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 미디어, 그리고 사이버 스페이스

– 세계 대전이라도 일어날까 봐 걱정된다.
– 왜? 왜 전쟁이 일어나는데?

… 위의 대화는 지난 9월 11일 미국에 대한 테러가 이뤄지던 날,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고 나서 30분 후에 일본에 있는 친구와 ICQ(인터넷 쪽지 프로그램)로 나눈 이야기다(물론 영어로 이야기했다… 믿지 않겠지만).

그날 나는 TV화면에 압도되어 지금 당장 전쟁과 공황이 일어날 것처럼 공포에 질려있었다. 전 세계를 커버하는 제국주의적 미디어의 힘은 그렇게 강력했다. 태평양 건너 아주 먼 곳에 사는 청년 하나의 정신을 공포에 사로잡히게 할 정도로. 하지만 운 좋게도 일본 친구의 한 마디 덕분에 겨우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미국에서 일어난 테러와 전쟁이 무슨 상관이며, 종말론 같은 이야기는 이미 99년에 끝난 것이라는 냉정한 한 마디에.

사실 남한에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 전쟁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아주 가까운 일이다. 반공 교육 탓인지 꼴통 우익들의 선동 탓인지, 아니면 젊은 시절 다녀온 군대의 기억이 몸에 박혀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틈만 있으면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협박하는 사람들과 제 2의 IMF 사태를 경계해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들 틈에서, 언제 위기 상황이 닥쳐올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불안감쯤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불안감은 쉽게 바깥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만약 그런 불안감을 누구나 바깥으로 표현한다면 사회는 지금과 같이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인간 사회는 불안한 신뢰를 바탕으로 형성된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디어의 힘은 놀라왔다. 비행기가 건물에 충돌하는 생생한 화면은 많은 이들의 잠재의식 속에 있는 불안감을 자극했다. 심지어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에도 미국인들은 패닉 상태에 빠져있는 것 같다(솔직히 나는 이 인간들이 더 불안하다. 얼마 전 신문에 실린 성조기를 든 인간들이 경기장에 가득 모여있는 사진은 경악스러움 그 자체였다. 자신들이 이제껏 누군가를 실컷 때려왔다는 사실은 잊은 채 자신들이 한 대 맞았다고 분노에 몸을 떨고 있는 깡패를 보는 기분이랄까).

아아, 물론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하는 테러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이 연재는 ‘사이버 문화예술’에 관한 것이며, 나는 언제나 그 사실을 뼛속 깊이 인식하려고 노력한다. 친구와의 쪽지 대화를 하면서 나는 몇몇 인터넷 토론 게시판과 뉴스 게시판, 그리고 통신망의 토론실을 방문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현상이 발생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전 세계의 네티즌이 미디어의 일방적인 힘에 반기를 들어버린 것이다.

 

미디어의 침략에 저항하라

미디어의, 제국주의적 미디어의 힘은 왜곡된 힘이다. 이번의 테러 사건이 희생자가 많고 그 방식에 있어서 놀라왔던 것은 사실이지만, 만약 국제 무역센터 건물이 무너지지만 않았어도 이 정도의 충격을 주진 못했을 것이다. 아마 1960년대에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지금처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불특정 다수의 민간인에 대한 테러, 신기술의 활용과 격렬한 증오로 이뤄지는 일명 ‘뉴테러리즘’이라 불리는 이런 사건들은 20세기말부터 꾸준히 나타났던 사건이었다(http://www.kinds.or.kr에 가서 지난 오클라호마시 연방정부청사 폭탄테러 사건을 검색해 보라. 당시의 기사들을 보면 지금의 테러에 대한 해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폭을 넓혀보면 미국이나 이스라엘이 학살한 불특정 다수의 민간인들의 숫자도 결코 적지 않다.

하지만 전 세계가 이렇게 놀라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엄청난 사람이 죽어갔던 걸프 전쟁이나 코소보 전쟁, 아프리카의 내전과 중동의 분쟁, 테러가 없어도 늘상 죽어가는 아프리카 난민들에 대해선 얘기하지 않았다. 바로 옆의 일본에서 발생했던 독가스 사건이나 대지진에도 이렇게 놀라지 않았다.

다시 말해, 힘있는 국민들의 죽음에는 경악해도 힘 없는 국민들의 죽음은 별 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한다. 아니다. 아니다. 미디어가 비춰주지 않는 죽음들에 대해선 알지도 못한다. 당신은 한국 전쟁에서 몇 명이 죽었는지, 그리고 남한 정부의 손에 의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는지를 알고 있는가? 우리는 이제껏 그래왔다. 한 쪽 모습만을 보여주는 미디어의 화면을 진실이라 믿으며 속 편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인터넷이 확장되어가는 시대에, 획일적으로 취급됐던 대중은 다시 살아있는 개개인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뉴욕시의 생존자들이 전화불통으로 인해 인터넷 쪽지 프로그램과 전자 우편으로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했다는 이야기랑은 상관 없다. 평범한 사람들이 미국과 CNN의 이야기만이 전부가 아니란 것을, 우리는 진실을 똑바로 봐야한다고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인터넷은 CNN만큼 빠르지는 못했지만 더 많은 정보를 전해줬고, 다른 사람들과 상호교감하며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 줬다. 처음에는 테러의 희생자들에 대하여 추모의 글을 올리던 사람들이 어느덧 진실을 알기 원했고, CNN과 미국이 이슬람 문명을 테러 집단으로 몰아가는 듯한 분위기에 반대하는 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글들은 이제까지 볼 수 없을 정도로 과격하게 미국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었다(오죽 했으면 한 교포가 미국이 우리를 공격할 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반미글 올리는 것을 자제해달라는 글까지 올렸을까).

네티즌들은 토론을 통해 명확한 증거없는 테러용의자 지목과 똑같이 민간인이 학살당할지도 모를 보복 전쟁에 점점 반대하기 시작했으며, 어느새 전쟁반대와 평화를 외치는 운동이 자발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미국 사람들 죽었다고 조기 계양하고 사이렌 울리며 묵념을 강요하는 정부와는 반대로, 평화 선언조차 막아버리는 공권력과는 반대로, 사람들은 수많은 정보와 토론을 통해 스스로가 해야 할 일을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남한만의 일이 아니었다. 미국에서도, 영국에서도, 그리고 다른 많은 나라의 네티즌들도 똑같은 행동을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불행히도 영어로 된 사이트 외에는 확인하지 못했다). 뭐, 조선일보 독자 게시판에야 이 기회에 북한에도 핵폭탄을 떨어뜨려 달라는 인간들이 넘쳐나고, 노스트라다무스가 이미 예언했다, 무너지는 건물에서 악마가 나왔다, UFO가 보였다는 등의 괴소문도 꼬리를 물고 나타나긴 했지만 말이다.

사람이 변하면 세계가 변한다

촘스키가 말했다던가. 사람은 전쟁이 자신의 근처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에 멀리 떨어져 벌어지는 전쟁을 즐긴다고. 아마 지금 보복전쟁을 외치는 수많은 미국인들과 그것에 동조하는 한국인들도, 그것이 자신이 있는 곳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렇게 쉽게 열광적으로 전쟁을 외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일본 애니메이션 ‘패트레이버’ 극장판 두 번째 이야기를 보면, 자위대를 동원하여 도쿄의 한 가운데서 테러를 일으키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전쟁은 결코 삶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란 것을, 사람들이 ‘설마 그럴까’라고 생각하는 일이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보여주기 위해 테러를 일으킨다고 말한다.

확실히 그동안 미디어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가상의 경험은 현실로 느껴지지 않았다. 나와는 상관이 없는, 그냥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구나 정도의 정보의 차원에서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일이 없을 것이라고 관습적으로 믿어왔던 미국에서의 대규모 테러 사건을 통해, 우리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이란 없다는 것을, 모든 것은 우리의 주위에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미래는 불확실하며, 어쩌면 우리가 이제까지 믿고 있던 ‘안정적인’ 세계는 이제 깨어져버린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안전한 곳은 어디에도 없으며, 그것을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희망은 없는 것일까. 21세기는 그런 불확실한 폭력을 안고 사는 야만의 시대로 향해가고 있는 것일까. 폭력이 폭력을 낳고, 발전된 기술이 더 손쉬운 폭력을 부르고, 패권주의와 그에 맞서는 증오가 사람을 잡아먹는 시대는 계속되고 말 것인가. 비록 인간 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말이지만, 나는 사람이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고 믿는다.

이번 사고를 계기로 인터넷 속에서 보여준 많은 사람들의 행동, 전쟁반대와 평화를 외치는 그들의 행동은 아직 진행 중이다. 따라서 서투르게 평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미국은 패권주의를 위한 전쟁을 시작하고 있으며, 세계 각국은 서로의 이익을 따지기에 분주하다.

아이러니하지만 지난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 실험이 일본의 군국주의화에 도움을 주었듯이, 이번 테러 사건은 미국의 패권주의 세력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들은 사람들의 사생활을 침해할 수 있는 법안과 MD 계획을 별다른 저항 없이 통과시켜 버렸다.

하지만 가능성은 나타났다. 희망은 거창한 선언이나 기술의 발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고 얘기하는 사람들의 관계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우리가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더 좋은 결과를 얻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몇몇 지도자를 자처하는 인간들의 속셈이나 책략에 의해서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토론과 논의 속에서 세계가 움직일지도 모른다는.

아나키적인 환상일까? 그렇지만 나는 지금, 인터넷이라는 판도라의 상자 속에서 희망이 깨어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 월간 민족예술 2001년 10월호에 실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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