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무서워-라고 겨울밤에 입김을 불듯 그녀가 말한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냐고 무심하게 돌아본다. 톱에 베여 밑둥만 남은 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이 나무, 늘 이 자리에 있었잖아, 라고 그녀가 말을 잇는다. 그런데? 라고 내가 대답한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그걸 전혀 모르고 있었을까? 라고 그녀가 말한다. 아아, 그랬었나-하고 고개를 돌리는데, 그녀가 움찔거리는 것을 본다. 그리고 내뱉듯, 싫어- 라고 말한다.
이 따위 삶, 정말 싫어-.
눈물이 보이지 않는 눈물. 하나 아프지 않을 것 같던 슬픔. 차가워 차갑지 않은 눈송이와, 헤어져도 헤어진 것 같지 않았던 이별.
1. 우리는 아무데나 주저않는 것에 익숙해진 연인이었다. 무작정 걷다가 피곤하면 벤치에 드러누워 버리고, 그러다가 다시 걷고, 그렇게 하루종일 둘이서 재잘대며 떠드는 것에 익숙해진. 배가 고프면 백화점 지하매장에서 커피와 초밥을 사가지고 나와 먹었다. 멀게 햇살이 드리워지던 길거리의 화단, 사람들의 물결이 흐르던 거리. 꽉 막힌 차도와 끝없이 늘어선 차들. 그 가운데에서 이야기를 하다가 입을 맞추고, 초밥을 먹다가 입을 맞추고, 담배를 피다가 입을 맞추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던 거리. 맞잡은 손을 놓치기 싫어 꼭 잡고 있었던 거리.
2. 가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면 그녀는 선글라스를 쓰곤 했다. 작은 어깨에 항상 걸고 다니던 초콜렛색 가죽 가방에는 장석남의 시집 한 권만 달랑 들어있었던가. 아니면 진이정이었던가. 이성복이었던가.
어쩌면 헤어진 후에도 그토록 오래 거리에서 머물렀던 것은, 그 익숙함을 잊지 못한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삶이란 하나에 맞추기 위해 여러가지 것들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늘상 들리던 그 거리에는 올해도 변함없이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들이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반짝이는 불빛들. 무표정하게 흘러가는 사람들을 도닥거리는 것처럼, 노랗게 반짝이던 모든 것들. 멀리서 들려오는 구세군의 종소리.
3. 그녀는 항상 되새김질하듯 지나간 일들을 기억하곤 했다. 세살때부터의 일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던 그녀는, 그래서 사람들의 기억은행 같은 존재였다. 모두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일들을 기억하고 있다가 이야기해 주는. 아주 자질구레한 것들, 무슨 옷을 입었는지, 무엇을 먹었는 지, 무슨 이야기를 했었는지.
그렇게 하나씩 기억할 때마다, 나는 웃으며 또 뒷더듬이로 더듬는다고 핀잔을 주곤 했다. 하나를 기억할 때마다 조금씩 길어져가던 그녀의 뒷더듬이. 하지만 알고 있었을까. 기억이 많은 사람이 얼마나 가까운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 존재인지를. 그녀가 그 기억 속에서 떠돌고 있을 동안, 나는 아무런 사랑도 받지 못하고 그저 존재하기만 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늘어만 갔던 상처들. 상처들. 상.처.들.
4. 고운 미소로 곱게 두 손을 모으고 곱게 그녀가 울던 날. 그렇게 곱게 내게 이별을 말하던 날. 나는 아무렇지 않은척 했다. 항상 채이면서도, 이별할 때마다 달래주는 것은 언제나 내 몫이었다. 괜찮다고, 괜찮다고. 당신을 만날 수 있었으니 좋았다고. 당신 탓이 아니라고.
어떻게 미워할 수 있을까.
삶을 사랑하는 당신, 사람을 사랑하는 당신,
이별에조차 예의를 차려 대할 줄 아는 당신을.
살아가는 모든 것을 곱디 고운 것으로 만들줄 아는 당신을.
5. 당신과 헤어지고 나서 나는, 한참을 무서워서 벌벌 떨었던 적이 있다. 그런 날이 찾아올까봐, 내가 당신을 잊는 날이 찾아올까봐. 삶이 지독하게 길어져, 당신의 이름마저 잊어버릴 때가 올까봐. 명동 한 복판 낡은 화단에 앉아 썬글라스를 끼고 백화점에서 사온 초밥을 먹던 시절을 지나, 내 기억이 사라져버릴 지도 모를 언젠가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고, 나는 지금까지 살아왔다. 막막함으로 점철되었던 이십대도 벌써 저만큼까지 흘러가버렸다. 어제는 당신이 선물해줬던 CD를 찾았다. 떨어진 펜을 찾기 위해 손을 넣었던 책장 밑에서, 상처가 가득한 모습으로 구석에 박혀있던 CD를. 나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다, 당신을 잊어버린 것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지나가 버린 줄 알았던 슬픔이 눈앞을 막아서서 기우뚱 한다.
6. 만나지 못하는 당신. 이젠 만날 수도 없는 당신. 하지만 이미 알아버린 탓에 잊을 수는 없는 당신. 멀리 있어도 사랑할 수 있을 줄 믿었다. 그것이 바로 함께 있는 거라고, 우리가 함께 사는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어쩌면 좋을까. 보이지 않는 것들은 수만가지인데 보이는 것은 어둠 뿐이다. 멀리 있는것들은 8할인데 사랑할수 있는것들은 2할도 못된다.
그래도 나, 이렇게 만나지는 강과 어둠과 시간이 있어,
저기 저기, 당신이 머물던 곳과 함께 했던 시간이 있어,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삶을 살고 있다.
당신과 함께 했던 순간이 있어서.
당신과 함께 했던 이야기가 있어서.
7. …언젠가는 어둠이 내게 말을 건네리라.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마지막엔 보이게 될 것들의 이야기를.
About Autho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