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딛는 첫 발은 – 방현석 외

그의 앞에는 캄캄한 절망의 벽만이 버티고 있었다. 하루 열네다섯 시간 일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가난, 그에게 내일은 절망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원망조차 할 수 없이 살아가는 그를 사람들은 성실하다 했다. 실은 희망도 분노도 없이 그는 절망하며 살아왔다. -p50

“땅 속에 누운 사람의 잠을 살아 있는 사람이 깨워서야 되겠소. 또 그럴 수도 없는 법이고. 원통한 넋이니 죽어서라도 편히 눈 감도록 해야지, 암. 그것이 산 사람들의 도리요 …… 하기는, 이렇게 불편한 꼴로 묶여 있었으니 그 잠인들 오죽했을까만.” -168

현대중공업이었던가. 80년대 중반, 처음 파업을 할 때 찍은 사진을 보고 왈칵 눈물 흘렸던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아저씨들이 내세운 구호는 딱 세가지였다. 기억이 흐릿하지만 대충 아래와 같았다.

  • 임금을 올려달라.
  • 머리카락을 기르게 해달라.
  • 사복 입고 출퇴근 할 수 있도록 해달라.

지금부터 겨우 20년 전의 일이다. 우리들 아버지, 또는 삼촌이 청춘이던 시절의 일이다. 지금이야 세상이 변했지만, 공돌이라 무시당하는 것이 싫어서 사복 입고 출퇴근 하는 것, 회사 다니며 머리카락 좀 길러 보는 것이 소원이던 시절이 이 땅위에 있었다.

이유없이 주먹질을 해대던 선생들과, 공동 변소를 이용하기 위해 10분 더 일찍 일어나던 누나들이 있었다. 아파트를 짓는다고 철거민들을 몰아내다 사람이 죽어갔고, 녹화사업에 걸려 강제 군입대한 다음 시체로 돌아오던 대학생들이 있었다. 중금속에 오염된 줄도 모르고 각성제를 먹으며 밤새 일하던 여공들과, 손이 잘려도 보험은 커녕 퇴직금 한푼 받지 못하던 노동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시대가 좋았다거나, 그 시대를 찬양하는 사람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 책에 담긴 소설들은, 그 시대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이야기들이다. 글쓴이들이 젊었던 탓인지, 소설의 무대가 죄다 공장, 감옥, 군대로 한정된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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