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바라보기, 가까이서 바라보기

▲ Detail van het “Diorama” in het Carousselpaleis.

디오라마와 파노라마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두가지 방식이기도 하다. 흔히 미시적으로 본다거나, 거시적으로 본다고 하는 것. …물론, 어떤 방법을 써도 세상의 ‘진실’을 완전히 알 수는 없다. 당연한 것이, 우리는 신이 아니니까. 멀리서 떨어져보면 모든 것이 한 없이 작아만 보이고,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작은 것들이 너무나 커보인다. 우리는 우리가 겪은 경험의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직접 경험해서 얻은 것이 세상의 모습 전체다.

3. 하지만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할 수는 있다. 내가 가진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다른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가 느낀 공포를 미루어 짐작해 보는 것은 가능하다. 아니 가능하다 못해 매우 중요하다. 멀리서 보는 것, 가까이서 보는 것 모두, 우리 자신이 가진 경험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찾아낸 방법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미디어에 전달된 것이 ‘진실’이라고 믿는 사이, 수많은 사람들은 미디어에 보도된 자신의 모습을 포장하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그것은 진실만을 전달해주고 있지 않다. 현상의 그림자 정도에 불과하다. 하다못해 재테크 하나를 하려고 해도 현장을 확인하고, 기업을 직접 실사하는 것이 기본이 된 것은 그런 이유다. 그렇다고 현장에서의 경험이 진실을 말해주지도 않는다. 현장에서 모든 것을 보기에는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결국 너무 많은 정보도 너무 적은 정보도 우리를 환상에 빠뜨리게 될 우려가 크다.

… 균형을 잡으며 생각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결국 이미지(환상)를 읽을 줄 아는 힘이고, 대상 사이의 관계(구조), 전체 사안의 맥락(역사성)을 파악할 줄 아는 힘이다. … 진실은 오직 관계에서만 드러난다. … 물론 모형화라는 비난은 감수해야 하지만.

…아, 이거, 생각해보니…. 사기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도 키워야만 하는 힘이다. 뭐, 범죄수사를 할때 필요한 능력이기도 하다. 자고로 검사 출신들은 ‘말’을 믿지 않는다. … 결국 우리는 이 세상에서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모두 과학수사대 CSI 가 되어야 하는 셈…이다.


4. 전경을 미워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전경 vs 시위대의 구도로 가서는 안된다. 전경이 잘못된 행동을 했으면 그 행동을 비난해야 한다. 그것이 전경이란 신분을 가지고 있는 개인에 대한 미움으로 이어져서는 안된다. 나쁜 놈들이 있을 수도 있다. 세상 어딜가도 꼭 싸가지 없는 것들이 한 둘은 있다. 이건 시위대라고 달라지자 않는다. 우리라고 100% 선량한 사람들은 아니다. 뭐, 나도 내 자신을 별로 좋은 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와 같은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다. 공동체의 기반에는 딱 하나의 근본적 믿음이 있다. 그것은 “절대로 그를 내치지는 않는다”다. 우리가 ‘가족 같은 회사’라는 말에 왜 치를 떠는가? 필요하면 희생을 강요하면서도 필요 없으면 내다 버리는 꼴을 수도 없이 봐왔기 때문 아닌가? … 우리는 슬프지만, 회사가 부도 났을 때 ‘노동자들은 아무 죄가 없으니, 다른 곳으로 모두 취직하게 해주십시요’라며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사장 따윈 본 적이 없다.

굶어죽어가는 사람이 있으면 살려야 하는 것도, 남의 집 아이가 부당학게 학대당하면 화내는 것도, 바로 우리가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같은 대열에서 같이 행진하는 사람에게 이유없는 친밀감을 느끼는 것도, 누군가가 빵과 음료수를 사와서 나눠주는 것도, 우리가 같은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지금 전/의경 출신 블로거들이 불법 집회였으니 폭력 진압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라며 글을 쓰는 것도 결국 그런 이유 아닐까. 자신이 전/의경 출신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이 사회란 공동체에서 배척받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우리가 무슨 죄인데 싸잡아 욕먹어야 하냐는 불안감. … 하지만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은 공동체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욕 먹고 집행이 중지되어야 할 것은 현 정권의 잘못된 정책과 그에 대해 책임을 진 사람들이지, 전/의경 전체는 아니다. … 다만, 과격한 진압에 대해서는 결국 책임을 지긴 져야만 한다.

5. 백골단이란 부대가 없어지긴 했다. 하지만 90년대 시위 현장에서도 우리가 백골단이라고 부르던 사람들은 있었다. 바로 가벼운 복장에 동그란 화이바를 쓴 체포조였다. 가끔 흑골이라 부르던 사람들도 있었는데, 서울시경 직속이라고 했었다. 화이바가 까만색이라서 흑골이라 불렀었다.

이처럼 백골단이란 명칭은 체포조-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특정 부대를 가리키며 사람들이 백골단이라고 쓰는 것이 아니다. 자꾸 그 부대가 없어졌는데 백골단이라고 왜 그러냐-는 사람들, 말이 쓰이는 맥락을 봐야지, 자꾸 딴지 걸면 곤란하다. 사람이 쥐도 아닌데 왜 자꾸 쥐새끼라고 그러느냐-는 말과 별로 다르지 않기 대문이다.

6. 우리가 견지해야할 원칙은 비폭력 불복종. 막아야할 것은 국민의 삶을 해치게될 정책들. 시위에 나서는 이유는 ‘정책실행을 막기 위해’ ‘실질적인 실력 행사를 통하여’ ‘정치권에 압박을 가하는 것’. … 개인적으론 여기에 환율정책 좀 어떻게 했으면 좋겠지만.

촛불 집회가 거리 시위를 넘어서 나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이들이 고민이 모여야만 한다. 지금처럼 ‘가두시위’에만 이슈가 몰려서는 안된다. 그럼 진다. 어느 순간 가두 시위 자체가 시위의 목적이 되버리면 안된다. 가두 시위는 방법중 하나일 뿐이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좀 더 생할 속에서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이 만들어져야만 한다.

소고기 재협상, 고시 철회 vs 소고기 수입 강행…의 구도가 거리 시위 정당성 vs 거리 시위 불법성 논란으로 변질되서도 안된다. … 그리고 개인적으론, 한총련…관련 단체들은 나서지 말고 빠져주기를 원한다. 제발. 그냥 개별적으로도, 총학생회 차원에서도 참여할 수 있잖아…-_-;;; 나서지 말고 그냥 따라만 와주면 안될까.

7. 뭔가를 더 쓰고 싶었는데 잊어버렸다. 이 놈의 붕어IQ. … 아, 당해본 자의 공포는 당해본 자만이 안다..라는 이야기를 쓰려고 했던가. 공격자들은 모른다. 방어하는 사람만이 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 그 공포를. 그 아수라장을. 전경이 말하는 공포도 시위대가 말하는 공포도, 결국 그 일방적으로 당할때의 공포다. … 하지만 그 공포를 느끼게 만든 사람은 시위대도 전경도 아니다, 거리에 서 있는 그들이 아니다. 거리를 쳐다볼 용기도 없으면서, 편안하고 안락한 곳에 앉아 명령만 내리는, 바로 그 사람들이다.

* 다음 글을 쓰기 위해 정리해 본 잡다한 생각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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