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개념의 변천사, 그리스부터 현대까지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사랑이란 단어를 검색하면 “이성의 상대에게 끌려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 또는 그 마음의 상태”라거나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열렬히 좋아하는 이성의 상대”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반면에 네이버 백과사전에서는 사랑을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으로 인류에게 보편적이며, 인격적인 교제, 또는 인격 이외의 가치와의 교제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라고 규정한다.

앞의 것이 “연애”적인 사랑이라면 뒤의 것은 “박애, 인류애”적인 사랑이다. 그리고 이런 사랑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고 다들 쉽게 말한다. 아주 오래전 인류의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우리에겐 사랑이 있었다고,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우리가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족을 유지할 수 있었겠냐고. 누군가는 그래서 인류가 동물과는 다르고, 더 위대한 존재라고까지 말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 것일까? 예전부터 지금까지 인류의 마음은 동일하며, 사랑의 스타일은 달라졌지만 본질은 그대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고대의 사랑도 지금과 같은 사랑일까? 로미오와 줄리엣은 백년전/백년후에 태어나서 만나도 로미오와 줄리엣일 수 있을까?

사람보다 삶을 더 사랑했던 시대

인류가 처음부터 연애/결혼과 사랑을 같은 것으로 여기진 않았던 것 같다. 성경의 느헤미야서에 보면 결혼은 다음과 같이 이뤄진다.

라구엘은 사라의 어머니를 불러 종이를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모세 율법의 규정에 따라 사라를 토비아에게 준다는 혼인계약서를 작성하였다

그것은 플라톤의 시대, 고대 그리스에서도 그리 달라보이지 않는다. 플라톤이 보기에 사랑이란 ‘선한 것을 영원히 소유하려는 것’이다. 그 선한 것을 영원히 소유하기 위해 우수한 인간이 되고 싶어하며 연인을 만나서 서로의 아름다움을 나누며 정분을 쌓는다. 그렇지만 그는 그것이 여성에게 향할 경우 육체적인 것으로 만족하게 되며, 결혼이란 것도 “관습상 그것을 따르게 마련입니다. 결혼을 하지 않고 평생토록 그들끼리만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이란 자세를 보인다.


다시 말해 그 시대만해도 사랑이란 스스로를 갈고 닦는 삶의 방식에 가까웠다. 연애는 그저 향락을 누리고자 하는 행위이고, 결혼은 형식적이고 사회적인 관습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서로 좋아해서 결혼을 한 것이 아니라 가문의 번영을 위해, 또는 자식을 낳아 번성하려는 목적으로 결혼을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 가운데 존재하는 것은 “마음”이나 “열정”이 아니라 한 사람/한 가문에 대한 평가다. 조금 심하게 말해서 그때 말하는 결혼이란 요즘 기업들의 구인활동에 더 가까웠던 것처럼 보인다.

에로틱의 시대가 시작되다

하지만 본능을 부정하는 시대가 오래갈 수 있을까. 철학자들이 뭐라고 하건말건, 그 시대에도 사람들은 연애를 하고 애정을 나누고 함께 살아갔다. 피그말리온이 만든 조각이 남자였는가? 거꾸로 향연은 그 시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열렬히 연애 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로마 시대가 되자 사랑은 이제 ‘연애’와 거의 동일한 말이 되고 만다. 오비디우스는 “사랑의 기교”를 통해 과감하게 어떻게 꼬시고 연애해야 하는지, 그리고 실연의 상처는 어떻게 달래야 하는 지를 전파한다.

그러므로 돈이 많으면 오랑캐라도 환심을 사게 되어 있다. 바야흐로 시대가 황금 만능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명예도 황금으로 살 수 있고, 애정도 황금으로 얻을 수 있다.

– 오비디우스, 사랑의 기교

이 시대부터 닳고 닳은 사랑의 레파토리는 시작한다. 이제 삶을 가다듬는 역할로서의 사랑은 뒤로 밀리고, 육체와 열정이 맨 앞으로 나서기 시작한다. ‘사랑의 기교’에서 다루는 내용도 딱 그것이다. 여자의 No는 Yes라는 둥, 이성을 사귀려면 이성을 많이 만날 수 있는 곳으로 가라는 둥, 여자들의 얘기는 항상 잘 들어줘야 한다는 둥 요즘 남자들이 술자리에서 흔히 해주는 연애에 대한 충고가 죄다 실려있다.

심지어 헤어진 후에 “그녀는 이제 많은 여자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말까지. 그 안에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어떻게 연애를 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만 가득하지, 그러므로 삶이 어때야한다는 이야기 같은 것은 실려있지 않다.

로맨틱, 꿈에 복종했던 사랑

하지만 무엇이든 현실을 이길 수는 없는 법, 이민족의 잇다른 침입과 로마의 붕괴를 대신하여 새롭게 안정된 유럽의 체재가 만들어질 때까지, 그리고 생산력의 향상을 통해 더 이상 아이를 낳는 것이 공포가 되지 않을 때까지, 연애나 사랑은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것이었다. 특히 로마의 타락을 기억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에게는 그랬다. 이들에게 육체의 쾌락은 죄악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비로소 우리가 말하는 “연애”같은 연애가 시작된다.

사랑은 쌩쌩 소리를 내는 활로서 다섯 개의 화살을 쏘아 보낸다. 이 다섯 개의 화살은 우리들을 사랑에 복속시키는 다섯 가지 방법을 말한다. 그것은 보기, 이야기하기, 애무하기, 감미로운 키스를 나누기, 그리고 최종단계의 제일 멋진 행위이다. – Carmina burana

그리고 기독교의 교리와 자신들의 본능에 충실하고자 했던 기사들은 새로운 환상을 만들어내고, 스스로 그 환상에 복종할 것을 약속한다. 그것은 ‘기사도’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환상이었다. 그들은 사랑이나 연애조차도 그 ‘기사도’의 환상에 복종시켰다.

에로틱한 생각이 문화의 가치를 획득하려면 반드시 양식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화되고 환상적인 형식하에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담아야 한다. … 이는 여전히 다른 것과 똑같이 숭고한, 그러나 이번에는 동물적인 면에서 숭고한 삶에의 열망이다. 이것도 하나의 이상이며 음탕함의 이상이다.

– 호이징가, 중세의 가을

이제 결혼은 부정당하지 않는다. 13세기 이전까지 동성애가 크게 배척받지는 않지만, 이제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렇다고 개인의 해방이 이뤄진 것은 아니다. 결혼은 가문의 부(富)를 위해서 선택되고 이용되었다.

사랑의 이상, 충실함과 희생이라는 아름다운 허구는 결혼 특히 귀족 계급 사람들의 결혼을 지배했던 매우 물질적인 사고들 속에서는 발 붙일 곳이 없었다. – 호이징가, 같은 책

로맨틱한 환상 속에서 사랑의 열망도 과거와는 다른 것이 된다. 예전에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지금의 고통을 감수한다’라는 사랑의 아름다움이 ‘이룰 수 없는 것으로 인한 사랑의 고통’으로 바뀐다. 그것은 어쩌면 13~14세기의 대혼란 속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지켜내고자 하는 단발마의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관능적 사랑과의 밀접한 관계를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또 모든 본성의 윤리적 열망을 흡수할 수 있는 에로틱한 이상이 만들어졌다. 여성 숭배, 곧 모든 보상에의 희망을 포기한 숭배가 이 관능적 사랑에서 나온다. 그리고 사랑은 미학적이고 윤리적인 모든 완성이 피어나는 꽃피어나는 밭이 되었다. – 호이징가, 같은 책

자유 연애의 시작과 낭만적 사랑

중세 기사도와 궁정식 사랑(세련된 연애)은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냈지만, 변함없이 현실은 쉽지 않았다. 흑사병은 전 유럽을 휩쓸었다. 이제 사랑의 화살은 다섯 가지가 아니라 여섯 가지가 되었다. 그것은 결혼과 노화라는 화살이다. 여성들의 권리는 이전보다 높아졌지만 그것은 그들이 ‘생산’에서 한 몫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산업 혁명 이전의 사람들의 삶은 ‘굶주림을 겨우’ 면하는 삶이었다.

이혼이 아닌 죽음 때문에 결혼은 평균적으로 15년 정도 지속되었고 … 크륄레에서 다섯 명의 남편 중 한 명은 아내와 사별하고는 재혼하였다. … 인구가 팽창할 때마다 토지 보유는 단편화되고 궁핍이 침투하였다. … 최선의 방비책은 만혼을 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가정의 감정적 생활에 그 대가를 치르게 하였음이 확실하다. – 단톤, 고양이 대학살

그리고 산업혁명과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18세기의 유럽은 격변기에 휩싸였다. 귀족은 몰락했고 부르주아는 정권을 잡기 시작한다. 급속한 생산력의 팽창 속에서 사람들의 삶은 좀 나아졌고, 부르주아는 귀족들의 문화적 양식을 탐하기 시작한다. 이제 낭만적 사랑은 귀족이 아닌 부르주아의 것이 되었다. 루소의 신엘루이즈 같은 연애 소설이 불티나게 팔려가기 시작하고 낭만주의와 에로티시즘이 부활했다. 카사노바 같은 세기의 바람둥이, 그리고 자유연애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다.

그들은 키스를 하거나 부둥켜안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연인들은 남에게 발각되었다고 해서 그들의 애정 행위를 멈추지는 않는다.” 아무런 거리낌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 이제 막 태동하기 시작한 노동자 계층에서는, 애정적인 접촉이 그보다도 더욱 자유롭게 퇴폐적이었다고 사려 깊은 부르주아들은 말한다.

– 파비엔 카스타-로자, 연애, 그 욕망과 유혹의 사회사

자본주의 시대의 사랑

하지만 자유연애의 시대는 이성을 빙자한 폭력의 시대이기도 했다. 대규모의 전쟁과 그 사이에서 자행된 학살, 국민국가의 성립과 자본주의의 확장. 그런 환경 속에서 사랑은 남녀의 사랑만이 아니게 된다. 그것은 지혜에 대한 사랑 같이 거창한 것도 아니고, 성경이나 톨스토이가 말한 동정심, 자비심으로서의 사랑도 아니다. 사랑은 사람만이 아닌 우상, 사물, 관계 자체에 대한 집착으로 확대된다. 이에 대해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속에서 강하게 비판한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만든 타락한 인간형, “잘 먹고 잘 입고 성적으로도 만족하고 있지만, 자아가 없고 동료들과는 피상적 접촉을 제외하고는 거의 아무런 관계도 맺고 있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이다. 가장 일반적인 방법으로 사랑의 능동적인 특징을 나타낸다면, 사랑은 기본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그 사랑은 인간의 분리 상태를 극복하고 합일을 원하는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이며,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이라는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 있어서도 이런 점은 동일하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모두 새로 태어난다. 프롬은 사랑에 대한 플라톤적 관점을 이렇게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다만 지혜를 갈구하는 욕망이 세계 전체와 자신과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로 변화되었을 뿐이다. 어찌보면 프롬이 요구하는 성숙한 인간은, 또 다른 형태의 철인이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사랑에 대하여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사랑은 어떤 모습일까? 이 시대의 사랑은 크게 두가지 의미로 쓰인다. 하나는 연애고, 다른 하나는 동정심이다. 그 가운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랑은 연애와 거의 동일하다. 그런 연애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두 개인이 서로 신체적, 감정적 호의를 가지고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위치에 서로를 배정하여, 지속적으로 상호작용을 하는 것을 우리는 연애라고 부른다.

– 박현주, 로맨스약국

하지만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자유 연애는 결혼과 이어지지 않는다. 자유 연애와 결혼, 이혼이 일상화된 서구 사회와는 달리, 이 사회에서는 아직까지 연애와 결혼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다시 말해 연애는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결혼은 가문과 가문의 만남인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로마 시대의 사랑과 매우 비슷하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하나 있다. 이 사회에서 결혼은 가문의 부를 위한 시스템이 아니다. 한국 사회의 결혼 제도에는 개인의 신분상승이나 안락한 생활에 대한 욕망이 강하게 반영된다.

그런 점에서 프롬의 지적은 적절하다. 자본주의는 우리를 분해했다. 하지만 분리된 것은 자연과 인간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다. 그 가운데 미디어가 잘 짜놓은 프로그램이 들어앉는다. 우리는 어느새 프로그램된 사회/문화/관계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우리는 TV와 영화에 등장하는 연애를 동경하고, 그런 연애를 꿈꾼다. 본래 TV에 나오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사람이 아닌 것’이지만 우리는 그들을 ‘사람처럼’ 여기면서 좋아한다.

왜곡된 감각은 없는 관계를 만들어내고 있는 관계를 자꾸만 안보이게 만든다. 연애는 이렇게 해야하고 사랑은 이런 것이며 아빠는 이래야 하고 엄마는 이래야 한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오늘의 데이트 코스는 종로에서 영화 보고 인사동에서 차 마시고 삼청동에서 사진 찍는 것으로 획일화된다. 그리고 그 가운데 그동안 인류가 “사랑”이나 “연애”라고 불렀던 많은 감정들은 사라지고 만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고 우리의 사랑은 앞으로 어떻게 되어갈까? 철인이나 성숙한 인간이 되라는 말은 하지 말라는 말과 같다. 그것은 이룰 수 없는 미완의 기획이다. 하나 다행인 것은, 인간의 욕망은 결코 시들지 않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개별화된 개인들의 사이에서, 우리는 다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터넷을 통해 새로운 커뮤니티를 구성하는 것이기도 하고, 대상 하나에 집착하지 않는 새로운 연애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기도 하며, 자신의 본능과 감정에 좀 더 충실한, 하지만 천박하지는 않은 새로운 인간성을 구축하는 과정이 될 지도 모른다.

…물론, 그냥 그럴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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