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 속에서 사는 기분이 어때?

공포 속에서 사는 기분이 어때?
… 그게 노예의 기분이야

– 영화 <블레이드 런너>의 마지막, 로이의 대사 中

홍기빈 연구위원의 말대로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이후 급변하는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을 붙잡고 있는 지배적 정서는 불안감이다. 내년 아니 내일의 자신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유연성 넘치는’ 시장 사회 한국의 우리 마음속은, 안정된 민주주의 사회 아테네 사람들은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온갖 불만과 불순한 감정’으로 꽉 차 있다.”

요하임 바우어는 “사람의 몸에는 무의식을 통해 문제를 지각하고 그 당사자도 모르게 정신적 반응과 생물학적 반응을 일으키는 능력이 있다.(몸의 기억, p16)”라고 말한다. 무의식이 지각하는 문제는 몸에 스트레스와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문제다. 인간은 일정 이상의 스트레스나 고통이 지속된다면, 우울증에 걸리거나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게 된다.

신자유주의, 무한 경쟁, 강요된 유목민적 삶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이런 스트레스다. 명상, 점성술, 정신분석과 심리치료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것은 이런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한 우리의 방어기제다. 매체는 우리의 이런 불안과 불만을 다루는데 능숙하다. 그들은 대중의 즉각적인 관심에 즉시 반응하면서, 사건을 정도 이상으로 부풀려 포장한다.

우리가 느끼는 불안과 불만이 모두 ‘어떤 사건의 탓’이거나, ‘이것만 이뤄지면’ 우리 모두가 잘살 수 있을 것처럼 뻥을 친다. 그래서 “논문 조작자가 노벨상 후보 물망에 오르기도 하고, ‘알몸 사진’이 안방으로 배달되기도 하고, 멀쩡한 사람의 ‘신체 특정 부위’가 부산 어느 병원의 수술대에 오르”는 일을 과잉생산해서 포장하기도 한다.

그들은 결국 헛된 결말의 요리사다. 맛보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 헛된 희망과 헛된 불안이란 재료로 요리된 헛된 결말의. 하지만 헛된 결말로 모든 소동이 마무리된 다음에도, 우리가 느끼고 있는 공포는 가시지 않는다. 무슨 일을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공포, 언제라도 안정된 기반을 잃을 수 있다는 공포, 내 옆에 있는 모두가 내 경쟁자일지도 모른다는 공포, 거리를 걷다가 언제 사고를 당할 지도 모른다는 공포,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가 언제 재개발되고 뒤엎힐지 모른다는 공포, 내가 가입한 펀드가 언제 수익률 마이너스가 될지 모른다는 공포, 내가 나이가 들면 돈이 없어서 지금의 생활을 누릴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아프면 우리집에서 애써 벌어놓은 것들이 한순간에 치료비로 다 날아가버릴지 모른다는 공포….

의식은 느끼지 못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자각하고 있는 공포. ‘블레이드 런너’의 레플리컨트는 원래 “노동력”과 “군사력”을 확충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조인간이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짧은 수명은, 그들이 인간에게 거역할 수 없도록 만들어진 장치였고, 몇몇 레플리컨트에게 주어진 “가짜 기억”은 그들이 인간인 척 행동하며 인간을 돕도록 만들어진 장치였다. 하지만 현대 세계에 레플리컨트는 필요 없다. 우리 스스로가 이미 그런 레플리컨트 역할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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