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을 사치재라 말하는 시대에서 사는 법

1. 몇 달 전 보았던 김인규 교수의 글 「청춘이여, 인문학 힐링 전도사에게 속지마라」라는 글이 아직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돌아다니기에, 짧게 적어봅니다. 저 글에 담긴 내용을 간단히 요약한다면 이렇게 되겠죠.

“인문학은 당장 써먹을 곳이 없는 학문이니, 취직에 도움되는 공부를 해라”

구체적으론 강신주 박사와 김난도 교수를 까면서, 대학들의 인문계 학과 폐지를 옹호하고 있구요. 자- 그런데 인문학이, 과연 이런 대접(=공부해봤자 취업에 별 도움이 안되는 학문)을 받아 마땅한 학문일까요?

예, 공부해도 취업이 도움이 안되는 학문입니다. 이런 대접을 받은지는 오래됐습니다. 예전이라고 인문학 전공자들이 좋은 대접 받은 것은 아니란 말이죠. 실제로 IMF 이전부터 기업들은 항상, 당장 써먹을 수 없는 학문을 가르친다고 대학을 달달 볶았습니다. 오죽 했으면 20년전에 이미 이런 글이 발표됐을까요.

대학은 대체 무엇을 하는 곳인가?
이 물음은 대학이 학생들에게 바로 졸업한 후 활용될 수 있는 기술과 지식을 가르치지는 않고 현실과 동떨어진 것을 답습하고 있다고 불평하는 산업체가 던지는 질문이다. 언론 또한 여기에 가세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취업 후 기업체에서 마땅히 감당해야 하는 직장내 훈련에 들어갈 비용을 대학에 떠넘기려는 발상이 아니라면, 이는 대학교육에 대해 근본적으로 부적절한 인식을 가정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

– 대학의 이념과 오늘의 과제, 이성원, 서울대 민교협 5회 학술발표회 자료집, 1995

2. 그런데 이런 시각은 기본적으로 사회 시스템 측면에서 작동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대학을 노동력을 공급하는 공장으로 보고, “왜 당장 써먹을 수 있는 노동력을 대학이 공급하지 않고 있는가?”라는 컴플레인을 하는 거죠. 그리고 이런 시각은, 대학에서 배우는 사람들, 그러니까 학생들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취직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그것보다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배우고 공부하는 것일텐데…

이렇게 대학의 존재 목적을 살짝 비틀어 보게 하는 것, “더 나은 삶을 위해 공부한다” vs “취직을 위해 대학에 다닌다” 등 대학의 여러가지 존재 목적중에서, 어떤 특정한 시각으로 보게 하는 것을 ‘프레임’이라고 합니다. 인지 과학자들이 ‘인지적 무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찾아낸 것입니다.

특정한 시각이란 것은 결국, 특정한 세력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보게 만든다는 것도 내포하고 있기에, 정치를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즐겨사용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3. 정치권에서 무슨 사건만 터지면 ‘종북 좌파’니 ‘민족반역자’니 하고 딱지를 붙이는 것도, 알고보면 이 프레임을 둘러싼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전쟁의 일환입니다. 이런 방법은 앱등이니 삼엽충이니 하는 형식으로도 많이 쓰입니다. 기본적으로 상대를 깍아내리는 방법으로 많이 쓰이죠.

정치에서만 쓰이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잭 트라우트는 자신이 쓴 책에서 ‘리포지셔닝’이란 방법을 소개합니다. 제품의 이미지를 다시 포장해서 소비자들에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도록 만드는 방법입니다. 뭔지 아시겠죠? 예, 이 방법 역시 알고보면 프레임 조작이란 방법에 해당합니다. 수없이 많은 기업의 홍보, 마케팅 과정에서 행해지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 훨씬 오래전 카이사르가 말했던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의 현대적 버전.

물론 이런 스킬들을 알면서 당하기도 하고, 알기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작업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알아야 안/덜 당한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세상엔 시스템- 또는 저 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이익에 맞게 만들어놓은 수많은 프로세스들이 있습니다, 싸잡아서 세상은 있는 놈들의 것이라고 말할 생각은 없지만, 있는 사람들을 위해 많은 것이 작동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이번 메르스 사태에서 초기에 매뉴얼을 무시하고 여러 정보들을 비공개한 일이, 표면적으로는 ‘정보가 공개되면 혼란이 가중된다’라는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뒷면에 ‘병원 정보가 공개되면 병원이 손해를 본다’라는 사고가 작동하지 않았다고, 누가 확신할 수 있을까요?

4. 이런 세상에서 속지 않고 살려면, 생각을 해야합니다. 아니 사실 세상에 필요한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에요.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실천할 줄 아는 사람들. 20년전 글의 뒷부분을 다시 가져와 보면 이렇습니다.

현 시점에서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사태를 총체적으로 볼 줄 알며 반성적으로 사고하며, 도덕적 판단력을 갖추고, 대안적 사고를 할 줄 아는 것이다.

– 대학의 이념과 오늘의 과제, 이성원, 서울대 민교협 5회 학술발표회 자료집, 1995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것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왜 그런지 파헤치며, 다른 방법은 없는지 고민해 보는 사람들.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 자기 의지로 움직이는 사람들. 실은 인문학이란 곳에서 가르치는 것이 바로 이 ‘생각하는 힘’입니다. 공자와 칸트의 저작물을 그냥 읽는 것이 인문학이 아니라고 전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의 아이콘이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져야 하는 가에 대해서도 ‘스큐어몰피즘’과 ‘미니멀리즘’은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걸 고민하고 적용하는 과정은 눈 앞에 확- 다가오진 않아도 분명히 수많은 사용자들을 편하게도/불편하게도 만들 겁니다.

공자와 칸트는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역사는 왜 그런 방향으로 움직였는지, 왜 흑사병이 종결되자 기술적 진화가 일어났는지, 수없이 많은 ‘당장 쓸데없는 것처럼 보이는 질문’들을 인문학은 우리에게 던집니다. 그런 것들을 곱씹어 보는 과정에서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고, 지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건 단순히 일하는 기계로서의 삶이 아니라, 더 나은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

5. 인문학이 과연 사치재일까요? 글쎄요. 제가 보기엔 인문학은, 요리사로 따지자면 기본기와 같은 겁니다. 칼질하고 다듬고 불을 다루고 좋은 재료를 찾고 재료와 재료간의 조화를 알아가는 것. 그런데 세상은 기본기 없이 레스토랑에 취직하기 좋은 자격증을 따서 취직할 생각이나 하라고 하네요. 기본기는 그 다음에 다듬으면 된다고.

그런데요… 그렇다면, 레스토랑은 좋겠지만, 그 요리사의 삶은요?

물론 다른 학문도 필요합니다. 취직에 도움이 되는 학문, 당장 기업들이 원하는 기술을 배우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차피 세상은 통섭의 시대로 넘어온지 오래됐습니다. 프레임만 봐도 인지과학에서 가져온 내용을 정치학에서도, 경영서에서도 사용합니다. NASA의 과학자들이 월가로 진출하고, 수학자들이 빅데이터 분석을 위해 실리콘 밸리로 향하고, 심리학자들이 인공지능이나 프로그램 개발에 참여하는 일은 이미 예전부터 일어나고 있던 일입니다.

… 세상에 돈을 벌 수 있는 학문과 그렇지 않은 학문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인문학은 사치재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대비해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이젠 ‘모두’가 배워야 하는 ‘교양’, 또는 ‘가치재’의 성격을 더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면 새로운 삶의 방식이나 사회가 진화해야할 방향에 대한 이야기도 나올 수가 있고, 무엇보다 ‘삶을 대하는 태도’를 좀 더 다양하게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다른 의견을 대하는 방법도. 무엇보다 세상이 쳐놓은 그물에서 속지 않고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겠죠.

인문학을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지까진, 저같은 미천한 사람이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만- 아무튼 개인의 삶을 위해서라도, 조금씩 더 좋아지는 세상을 위해서라도, 인문학은 사치재로 폄하되어선 안됩니다. 반면 인문학을 한달만에 읽는 인문학 명저 100선,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식으로 얘기하는 사람들도, 경계하긴 해야겠지만 말입니다.

– 한줄 요약 : 인문학 배운다고 취업이 더 잘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의 삶을 고민할 때 꼭 필요한 학문이다.

* 사실 살아남는다는 표현도 경쟁지상주의 사회가 제게 남긴 흔적 같네요…

* 김난도 아저씨의 책은 별 재미가 없었습니다. 강신주 아저씨의 책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논평은 별도로 하지 않습니다.

* 개인적으로 인문학에 대해 고민하시는 분이 계시면, 강상중 교수의 ‘고민하는 힘’이란 책을 먼저 권하고 싶습니다.

“자유가 확대되었다고 하지만 그에 어울리는 행복을 느끼고 맛보며 살고 있습니까? 만족감과 안도감을 맛보고 있습니까? 근래에 행복지수가 비약적으로 높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없고, 오히려 늘 여유가 없이 서두르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또한 건조하고 살벌한 분위기로 바뀌고 있습니다. 경제인류학자 칼 폴라니는 공동체가 지닌 목가적 연결이 해체되고 있는 시장경제를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말을 빌려 ‘악마의 맷돌’이라고 불렀습니다.”

– 고민하는 힘, 김상중, p17

  • 2016년 6월 24일 썼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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