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붉은악마를 그냥 내버려둬

“… 소수와 다수는 수효에 의해서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소수가 다수보다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다수는 표준이 되는 모형에 달려 있습니다. 가령 평균 유럽인이라면 도시에 거주하는 성년 남성을 가리키는 식입니다.

… 반면 소수에게는 모형이 없습니다. 그저 생성이고 과정이지요. 다수는 결국 아무도 아니라고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스스로 원하기만 한다면 미지의 길로 이끄는 소수의 생성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소수가 전형을 만들어낸다면, 그것은 다수가 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의 생존 혹은 구제를 위해 아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겠지만 말입니다. [가령 하나의 정체를 갖고, 이름을 내고,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는 경우가 그러합니다].

하지만 소수의 힘은 스스로 창조해 낸 것, 이어 다소 간 모형화 되는 것, 그러나 그 모형에 종속되지는 않는 것 등에 달려 있습니다. 대중은 항상 창조적 소수, 과반수를 차지하더라도 창조적 소수로 남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소수와 다수는 서로 차원은 다르지만 공존할 수 있는 것입니다. …”

대담 1972-1990에서 발췌, 들뢰즈(G. Deleuze), 김종태 옮김, 솔 출판사.

 

나는 가짜 붉은 악마다

월드컵에 얽힌 기억을 끄집어본다.
처음 축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80년대 초반 한참 유행하던 스포츠 만화 덕분이었다. 이젠 기억하는 사람도 없겠지만, 내 또래의 많은 아이들은 월간 만화잡지 보물섬에 연재된 김철호의 ‘그라운드의 표범’이라는 만화를 보면서 축구를 알아갔다. 키 작은 축구 선수가 나와서 세계 정상급의 국가대표들을 상대로 싸워나가는 이야기였다(그 만화의 영향으로 인해 10여년 전까지는 브라질 사람들은 모조리 다 축구만 하고 멕시코 경기장은 무조건 산꼭대기에만 있는 줄로 알고 있었다.).

그러다 83년 멕시코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에서 한국이 4강에 진출하면서 ‘붉은 악마’라는 애칭을 얻게 되었고, 몇 년이 더 지난 다음에는 차범근이 이미 죽은 전설의 영웅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된다. 대한민국이 자랑하던 축구 선수였지만 한번도 직접 뛰는 것을 보지 못했던 나는 정말 죽은 사람으로만 알았다. 그 차범근이 TV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뛰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가슴이 뛰었다.

그것이 내가 겪은 첫 번째 월드컵이었다. 하지만 차범근이 나왔어도 한국은 졌다. 나는 별 것도 아닌 사람에 대해서 신문이 거짓말을 했다고 믿었다. 그것이 끝이었다. 오래 달리기 외에는 잘하는 운동이 없던 나는, 친구들이 축구나 농구를 하며 놀 때 음악을 들으며 만화를 그렸다. 그렇게 축구에 대한 관심은 멀어져 갔다.

월드컵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94년이었다. 그때는 지하철 파업이 한창 진행되던 때였고, 나는 파업을 옹호하는 시위를 하다가 잡혀서 어느 경찰서에 있었다. 밤샘 조사가 끝나고 근처 소파에서 같이 잡혀온 사람들이 무더기로 앉아서 졸고 있던 새벽이었다. 교회에서 농성을 하던 지하철 노조 아저씨들이 붙잡혀 들어오는 소리에 눈을 떴다.

누군가가 TV를 틀어놨고 그 안에는 월드컵 경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공이 움직이고 선수들이 움직였다. 그리고 나는 얼떨결에 소리쳤다. 아마 슛-을 반복해서 외쳤던 것 같다. 경찰서는 순식간에 웃음바다로 바뀌었고 나는 얼굴이 벌개졌다. 누군가가 저 녀석은 월드컵 보려고 잡혀 들어왔냐면서 구박했다. 직접 뛰지 않아도 축구를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그 다음 날부터 나는 축구 매니아가 됐다… 라고 말한다면 당연히 거짓말이다. 기껏해야 국가대표 경기만 관심을 가졌을 뿐이다. 그리고 많은 경기에서 아쉬움과 한숨만을 얻었다. 하지만 무슨 객기였을까. 98년 월드컵 본선 때부터 광화문으로 나섰다. 아마 토요일 밤이었던 것 같다. 친구들과 술 먹다 말고 경기 보러 가야 한다면서 대학로에서 광화문까지 터벅터벅 걸었다.

비가 심하게 내리기 시작했다. 동아일보 전광판 건너편에 자리를 잡고 아는 형과 함께 캔 맥주와 빗물을 섞어서 마셨다. 붉은 악마들이 먼저 모여 옆에서 응원을 하고 있었다. 길 옆에 주차해 놓은 차들은 라디오 방송을 최대한 크게 틀어서 들려줬다. 경기가 시작되고 우리가 한 골을 넣었다. 그제서야 응원은 불이 붙었다.

사람들은 쑥스러워 했지만 곧 미치도록 응원했다. 물론 우리가 졌다. 물에 불은 신문지들을 치우고 서울역 근처 만화가게에서 잠을 청했다. 밤새도록 비를 맞은 몸은 무거웠다. 뭔가 억울한 게 왈칵 밀려들었다. … 그 이후로, 국가대표의 경기를 앉아서 본 기억은 별로 없다.

네트워크가 만들어낸 신화, 붉은 악마

그렇게 4년의 시간이 흘렀다. 한국팀은 강팀이 되어 있었다. 새로운 외국인 감독은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이 생각한 방향으로 팀을 끌고 갔다. 그 방향은 옳았고, 처음에 그를 비난하던 사람들은 이제 함부로 숨조차 쉬지 못한다.

사람들은 열광했고, 어느새 수백만명으로 늘어 거리를 붉게 물들이고 있다. 붉은 악마를 기독교에 대한 모욕이라 말하던 사람들은 꼬리를 감췄다. 그들을 희한한 축구광 정도로 묘사하던 언론들은 연일 그들에 대한 찬사를 보내기에 바쁘다. 열광으로 뒤덮힌 거리는 축제, 그 자체였다.

하지만 심사가 꼬인 탓일까. 왜 이리도 불안해 지는 걸까. 사람들이 다 맞다고 할수록 불안은 심해진다. 어째 정부나 언론이나 다같이 나서서 자꾸 사람들을 부추기는 꼴이 볼상 사납다.

계속 거리 응원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느꼈을 것이다. 포르투갈전부터 무엇인가 분위기가 다르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저 즐겁기 위해서 축구를 응원하고, 즐거움을 주니까 축구가 잘 되기를 바란다. 이제까지 축구를 즐겼단 사람들은 그랬다.

프랑스가 철천지 원수여서 이겨야 했던 것도 아니고, 우리의 우월함을 자랑하기 위해 16강을 갈망했던 것도 아니다. 결국 이것은 축구고 스포츠다. 경기가 끝나면 기쁘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축구일 뿐이다. 다만 이기는 것이 훨씬 즐거우니까 이기기를 바랄 뿐.

처음 붉은 악마가 만들어진 계기도 바로 그것이 아니었을까.

누구나 알고 있듯, 붉은 악마 –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국가대표 서포터즈는 처음 출발부터 PC통신을 통해서 이뤄졌다. 네트워크를 이용할 때 가장 기본적으로 거론되는 특징이, 기존의 ‘시/공간적’ 한계를 넘어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고, 그렇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존재하던 소수의 사람들을 하나의 커뮤니티로 묶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응원할 지를 논의하고 계획을 실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틀이 네트워크였다. 회원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인터넷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12만 회원 가입이 과연 가능했을까. 점점이 흩어져 있던 그들이 모여서 단관(단체 관람)이란 말을 만들고 썹팅(써포팅, 응원)이란 말을 만들고, 술 한잔 마시며 치어 리더들의 율동이나 즐기던 응원 문화를 바꿔내는 것이 가능했을까. 응원의 열기를 느끼고, 공유하고, 다시 전파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도록 만드는 것이 가능했을까.

그들은 네트워크가 만들어낸 신화다.

그 신화의 주인공은 누구 하나도 아닌, 그들 모두다. 기꺼이 붉은 옷을 입고 광장의 응원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다. 그러면서 그 누구도 주인공은 아니다. 그들 하나하나가 떨어지기 시작하면 신화는 무참히 깨져버린다. 네트워크에서 주도적인 사람은 있을 수 있어도 권위적인 중심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과 같은 개방적이고 포용력 있는 운영, 언젠가는 모든 국민이 자발적인 서포터즈가 되어 스스로 해체되는 것이 목표라고 말하는 열린 마음이 신화를 만들었다.

아니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PC통신을 통해 만난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 그들이 그동안 새로운 응원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 뿌렸던 노력, 2002년 6월 한 달의 붉은 폭발이 있기 전까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맛보았을 소외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제가 되기 싫은 사람들, 축구를 좋아하고 응원의 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자기 자신이 즐거우니까 끝까지 내달렸던 열정이 지금을 만든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 데 10년에 가까운 세월이 걸렸음을 기억하자. 때로는 좀더 편하게 살 수 있는 조건을 때려치고 응원한다고 나선, 어찌보면 바보같은 사람들이 지금을 만들어왔음을.

 

이제 제발 내버려 달라

유홍준 선생은 한겨레 신문에 실린 글에서 “오늘의 젊은이들은 분명 인터넷 세대의 개인주의자이고 자신의 개성을 천방지축으로 분출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때론 그들에게서 어떤 건강하고 성실한 공동체의식이 발견되지 않아 이러다가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전쟁터로 뛰어갈 젊은이가 몇이나 될까 걱정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붉은 악마’는 그들의 핏속에 여전히 민족과 국가라는 유전적 인자가 자리 잡고 있음을 이렇게 보여준 것이다.”라고 말을 했다.

글쎄… 솔직하게 말해서 유홍준 선생이 이렇게 위험한 국가주의적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이 당혹스럽다. 9시 뉴스에서 외국인 관광객들 인터뷰할 때 ‘Pride’라고 말하는 것을 굳이 ’애국심‘이라고 번역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나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재 세대에 대한 기성 세대의 쓸데없는 우려와 편견을 본다. 미국과 경기를 벌일 때 폭동 발생을 우려한 정부가 미대사관쪽에 깔아놓았던 물대포나 전경들과 하나 다를 것 없는. 당신들은 우리를 믿지 않는다. … 하지만 개인주의와 개성이 공동체와는 어울릴 수 없는 반대말인가. 인터넷의 발달로 ‘싸가지 없어진’ 애들이 그렇게 늘었던가. 눈 앞에 존재하는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이미 말했듯이 네트워크가 없었다면 붉은 악마도 존재하지 못했다. 물론 이제는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지는, 많은 사람들의 일상이 되어 버린 것들이지만. 사람들은 자신에게 미리 주어진 조건에 따라 만들어진 공동체(학교/ 지역/ 혈연)보다 자신들의 의지로 만들어지는 공동체를 택한 것일 뿐, 그것이 곧 이기적인 문화를 대변한다고는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러니 제발 부탁한다. 이제 우리를 그만 좀 내버려 달라고.
정부나 언론이나 기업이나, 그냥 좋아하는 사람들이 좋아서 맘껏 응원이나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자꾸 엄하게 이것저것 가져다 붙이지 말라고. 이번 월드컵을 통해서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국제 사회에서 국가는 우리의 생존을 보장하는 최후의 보루다. 하지만 자부심이 높아졌다고 해서, 자발적으로 군대에 입대해야겠다는 생각은 그리 들지 않는다. 87년 6.10 항쟁과 연결 시키는 것도, 애국심으로 연결시키는 것도 오버다. 사회적 책임이 없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응원할 때만큼은 그런 것 생각하지 않고 즐겁게 응원하고 싶다는 말이다.

거리로 뛰쳐나와, 축제를 즐기자

지금 사이버 게시판은 치고받는 논객들이 흘러넘치고 있다. 월드컵 4강 진출을 계기로 우리는 이미 우리 안에서 전쟁을 치르는 중이다. 지금 그 곳은 피를 흘리며 무엇인가를 바꾸려하고 있다.

안되면 되게 하라는 명제는 히딩크 감독을 통해 깨졌다. 안되는 것은 안되는 것이라고, 무엇이 잘못 되었는 지를 분석하여 기초부터 제대로 실력을 쌓아 올려가야 한다는 명제로. 진짜 투지란 질 줄 알면서도 끝까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냉정하게 판세를 분석하고 이길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란 것을 겨우 깨달았다.  

그런 깨달음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와 전쟁 중이다. 한국 사람은 뭐를 해도 안된다는 엽전 근성과의 전쟁, 그리고 뭐를 해도 완벽하게 정당해야만 한다는 착한 사람 콤플렉스와의 전쟁. 그동안 식민지 정권과 군사 파쇼 정권이 그저 말 잘 듣는 착한 국민을 만들기 위해 써먹었던, 우리의 뼛속 깊이 박혀 있는 그 지긋지긋한 이데올로기와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전쟁만으로도 지겹다. 설마 진짜로 우리가 잘나서 이겼겠냐고 믿는 인간들과 싸우는 것은 신물이 난다. 그러니 제발 스포츠를 스포츠가 아닌 것으로 만들지 말아달라. 자꾸 애매한 분석과 이데올로기를 들이대며 분석하고 재단하지 말아달라.

마지막으로 광장으로 나왔던 모두에게 부탁한다. 함께 응원하고, 손벽을 마주치고, 어쩌면 껴안았을지도 모를 당신에게. 지금 당신이 즐기고 있는, 즐겼던 축제의 흥분을 잊지 말아주기를. 그 짜릿한 기쁨을 잊지 말아주기를. 이 지루하고 재미없는 세상도, 당신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즐거운 변화가 가득해 진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열광하고 흥분하는 사이에 정부과 언론과 기업들이 어물쩍 넘어가 버린 부끄러운 일들도 가득하다는 것을.

축제가 끝난 다음,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세상은 돌아가기 시작하겠지만, 잊지말고 반드시 목소리를 높여야만 한다는 것을. 안그러면 우린 나쁜 사람이 되어버릴 테니까. 미군 때문에 두 명의 소녀가 죽었어도 축제의 기쁨 때문에 외면해버린, 가짜 민족이 되어버릴 테니까. 우리는 화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조금 늦추고 있었을 뿐이니까.

지난 스페인전이 끝나고 많은 사람들은 광화문을 출발해 동대문을 지나, 청량리역까지 행진을 했다. 대학로에서 나오는 친구들과 손바닥도 마주치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같이 환호도 나눈다. 어떤 아주머니는 얼마나 좋으셨는지 양철솥을 들고 나와 두드리고, 어떤 환경미화원 할아버지는 텅 빈 식용유통을 두드리며 박자를 맞춰준다. 쌍둥이 꼬마 아기들도 붉은 머리띠를 하고 웃고 있다. 어떤 아저씨는 음료수를 들고 나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따라주고, ‘골 넣어서 미안해요’라는 플랭카드를 든 여고생들이 꺄악 소리를 치며 지나간다. 어떤 아저씨는 불꽃을 팔다말고는 전부를 군중을 향해 뿌려버린다.

소방서 아저씨들과 기념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음악이 없는 축제는 심심하다고 외치면서 한 무리의 친구들이 트럭에 앰프를 싣고 와서 라이브 공연을 하고, 다음날 아침 택시 기사 아저씨들은 자판기 커피를 뽑으며 축구 이야기를 한다. 오랜만에 느낀 따뜻한 충만함, 나와 당신이 다르지 않다는 느낌. 우리가 외치면 저쪽이 반응하고, 저쪽이 외치면 우리가 반응한다.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곧 잊어버릴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뿐이라고 해도, 이런 느낌이 나는 참 좋다.

그러니 혹시, 당신, 한번도 거리에 나오지 않았다면 다음에는 그러지 말기를.
다시 이런 일이 생긴다면 망설이지 말고, 언제라도 붉은 옷을 입고 거리로 뛰쳐나오기를.
거리로 뛰쳐나와 축제를 즐기기를. 나는 당신도 한번 힘껏 껴안고 싶다.
아무 이유없이.

* 이 글은 지난 2002년 6월에 씌여졌습니다. 손보지 않은 상태로 다시 올립니다. 하고픈 말이 아직껏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직도, 2002년 6월의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 그 이후에 있었던 미선이/효순이 관련 촛불 시위와 대통령 선거를 만들어냈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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