삭제) 헤어지고, 홧김에 기억 삭제하려다 막상 삭제하려고 하니 후회하면서 거부하다가 결국 삭제당하는 걸로요.
이렇게 보면 슬픈 영화죠? 좋은 영화인데 그동안 계속 찾아보지 않으려고 했던 감정적 이유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실제 영화 스토리는 저렇지 않습니다. 제 기억에서 결말 부분이 완전히 삭제되어 있었던 겁니다. 세상에. 설마 제가 저런 기업 찾아 ‘이터널 선샤인을 봤던 기억에서 영화 결말만 제거해 달라’고 작업을 의뢰한 것도 아닐 텐데요.
… 하- 자율 삭제라니. 돈 아꼈습니다(?).
그런데, 그래서, 엔딩에 호되게 뒤통수를 맞게 됩니다. 세상에, 이런 엔딩이었어요? 조엘 바리시(짐 캐리 분)의 대답을 듣고, 내가 당신과 함께하지 못한 이유가 떠올라서, 그저 먹먹해집니다.
불안했던 사랑. 이대로 이 관계가 끝나면 어쩌나, 앞으로 사랑받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계속 걱정했던 사랑. 그래서 조심조심, 마음의 요만큼만 주고 거리를 뒀던 관계. 나는 사랑 받지 못할 거라고, 그런 자격이 없다고, 자신에게 계속 걸었던 주문.
하지만 그때 내가 했어야 하는 말은, 어쩌면, 그냥 오케이가 아니었을까요. 내가 상처받을까 봐 먼저 몸 사리는 것이 아니었는데. 당신이 상처를 개의치 않고 보여줄 사람이었어야 했는데. 내가 약점을 드러낼 수 없는, 당신이 약점을 보여줄 수 없는 관계라면, 사랑이었을까요.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관계가 가득한 세상에서, 내 약점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건지, 이제 아는 나이가 됐습니다. 시시껄렁한 이야기로 투닥대면서도 만나는 사람들. 서로가 커가는 모습을 같이 봐 온 징글맞은 사람들.
당신의 나쁜 면을 보고 손을 놔버린 건 나였습니다. 그때 헤어지자 말한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었다고 해도, 내가 한 일을 내가 모를까요. 그냥 그저 그렇게, 못난 모습으로, 세월을 견뎌왔습니다. 차인 건 나였다고, 결국 모두 나를 버렸다고, 자신을 연민하며.
어리석었습니다. 미안했어요. 이제는 볼 수 없는 당신에게, 인사를 전합니다. 우습게도, 지금도 가끔, 그때 기억으로 세상을 버팁니다. 당신에게도 내가, 가끔 기억나는 일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 티 없는 마음에 영원한 햇살(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이 깃들기를.
- 픽션입니다.
- 연애 좀 한 적 있다-하시는 분들에게 권합니다. 아릿아릿하실 거예요.
- 이게 왜 크리스마스 추천 영화냐고요? 제가 그즈음 봤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